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31 깨어난 군주 =========================================================================
기상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한서진은 전용기 창문을 통해 보이는 천둥구름을 보며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서울로 귀가하는 길이 제법 험난했다.
“날씨가 최악이네.”
기상 예측 모델은 근 일주일 이상 악천후가 한반도와 인근을 휩쓸 것이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천재지변 같은 건 없겠죠? 태풍이나 홍수 같은 거요. 컴퓨터는 뭐라고 하고 있나요?”
비서로서 동행한 신효진이 걱정 된다는 듯이 물었다.
“물난리는 좀 날 수 있겠지만, 큰 홍수까지는 아니에요. 비는 좀 많이 오고 바람이 세겠네요. 문제는 이런 날씨가 일주일 넘게, 한반도 전체에서 일어난다는 거죠.”
“이상하게 요 몇 년 간 천재지변 난리가 많이 일어나는 거 같아요. 태풍도 그렇고, 얼마 전에 북한 에테르 스톰도 그렇고요.”
한서진은 보이지 않게 쓴웃음을 지었다.
신효진의 걱정은 태반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것이었고,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통계를 보면 근 몇 년을 중점으로 태풍이나 홍수, 지진 등 자연재해의 빈도가 부쩍 증가했다. 무려 30% 이상이나 된다.
특히 북한에 일어난 에테르 에너지의 폭발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고 있었다. 언제 어느 때 그런 재해가 자신에게 닥칠지 모르는 일이다 보니.
“근데요, 박사님.”
“예, 효진 씨.”
“그게 사실이에요? 박사님께서 미국에 안 가고 한국에만 거주하시는 이유가, 한국이 에테르 스톰에서 가장 안전권이어서라는 말이 있던데.”
“예?”
한서진은 황당한 듯이 쳐다봤고, 신효진은 어설프게 웃으며 부끄러워했다.
“요즘 그런 말들이 하도 많아서요. 박사님 얼굴 보니 아닌 것 같네요.”
“에테르 스톰은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특정 지역이 에테르 스톰에서 얼마나 안전한지는 수치화할 수 없어요. 예측 모델은 몇 시간, 혹은 며칠 전에 미리 예측을 할 수 있을 뿐이에요.”
“아, 그렇군요. 전 또.”
한서진도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났다.
자신이 한국에서 거주하는 게 그런 식으로 또 해석이 되고 있을 줄이야.
“그래도 에테르 워치가 에테르 스톰을 감지하는 건 사실이죠?”
“아, 그건 사실이에요.”
한서진이 직접 제조한 에테르 워치는 강력한 에테르 에너지의 응집 반응에 가까워지면 비정상 반응을 일으킨다. 덕분에 착용자는 에테르 스톰의 위해를 벗어날 수 있다.
이미 몇 번이 넘는 선례가 있었고, 덕분에 세계 대부호들 사이에서는 에테르 워치를 하나쯤은 장만하는 게 필수로 인식되고 있었다. 자신의 목숨 값이나 다름없으니.
뿐만 아니라 에테르 워치의 아름다운 디자인, 그리고 한서진이 직접 제조했다는 사실은 사치품으로서 인식되기에 충분했다.
“요즘에는 레노지안 이야기를 잘 안 물어보시네요.”
“아…… 좀 정신이 없었어요.”
“사실 저도 별로 말씀드릴 건 없어요. 그냥저냥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에요. 가끔씩 마수들이 출몰하긴 하지만 어렵지 않게 무찌르고, 시민들이 삶에 가지는 만족도도 높아요.”
신효진은 피식거리며 덧붙였다.
“여기 지구도 레노지안 같았으면 좋을 텐데 말이죠.”
“…….”
“훌륭하고 강력한 왕이 다스리는 곳이 그렇게 평화로울 줄은 몰랐네요. 하지만 지구에서는 재현이 어렵겠죠?”
한서진은 담소를 나누면서 아카식 블레이드와 오리할콘 뼈를 떠올렸다.
그 두 가지를 신효진에게 보여준다면 그녀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혹시 그녀는 그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아볼 수 있을까. 그런 망설임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효진 씨는 레노지안과 여기 지구, 어느 쪽이 더 살기에 좋아요?”
“실례지만 박사님, 저 거기에서 왕비인데요. 대륙에서 서열 2위이라고요.”
“왕비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 가정한다면?”
