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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427화 (427/609)

00427  어차피 말이 통하지 않으면  =========================================================================

방산업체 그룹 비자금과 오너 일가의 개인 금융 재산이 예외 없이 송두리째 증발한 사건은 국정원을 통해 청와대에 보고가 들어갔다.

처음에는 단순 금융 사고로 취급되었으나, 방산업체에서 너도 나도 은행에 항의를 하고 있으니, 소란이 커지면서 국정원도 조사에 나선 것이다.

보고서를 읽으며 대통령은 신음했다.

“이게 정말 사실인가?”

“예, 대통령님. 모두 사실입니다.”

국정원장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도 심각했다.

“아무런 이상 흔적 없이 7조 원에 달하는 그 많은 돈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인출 내역을 보면 정상적인 거래로 되어 있습니다. 해킹이나 외부 물리적 침입 흔적은 전혀 없습니다.”

“……음.”

“겉으로만 보면 정상적인 인출입니다. 겉으로만 보면, 말입니다.”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완벽한 해킹이란 게 정말 존재할 수 있는가? 하지만 단발성이 아닌, 이렇게 무차별로 일어나는 게 가능한가?

“미국이 해커팀을 총동원한다면 한두 곳 정도를 뚫는 것은 가능합니다. 흔적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계좌를 이렇게 한꺼번에, 그것도 아무런 흔적도 없이 처리한다는 것은 미국의 힘으로도 불가능합니다.”

“즉, 미국은 아니다?”

“지구에서 이런 일이 가능한 건 한 사람뿐입니다.”

“한서진…….”

도원패 대통령은 저도 모르게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가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한서진이 주변에서 듣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 모습을 보고 국정원장이 어색하게 웃었다.

“어쩌면 지금 우리 대화를 도청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설마. 여긴 청와대야!”

“에테르라는 미지의 힘으로 우주 멀리 있는 소행성의 궤적을 비틀어 원하는 지표면에 떨어뜨리는 사람입니다. HAMC의 운석 투하가 어떤 원리로 이뤄지는지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한서진 박사는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

“도청 장치? 그에게 그런 것은 의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에테르라는 에너지를 통해, 앉은 자리에서 지구 전체를 스캔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예측이자 상상이지만, 진실에 가장 가깝게 접근한 발상이기도 했다.

“정말 그렇다면 은행 컴퓨터를 해킹하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겠지요. 전자적 데이터를 마음껏 주무르는 것은 그에게 아무 것도 아닐 겁니다.”

“…….”

“정보실에서 진지하게 분석 작업 중입니다만, 한서진 박사의 도감청 및 해킹 능력은 단독으로 미국을 훨씬 능가한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에테르의 무궁무진함은 이미 실용적으로 증명되었지만, 그 끝이 어디이며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는 오로지 한서진 박사 혼자서만 알고 있습니다.”

“국정원장의 말뜻은…….”

“그가 미국 명예시민이고 한국에는 거주만 하며, 국내 정치 상황에 관심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 같습니다.”

맹수가 배불러 하는 것을 감사히 여겨야 한다는 뜻인가. 대통령은 그저 입맛이 썼다.

한편으로는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예전 국회의원 시절, 그에게 시비 비슷한 것을 걸지 않았나.

다행히 한서진은 행정부에 특별한 태클을 걸진 않았다.

특별채권 등 북한 지역에 얽힌 이해관계에서 대립각을 보이긴 했지만, 큰 탈 없이 부드럽게 넘어갔다.

“미국은 당연히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우리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한서진 박사의 에테르 활용 능력을 측정하고 있을 겁니다. 한서진 박사도 당연히 미국에는 많은 정보를 제공했을 테고요.”

들으면 들을수록 답답하기만 했다.

국정원자의 말대로라면, 한서진이 자신과 가족의 계좌에 든 돈도 언제든지 흔적조차 없이 빼내갈 수 있다는 뜻 아닌가?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하나, 돈이 빠져나갔다는 사실 자체는 남습니다. 한서진 박사도 그걸 알고 있습니다.”

“의심을 받아도 상관없다는 뜻인가?”

“실질적으로 그가 의심된다 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수단이 없으니까요.”

“허허, 참. 이거 답답하기만 하군.”

답답함은 커져만 간다.

해결책을 찾아보자고 불렀더니, 그런 건 꿈도 꾸지 말라는 소리만 하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지금처럼 얌전히 죽었소 하고 조용히 지내는 게 상책이었다.

국정원장과 독대 중 비서실장이 대통령을 찾았다.

“대통령님, 죄송합니다만…… 급한 연락이 있습니다.”

“급한 연락?”

“H그룹 백철중 회장이 넌지시 말을 전해왔는데, 대통령님과 독대를 하고 싶다고 합니다. 외부에 알리지 않고 말입니다.”

“백철중 회장이?”

대통령은 조금 놀랐다.

백철중은 단순히 재계 1위 회장이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이 나라에서 못할 게 없는 한서진의 예비 장인이었다. 5년짜리 선출직인 자신보다 월등히 우위에 있는 인물인 것이다.

