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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432화 (432/609)

00432  깨어난 군주  =========================================================================

테러 위협, 그 가능성에 청주공항은 살얼음판 분위기가 되었다. 중앙정부 지휘로 공항 전체가 통제 당했고, 한국과 미군에서 공동 수사팀이 나와서 전용기를 살폈다.

마치 국가 원수가 위협을 받은 것 이상으로 살벌하고 엄중한 확인 절차가 이뤄졌다.

“외부에서 폭탄이 설치된 흔적은 없습니다. 테러가 아닙니다.”

“엔진이 불량이거나 혹은 알 수 없는 어떤 원인으로 과부하를 일으킨 게 분명합니다.”

최종적으로 그런 결론이 나오기까지, 다들 얼마나 살 떨리는 긴장감에 시달렸는지 모른다.

만약 인위적인 테러라고 결론이 나왔으면 세상이 발칵 뒤집혔을 것이다.

한서진에게 직접 손을 쓴 세력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말이 될 테니. 그 세력을 박멸하기 전까지 미국과 한국은 조금도 안심할 수 없게 된다.

조사를 맡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책임자는 한서진에게 얼른 이 소식을 전했다. 테러가 아니라는 말을 들은 그는 의외로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내 목숨을 노리는 이들이 많아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인가?”

아리송한 질문에 책임자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틀린 말은 아닌데, 뉘앙스가 이상했던 것이다.

공동 수사를 맡은 미군 책임자가 재빨리 나섰다.

“박사님께서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서 그렇습니다. 많은 연구와 발견으로 세상을 바꾸셨죠. 당연히 박사님을 노리는 이들이 있을 겁니다. 물론 아직까지 중국 외에 직접적으로 박사님에게 위해를 시도한 세력은 없었지만요.”

“그렇군.”

신효진은 갸웃거리며 한서진을 바라봤다.

분위기가 평소와 조금 달랐다. 위험천만한 사고를 겪은 직후라서 그냥 예민해져 있는 것일까?

조사 책임자들이 물러가고, 한서진은 신효진에게 눈을 돌렸다.

물끄러미 쳐다보는 눈빛은 사색하는 사람의 것처럼 묵직하고, 고요했다.

처음이었다. 그가 저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신효진은 자신도 모르게 부끄러운 마음이 솟아서, 그만 시선을 피했다.

‘박사님이 갑자기 왜 저렇게 쳐다보시지?’

그를 흠모하는 그녀에게 있어 저런 시선은 견디기 어려웠다. 잠시 눈빛을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녹아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효진…… 씨.”

마침내 그가 입을 열어 자신을 불렀다. 목소리에서 어떤 복잡한 망설임이 느껴진다. 더불어 호칭이 입에 달라붙지 않는 듯한, 익숙하지 않은 껄끄러움도.

“여분의 전용기가 있습니까?”

“네? 아, 네. 물론이죠.”

“지금 준비할 수 있나요?”

“네, 준비해놓으라고 지시할까요?”

신효진은 저도 모르게 수화기를 들어 올리면서 다시 한 번 더 확인했다. 그 순간 고요한 그의 눈빛과 다시 한 번 마주쳤고,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얼어버렸다.

이상했다. 저 눈빛을 받으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 기분, 대체 뭐지? 오늘따라 그가 왜 이리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거지?

“준비하세요. 바로 제주도 연구선으로 갈 겁니다.”

“네? 바로요?”

신효진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제주도에서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제주도로 돌아간다는 말인가?

‘잊으신 게 있는 걸까?’

신효진은 정신을 차리고 얼른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지시할게요, 박사님.”

“네, 부탁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한서진은 눈을 감았다.

마치 방해받기 싫다는 제스처로 느껴져, 신효진은 머뭇거리며 사무실을 나섰다.

문을 닫고 그녀는 흘끔 뒤를 돌아봤다.

“박사님…… 오늘따라 정말 이상하시네.”

‘마지막 접촉 이후,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나진 않았다.’

꿈으로의 진입이 막히고 열흘 가까이 지났다. 원래라면 9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러야 했다.

하지만 실제로 흐른 시간은 2년이 못 된다. 왕은 생각만큼 시간이 흐르지 않은 것에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초조함을 느꼈다.

‘꿈의 시간 흐름이 느려진다는 것은…….’