신효진은 잠시 생각한 뒤 즉각 대답했다.
“그래도 레노지안이 더 좋아요.”
“그 정도로 살기 좋나요?”
“그럼요. 거기에도 인터넷은 있다고요. 단지 컴퓨터 원리가 전기전자가 아니라서 그렇죠. 사람들 인심 좋지, 상벌 제도 엄격하지, 왕 아래 모든 사람이 완벽한 공정 공평함을 누리고 있는데, 솔직히 지구보다 훨씬 살기 좋죠.”
피식 웃음이 나올 수만은 없는 게, 한서진도 이미 느끼고 있던 바였다.
과학 대신 마법 문명이 극도로 발달한 대륙, 그리고 어떤 비합리도 용납하지 않는다. 지도자가 추구하는 것은 대륙 전체의 행복, 그곳의 시민들은 적어도 지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안락함을 누리고 있었다.
그때 기체가 거칠게 출렁거렸다.
“아악!”
신효진은 비명을 지르며 의자에서 앞으로 튕겨져서 맞은편에 앉은 한서진의 무릎 위로 넘어졌다. VIP실이다 보니 미처 안전벨트를 하고 있지 않은 탓이었다.
“효진 씨, 괜찮아요?”
“죄, 죄송해요.”
그녀는 얼굴이 빨개져서 얼른 자리에 돌아갔다. 여승무원이 커튼을 걷고 빠르게 다가와서 말했다.
“난류가 심한 모양입니다. 안전벨트를 착용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한서진도 얼른 안전벨트를 착용했고, 승무원이 신효진의 벨트 착용을 도와주었다.
기체의 흔들림이 더욱 심해졌다. 신효진은 불안한 듯이 주변을 둘러봤다.
“기류가 엄청 안 좋나 보네요.”
“그러게요.”
“날씨 컴퓨터는 뭐래요? 큰 문제는 아니래요?”
“……음.”
날씨 데이터를 체크하는 한서진의 표정은 살짝 굳어 있었다.
“에테르가 필요 이상으로 과부화 중이긴 하지만, 에테르 스톰을 일으킬 정도는 아닌데. 이 정도 과부하는 자연계에서도 얼마든지 자주 일어나는 수준이라…….”
그때 좌석에 장착된 실내 전화기가 울렸다. 기장으로부터 온 연락이었다.
“네, 한서진입니다.”
「박사님, 청주공항에 비상 착륙하겠습니다.」
“네?”
「엔진 추력을 잃었습니다. 원인은 알 수 없습니다만, 이대로 서울까지 가기에는 위험하니 청주에 비상 착륙하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한서진은 할 말을 잃었다. 끊어진 수화기를 든 채로 바라보니 신효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는 급히 안심시켰다.
“괜찮을 겁니다. 청주 공항은 여기서 가까워요. 만약을 대비해서 비상 착륙을 하는 것뿐이에요.”
“혹시…… 테러라도 당한 거예요?”
“테러요?”
“박사님 전용기가 한 번 뜨고 내릴 때마다 얼마나 엄격하게 관리되는데요. 매번 미국과 한국이 공동으로 정비하고 샅샅이 수색 작업을 해요. 고장이 난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아무리 꼼꼼하게 관리해도 고장이 날 수 있는 겁니다. 테러라니요, 당치도 않아요.”
한서진도 순간적으로 엔진에 폭탄 같은 게 설치된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오르긴 했다. 하지만 그건 아닐 거라고 믿었다.
‘에테르 과부하 기류가 엔진에 스트레스를 줬나?’
차라리 그쪽이 더 합당하다고, 한서진은 생각했다.
「기장입니다. 우리 비행기는 곧 청주 공항에 긴급 착륙을 할 예정이니, 안전벨트를 착용하시고 승무원의 지시에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기체는 비틀거리면서도 서서히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발아래 펼쳐진 구름이 걷히며, 비가 쏟아지고 있는 대지가 드러났다.
저 멀리 공항의 활주로가 보이기 시작했다. 한서진과 신효진은 의자를 꼭 잡은 채 흔들림을 견뎌냈다.
그때였다. 기체의 뒤틀림이 갑작스럽게 심해졌다. 마치 당장이라도 추락해버릴 듯이 거친 움직임이었다.
“박사님! 시계에서 빛이 나요! 에테르 워치요!”
