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428화 (428/609)

00428  어차피 말이 통하지 않으면  =========================================================================

백철중과 독대를 마친 그날, 도원패 대통령은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을 꾹 감고 잠을 청해도 가슴이 터질 듯이 뛴다. 아무리 달래려 애써도 부푼 심장이 조용해질 줄을 모른다.

결국 그는 이불을 걷어 젖히고 벌떡 일어났다. 뒷짐을 지고 창가에 서서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3조 AU이라니.’

철저한 사냥개 역할을 해주는 대가로 3조 AU. 원화로 따지면 거의 3조 원에 육박하는 돈이다. 환율을 고려하면 그 이상이 될 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최고 기득권층의 삶을 누린 자신에게도 입이 벌어지는 거금이었다.

게다가 돈만 받고 끝인가? 거래를 수락함으로써 자신은 세계 최고의 재벌인 한서진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도원패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결집하고, 힘을 합치고, 그리고 지지를 보냈다.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사람들을 위한 대가를 골고루 나눠줘야 한다. 그것이 바로 상도 아닌가.

백철중의 제안은 도원패 개인으로서의 그런 모든 이해관계를 초월하고, 대통령으로서 임기가 종료하는 그 날까지 사정의 칼날만 휘둘러달라는 뜻이다.

도원패는 입술을 깨물었다.

신이 대홍수를 일으켰듯이, 이 나라에도 그런 큰 홍수를 일으키자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그 물살의 밸브를 열어달라고 하고 있다.

그 물살에 쓸려나가는 것은 정적만이 아니다. 자신의 지인, 측근들도 셀 수 없이 휘말릴 것이다. 위로 올라가면 갈수록 부패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이는 찾아볼 수 없는 게 현실이니.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주변의 모든 이들을 외면해야 함을 뜻한다. 열외란 일체 있을 수 없으니.

‘이건 기회다.’

그러나 도원패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스스로가 떳떳하지 않음은 잘 알고 있다. 대통령이 되긴 했지만, 한서진의 무관심이 아니었다면 입지 못할 행운이었다.

취임 직후부터 극심한 레임덕에 시달려 왔다. 모두 한서진의 존재 때문이다. 이대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한서진의 업적에 묻어간 무능한 대통령이 될 판이다.

하지만 인생, 아니 역사를 바꿀 수도 있는 절호의 기회가 생겼다.

부패를 철저히 박살낸 대통령.

그 어떤 타협도 거부한 대통령.

3조 AU이라는 막대한 대가를 챙길 뿐만 아니라, 역사에도 그런 자랑스러운 이름을 남길 수 있는 것이다.

뜨거운 탐욕이 피어올랐다.

현역 국회의원 시절, 기업으로부터 정치 자금을 수수하고, 각종 국책 사업에 얽힌 이권을 챙기며, 헌법기관으로서 각종 특권과 의전을 누리던 시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차라리 순수하기까지 한 열망이었다.

그저 대홍수의 밸브를 열어젖히기만 하면, 역사에 두고두고 칭송되며, 동시에 남들이 알지 못하는 3조 AU의 천문학적인 재화를 획득할 수 있게 된다.

지금까지 쌓아온 인맥과 측근들이 어찌 되든, 그 거대한 탐욕의 결실 앞에서는 알 바 아니지 않은가.

마음의 준비가 끝나자 대통령은 전화를 걸었다.

“비서실장, 지금 바로 비상 국정 회의를 준비하게.”

주사위는 내동댕이쳐졌다.

대통령은 긴급 대국민 성명발표를 가졌고, 한국의 모든 눈이 그곳으로 쏠렸다.