시간 흐름이 느려진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레노지안의 시간 흐름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고, 이것은 시간 흐름이 동기화를 일으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꿈의 세계, 즉 저주로 만들어진 가상의 공간이 점점 닫히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서진, 아니 이곳의 나의 염원인가.’

지난 시간 동안 한서진은 많은 일을 겪었다.

자신이 전에 알던 것보다 훨씬 유명해졌고, 전 세계의 지지와 흠모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꿈에 취해 현실을 잊어버리기에 충분하고도 넘치는 달콤함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저주가 의도하는 바이리라.

왕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이내 누군가를 떠올리고는 눈빛이 흔들렸다.

‘왕비…….’

신효진, 아니 왕비의 모습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이곳의 모든 것은 저주가 만들어낸 허구이다. 그리고 허구는 한서진, 정확히는 왕의 의식에 기반한다.

그러나 딱 하나만큼은 아니다. 바로 왕비, 신효진이다.

왕비는 자신의 혼을 제물로 바쳐 저주를 완성했다. 그리하여 이 허구의 세상에 혼이 머무르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신효진.

이곳의 신효진은 왕비로서의 기억이 있을까? 아니면 자신이 누군지 잊어버렸을까?

‘왕비의 반응과 태도는 완벽했다.’

자신을 대하는 왕비의 모습은 영락없이 레노지안의 모든 것을 잊은 사람의 것이었다.

그러나 만약 왕비가 연기하고 있는 거라면? 저주가 완성될 때까지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순진한 척 평범한 여자를 가장하고 있는 거라면?

주먹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며, 분노가 샘솟듯이 솟구쳤다.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있었소?”

나지막한 음성에 선명한 분노가 실렸다.

모든 것을 다 가지지 않았나. 대륙의 지배자의 몸과 마음, 그리고 만백성의 사랑과 존경. 끝을 모르는 막대한 부와 사치, 그리고 강력한 힘까지.

그런데도 왜 만족을 못했을까?

왜 자신에게 그런 저주를 걸어, 세상에서 지워버리려고 한 것일까?

이렇게 스스로의 혼을 꿈속에 바쳐가면서, 대체 왜?

왕은 그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녀는 왕비로도 만족을 못해, 기어이 직접 왕이라도 되고 싶었던 걸까?

「기장입니다. 잠시 후 우리 비행기는 제주공항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기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왕은 흐트러진 마음을 잘 갈무리했다. 한손으로 얼굴을 덮는데 문득 핸드폰이 진동했다.

―오빠, 다시 제주도로 돌아가셨다면서요? 제 얼굴도 안 보고.

송하나였다. 한서진의 약혼녀이자, 통찰안이 적합한 반려라고 인정한 여성.

왕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봤자 자신에게는 꿈속의 연인, 깨어나면 사그라져버릴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한서진이 ‘현실’을 부정하고, 꿈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것에는 그녀 또한 원인 역할을 하는 중이다.

그가 이 꿈에 취하고 만족하도록 속삭이고 달라붙는, 달콤한 독과 같은 여자.

왕은 메시지를 확인하고서도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이곳에 뭔가가 있다.’

제주도에 매우 중요한 뭔가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확인하러 가는 중이었다.

아쉽게도 한서진의 기억을 공유할 수 없었다. 마치 차단벽이 내려진 것처럼, 그의 기억에 접근이 막혔다. 저주의 강화이거나, 혹은 직접 꿈에 강림한 부작용일 것이다.

태블릿을 통해 타르타로스에 접근하려고도 시도해봤지만, 패스워드를 알 수가 없어 실패했다.

통찰안을 쓰면 간단히 해결되겠지만, 왕은 최후의 수단으로 미뤘다. 권능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저주의 공간이 자신에게 거부 반응을 일으켜 조기에 튕겨낼 테니.

어렵게 강림한 만큼, 최대한 오래 머물러서 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할 셈이었다. 권능을 사용하면 그 시간이 줄어든다.

‘철저하군.’

중국 항공기 추락사건 때처럼, 자신에게 육체 통제권을 빼앗기는 때를 대비한 듯이 보였다. 이래서야 한서진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정보를 캐내기 어렵다.

패스워드를 알지 못하면 주요 연구에 관한 것을 일절 보지 못하게 해놓았으니.

‘분명히 뭔가가 있다.’