비명 같은 외침에 놀란 한서진은 얼른 왼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과연 그 말대로 에테르 워치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평소 기계 장치가 발하는 은은한 빛이 아닌, 화염이 붙은 듯이 뜨겁고 강한 빛이었다.
빛은 점점 더 강해지며 시야를 잠식해나갔다. 어느덧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사방이 환해졌다.
청주 관제탑은 발칵 뒤집어졌다.
“에픽 1003호면, 한서진 박사님 전용기 아닌가?”
“운항 정보를 보니 지금 탑승 중이십니다! 제주도에서 출발해서 서울로 향하는 중에 일이 터진 것 같습니다!”
“이륙 착륙 모두 취소하고, 활주로 모두 비워 놔!”
한가한 청주 공항은 핵폭탄이 발등에 떨어진 듯했다.
평생을 가봐야 한서진이 이곳 공항을 찾을 일이 있을까. 그런데 오늘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중이다. 그것도 비상 착륙이다.
“원인은?”
“왼쪽 엔진을 완전히 잃고, 오른쪽 엔진도 꾸준히 추력 상실 중입니다.”
“테러인가?”
관제실장은 테러부터 의심했다.
항공기는 철저한 정비와 검사를 받는다. 게다가 한서진 전용기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따로 상시 파견된 미군 정비팀까지 동원해서, 이중삼중으로 정비와 검사를 받는다.
그런데 양쪽 엔진에 모두 문제가 생겼다고? 항공 분야에 종사하는 이라면 누구나 테러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에픽 1003호, 활주로 진입 시도합니다!”
“한순간도 놓치지 마!”
원거리 카메라가 잡아낸 전용기의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왼쪽 날개에 부착된 두 개의 엔진, 그리고 오른쪽 날개에 부착된 한 개의 엔진에서 시커먼 연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4개의 엔진 중 무사한 것은 오른쪽 한 개뿐. 그러나 연기가 나오지 않을 뿐, 육안에 보이지 않는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
기체는 심하게 비틀거리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기체 제어가 힘든 듯이 보였다.
관제탑 인원들은 하나같은 마음으로 기원했다.
“제발! 제발!”
모두가 이를 악물고 기도를 보내던 그때, 갑자기 하늘 높은 곳에서 굵은 벼락이 내리쳤다.
푸른 벼락은 전용기를 수직으로 그대로 찌르며 땅까지 관통했고, 엄청난 섬광이 뿜어지며 주변의 모든 시야를 가렸다.
“아!”
절망에 가까운 탄성이 흘렀고, 잠시 후 그것은 곧 기쁨의 환호로 변했다.
“에픽 1003호! 무사 착륙했습니다! 반복합니다! 에픽 1003호! 무사 착륙했습니다!”
“역시 미군 출신 조종사는 달라! 놀라운 착륙이었어!”
랜딩을 마친 전용기는 안정적인 움직임으로 활주로를 달리며 속력을 줄이고 있었다.
“사, 살았어요! 우리 살았어요!”
벼락의 섬광이 사방을 뒤덮은 순간, 외마디 비명을 마지막으로 숨을 죽이고 있던 신효진은 도로를 달리는 진동이 느껴지자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이 비행 이동 수단은 참 불안정하군. 매번 이런 식인가.”
“……예?”
“아, 아무것도 아니오, 아닙니다.”
한서진은 가벼운 헛기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신효진은 조금 의아해서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뭔가 설명하기 어려운, 낯선 이질감이 느껴진다.
‘뭐지? 박사님이 뭔가 조금 이상하신데…….’
그녀가 이상한 기분에 갸웃거리고 있을 때 어느덧 기체가 완전히 멈췄다. 곧 문이 열리고 계단이 펼쳐졌다.
한서진이 비행기에서 내리자 미리 마중을 나와 있던 이들이 박수를 치며 맞이했다. 그는 덤덤하게 사람들의 환호를 흘리며 뚜벅뚜벅 걸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박사님.”
몇 몇의 백인 남자들이 다가왔다. 그 중 선두에 선 중년 남자가 대표로 말을 걸었다.
“저희가 정비와 검사를 철저히 했는데도 이런 일이 생기다니…… 죄송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샅샅이 조사하여 원인이 무엇인지 반드시 밝혀내겠습니다.”
‘한서진’은 말없이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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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조심스럽게 강림한다고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