생방송 기자 회견에 직접 얼굴을 드러낸 도원패 대통령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한 눈빛을 품고 있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대통령으로서 부패한 국방 산업 생태계에 통탄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DMZ 지뢰 수색 작업 중 9명의 아까운 젊은이들의 인생이 망가진 것은 단지 불운한 사고가 아닌, 총체적인 시스템의 저열함에서 빚어진 인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경하기 그지없는 발언 수위에는, 취재 현장에 나와 있던 청와대 출입 기자들도 일제히 깜짝 놀랐다. 설마 대통령이 이렇게까지 원색적으로 비난을 퍼부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간 저는 대통령으로서 뚜렷한 정치적 실적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이는 저를 믿고 뽑아주신 국민 여러분의 성원을 저버리는 태만으로, 본의는 아니지만 저 역시 국민 여러분의 신뢰에 보답하지 못한 것을 답답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대통령의 목소리에는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그래서 저는 약속드립니다. 국방 산업에 얽힌 모든 비리를 하나도 남김없이 캐내서 발본색원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행정 시스템에 대해 국민 여러분이 품은 불신을 누그러뜨릴 것이며, 지뢰 수색 피해자인 젊은이들의 인생에도 충분하고 합당한 배상을 할 것입니다.”

성명 발표는 절정을 향해 뛰어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저는 대한민국을 잠식하고 있는 모든 부정과 불법, 비리에 맞서 싸우겠습니다. 저의 대통령 임기가 끝나는 그 날까지! 결코 타협하거나 주춤하지 않겠습니다! 이상입니다. 감사합니다.”

연설을 마친 도원패 대통령은 옆으로 잠시 비껴선 후 허리를 90도로 두 번 깊이 숙였다.

여론은 발칵 난리가 나고 뒤집어졌다. 사전에 전혀 조짐을 감지하지 못한 언론도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도원패 정부가 갑자기 왜 부정부패와 싸움을 하겠다는 거야?”

“언질 전혀 없었어? 수석들이고 대변인이고 죄다 당황한 눈치인데?”

“대통령이 보좌관들과 사전 논의도 없이 덜컥 발표한 거야?”

“일 났네, 일 났어.”

날치기, 기습에 가까운 대통령의 성명 발표 내용을 놓고 온갖 해석이 뒤따랐다.

―믿을 놈을 믿어라. 도원패를 믿는다고? 차라리 크리스 대통령을 믿겠다.

―김두박 대통령 못지않은 부정부패 정치인인데 갑자기 정의의 사도 흉내 낸다고 뭐가 달라지나?

―부정부패와 싸우려면 일단 자기 자신과 먼저 싸워야겠네.

불신의 시선을 보내는 이들이 상당했지만, 한편으로는 호의를 보내는 지지층도 제법 되었다.

―사실 그동안 대통령이 이룬 게 거의 없는데, 그래도 이제서라도 대통령이 뭔가 해보겠다는 의지를 품은 것 같아서 보기는 좋다. 자기가 한 말이 있으니 최소한 방산비리 하나만큼은 확실히 훑고 지나가겠다는 거 아니야?

―원래 치료라는 게 그렇게 한순간에 되는 거 아니다. 작은 것부터 차근차근 해나가는 거지. 일단 시도한다는 것 자체에 나는 좋은 점수를 주겠어.

대통령의 의도를 놓고 언론과 여론, 그리고 정재계에서는 갖가지 분석과 해석이 난무했다.

특히 주인으로부터 뒤통수를 맞은 것이나 다름없는 청와대 인사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기자 회견이 끝나자마자 고위 측근들이 즉시 면담을 요청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움직임이 빨랐다. 소위 말하는 오른팔들을 한데 불러 모은 것이다.

긴장감이 가득한 분위기 속에서, 대통령이 무뚝뚝한 음성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얼마 전, H그룹 백철중 회장을 사사로이 만난 건 다들 알고 있을 걸세.”

“…….”

처음부터 스트레이트, 대통령이 백철중 회장의 이름을 언급하자 측근들의 표정에 떠오른 긴장감이 짙어졌다. 이어질 대통령의 발언에 얼마나 큰 무게감이 실릴지 짐작이 된 것이다.

비서실장이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H그룹에서 무언가 요구를 해온 것입니까, 대통령님?”

“요구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네.”

“…….”

알쏭달쏭한 대답이었지만, 측근들이 품은 긴장감은 더욱 짙은 농도로 변해갔다.

대통령은 잠시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보통 깊은 고뇌가 아닌 듯한 안색, 측근들은 이내 이게 여간 심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백철중 회장이 한 박사의 메신저로서 온 것이었구나.’

그렇다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온 것일까? 무엇이 대통령에게 저런 기습 성명 내용을 구상하게 만들었을까?