제주공항에 내리자 Table A에서 보낸 차량이 대기 중이었다.

왕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미군기지 해역에 있는 연구 선박으로 향했다.

니트론 교수가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비행 중에 문제가 있었단 말은 들었어요. 그래도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한 박사.”

“감사합니다.”

“그런데 왜 올라가자마자 다시 내려왔습니까? 적어도 열흘 이상은 서울에서 머물 줄 알았는데.”

“급히 확인해야 할 게 있습니다. 안내 부탁합니다.”

왕은 거짓 미소를 지은 채 니트론을 주시했다.

한서진의 사고 소식을 들은 니트론은 처음에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을 만큼 깜짝 놀랐고, 별 탈이 없다는 추가 소식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테러가 아니라 엔진 불량 같다는 조사 결과에는 마저 마음을 놓았다.

그래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한서진이 갑작스럽게 다른 전용기를 타고 내려왔다.

‘왜 올라가자마자 벌써?’

고개가 갸웃거려지긴 했지만, 니트론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를 맞았다.

“안내 부탁합니다.”

“알았어요, 안내…….”

안내를 부탁한다는 말에 니트론은 별 생각 없이 출입통제구역으로 안내하려다가 퍼뜩 위화감을 느꼈다.

‘가만, 암호를 말 안 했는데?’

오리할콘 뼈가 태평양 상공에 떠오르고 아카식 블레이드를 그에게 공개한 후, 한서진은 별안간 기이한 규칙을 제안했다.

자신이 ‘아카식 블레이드’라고 먼저 말을 꺼내기 전에는, Table A를 비롯한 아카식 블레이드에 관한 어떤 이야기도 꺼내지 말자는 것이었다.

마치 자기 자신까지 경계하라는 듯한 뉘앙스였기에 니트론은 물론이고 구프게니, 정지원도 처음에는 웃어넘겼다.

―왜요, 누가 한 박사로 분장해서 기밀을 빼가기라도 할까 봐 그럽니까?

―그럴 수도 있지요. 저는 그저 철저히 하자는 겁니다.

―알겠어요, 알겠어. 늘그막에 별 낯 뜨거운 걸 다 해보는군.

처음에는 실수도 많이 했다. 한서진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그다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한서진으로 위장해서 출입통제구역에 접근한다? 전혀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아닌가.

그러나 한서진이 매번 진지하게 지적을 하자 실수의 빈도는 차츰 줄어들었고, 이제는 완전히 몸에 배었다.

하지만 습관이 된 것일 뿐,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반쯤 장난이나 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왔는데, 한서진이 지금 처음으로 규칙을 어겼다. 그것도 본인 스스로가.

니트론은 왠지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서 한서진의 눈치를 살폈다.

“어디로 안내하란 말이오?”

“당연히 연구실로 안내해 주십시오.”

더욱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들이 실수할 때마다 늘 엄격하고 진지하게 그러지 말라고 지적을 하던 사람이, 정작 자신이 정한 규칙을 지키지 않고 있다. 아니, 그것을 잊어버린 듯이 보이지 않는가.

그렇다고 정말 다른 사람? 그건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평소와는 분위기나 말투가 조금 다르긴 했지만, 눈앞의 청년은 엄연한 한서진 본인이었으니까. 철통같은 경호망을 뚫고 다른 이가 그로 위장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그게…… 지금 한 박사가 맡고 있는 연구실이 다섯 개가 넘잖아요. 어느 연구실로 안내를 하란 말인가요?”

어찌 보면 별거 아닌 보안 절차 놀이가 끝난 셈이지만, 니트론은 설명할 수 없는 예감에 그렇게 떠보았다.

한서진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말했다.

“그야 제1연구실을 말하는 겁니다.”

“……제1연구실, 알겠어요. 이쪽으로 와요.”

아무렇지 않게 등을 돌리는 순간, 니트론의 표정이 희미하게 굳었다.

한서진은 끝까지 아카식 블레이드란 단어를 먼저 입에 담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다. 그가 보안 절차 놀이가 지겨워져서일 수도 있으니.

그러나 이곳에 다섯 개의 연구실은 없다. 오직 하나의 단일 연구실만 있을 뿐이다.

‘대체 뭐야?’

============================ 작품 후기 ============================

내 머릿속의 지우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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