이윽고 대통령이 한숨을 거두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자네들도 알다시피 나는 한서진 박사와 과거 좋지 않은 인연이 좀 있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지.”

“…….”

“이 나라에서 그가 가지는 국민적 인기를 생각하면,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내 당선은 불가능한 것이었어. 하지만 그는 따로 낙선 운동을 펼치지 않고 가만 놔두기만 했지.”

그것은 측근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막상 당선이 되었을 때 자신들도 얼떨떨했었다.

선거 막판에 이르러 한서진이 어떤 식으로든 훼방을 놓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럼 충분히 낙선되고도 남았을 테니.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난 백철중 회장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눴네. 그리고 한서진 박사의 심기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었지. 그는 자신을 이 나라 국민이나 소속이라고 생각하지 않네. 그래서 자기가 싫어하는 내가 당선되든 말든 관여치 않았을 게야.”

“…….”

대통령의 말은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서 충분한 설득력을 갖고 있는 가설이기도 했다.

비록 한서진이 한국에서 거주하며 자선 사업 등 여러 가지 혜택을 베풀고 있지만, 그것은 한국을 주거 대상으로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3조 달러어치 특별 국채를 매입하는 등의 여러 가지 반박 증거 때문에 크게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는 주장, 그러나 대통령은 지금 이 순간 그 가설을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그에게 이 나라는 투자의 대상일세. 3조 달러를 내놓은 것도 그런 일환에서지. 장담하건데 그는 3조 달러를 다시 돌려받는다는 시나리오 자체가 없을 걸세.”

“그 이상의 현물 가치를 원하겠군요.”

“그렇다네. 그리고 북한의 잠재성은 충분히 그가 원하는 이익을 회수하고도 남지.”

정책 전문가들이 예상했던 밑그림에 딱딱 맞아떨어지는 설명이 이어지자, 측근들은 더욱 귀를 기울였다.

“그는 대한민국이 부강해지기를 바라고, 그리고 그 부강한 대한민국의 국가적 권리를 챙기기를 바라고 있네. 그럼으로써 3조 달러의 투자금을 갈음하겠다는 거지.”

측근들은 그 스케일에 입을 살짝 벌리며 놀랐다.

이건 3조 달러를 투자하고 30조, 아니 300조 이상을 차지하겠다는 전략이 아니고 뭔가? 나라의 지분 그 자체를 인수하겠다는 발상 아닌가?

고금을 통틀어 이 정도로 거대한 탐욕을 지닌 이는 왕족, 혹은 매국노 외에는 없지 않을까?

대통령의 표정이 더욱 경직되었다.

“백철중 회장은 그가 원하는 것이 국가 시스템의 정상화라고 밝혔네. 재정감시 TF팀과 H컨설턴트를 설립한 것도 그 밑작업에 지나지 않았지. 다들 짐작하고 있겠지만 그는 현 내각 인사들의 큰 약점을 대부분 쥐고 있네. 단지 드러내지 않을 뿐이지.”

약점을 쥐고 있다는 말에 다들 표정이 불편해졌다.

동시에 그들은 대통령이 단독으로 대국민 성명을 결정한 이유를 알아차렸다.

한서진이 쥐고 있는 약점 중에서 가장 크고 맛있는 것은, 바로 대통령 본인일 테니까.

이 중에서 가장 난처하고 곤란에 처한 것은 자신들이 아니라 대통령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믿었다.

“그의 제안은 병든 시스템을 일체의 타협 없이 타파하라는 것이었네. 그리고 나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어. 유감이지만, 이 나라의 실권은 대통령이나 국민이 아닌, 한서진 박사에게 있네.”

“대통령님.”

“대한민국은 그가 탐내는 적토마일세. 그리고 우리는 이 적토마를 치료하고 살찌워서 그에게 고스란히 바쳐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뒤가 생략됐지만, 이어질 말이 뭔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대국민 성명 발표에 얽힌 진실도 알 수 있었다.

대통령은 협박을 당한 것이다. 그것도 절대로 거스를 수 없는 악신에게.

============================ 작품 후기 ============================

대통령의 눈높이 설명.

사람은 믿고 싶은 대로만 믿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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