“가능한 빨리 만나 뵙고 싶다고 합니다만.”

“그럼 만나야지. 최대한 일정을 당겨서 만들어보게. 그리고 백철중 회장이 왜 나와 독대하려 하는지 그 가능성도 여러 방향에서 검토하고 보고해.”

“알겠습니다.”

대통령은 가슴이 조금씩 두근거렸다. 왠지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랬다면 이렇게 먼저 만나자고 제안을 하지 않았을 테니.

심지어 비공개 독대 아닌가.

“국민의 대표를 감히 이렇게 만나 뵙자고 청해서 실로 송구합니다, 대통령님.”

백철중은 자신을 낮추며 정중한 태도로 나왔다. 대통령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이거 시작이 매우 좋은데?

“아닙니다. 대통령은 국민의 종일 뿐입니다. 그리고 백철중 회장님 역시 이 나라의 소중한 국민이시죠.”

“허허.”

“국민이 부른다면 종은 그저 달려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밀 안가에서 이뤄진 독대는 화기애애하게 시작되었다.

대통령도, 백철중도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가벼운 담소부터 시작했다.

“요새 경제가 심히 어렵습니다.”

“세계적으로 혼란이 많았으니까요. 얼마 전 북쪽에 큰일도 있었고요. 재계에서도 요즘 사리고 있는 추세입니다, 허허.”

“그래도 우리나라는 한서진 박사님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백 회장님도 마음이 든든하시겠군요.”

대통령이 은근슬쩍 칭찬을 꺼내자 백철중은 그저 여유로운 미소만 지었다. 겸양의 의미에서라도 ‘아닙니다’라고 할 만한데, 전혀 그런 게 없다.

하지만 대통령은 전혀 언짢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당당한 여유로움이 부럽고, 보기 좋았다.

“우리나라는 운이 좋습니다. 만약 그분이 없었다면 북한이 무너졌을 때 어찌 하지도 못하고 다 함께 무너져 버렸을 겁니다. 2천만 명이나 되는 난민을 그냥 떠안았었다면 이 나라는 파산입니다, 파산.”

“3조 달러의 특별 국채가 도움이 되긴 했지요. 적어도 돈 걱정만큼은 확실하게 덜 수 있지 않았습니까.”

“미국과 일본에서 북한 주민들을 분담해서 수용해준 것도 무척 컸지요. 한서진 박사님이 아니었다면 어디 그게 가당키나 했겠습니까. 2천만 명을 꼼짝없이 한국에 수용해야 했다면, 어휴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주거니 받거니 칭찬.

대통령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이 과장된 동작으로 손사래를 쳤다.

“그분이 있어서 이 나라는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박사를 긍정적으로 평가해주시니, 저도 참 기분이 좋습니다.”

백철중은 미소를 지으며 본격적인 말을 꺼냈다.

“실은 한 박사가 정부의 도움을 바라고 있습니다.”

“정부의 도움이요?”

대통령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이제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나올 타이밍이라는 것을.

“말은 안 하지만 한 박사가 사람에 대한 연민이 아주 깊은 사람입니다. 이번 지뢰 사건을 보고 참 가슴 아파했드랬습니다.”

“……저런.”

드디어 방산 비리 이야기가 나왔다. 대통령은 저도 모르게 표정을 바로 하고, 마음을 단단히 쥐어 잡았다.

과연 무슨 요구를 할 것인가.

“한 박사는 처벌받아 마땅한 이들이 응당한 처벌을 받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물론 당연히 그래야 할 겁니다. 그게 바로 법치주의 국가가 추구해야 할 정의 아니겠습니까.”

“말 그대로 응당한 처벌입니다. 국민 모두가 시원하게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을 바라고 있어요.”

“…….”

대통령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꾹 쥐었다. 긴장감이 손등을 타고 흘렀다.

재계 1위 회장의 관록이란 만만치 않았다. 그저 눈빛만으로 대통령인 자신에게 강한 압박을 전달하고 있으니. 대통령은 저 눈빛이 마치 한서진의 것 같은 착각마저 느꼈다.

행정부, 즉 대통령이 바라는 것은 최대한 조용한 선에서 방산 비리 사건을 마무리 짓는 것. 그래서 GK그룹에서 끝내려 하다가 다른 재벌들도 조금씩 책임을 분담 지우는 것으로 방침을 변경한 것이다.

그러나 백철중은 그보다 더 강경한 노선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게 한서진 박사님의 뜻입니까?”

“한 박사는 우리나라가 미국 못지않은, 아니 그 이상 가는 선진국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단지 국고가 넘치고 국력이 강한 그런 나라가 아닌, 문화 의식적인 면에서 진정한 선진국으로 거듭나기를 바라고 있어요.”

“…….”

“김시형 검사를 후원하고, 재정감시 TF팀을 설립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러나 검사 한 명과 민간 감시 기구 하나로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제한적이지요.”

“……한서진 박사님께서 매우 큰 그림을 그리고 있나 봅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한 박사도 엄연히 우리나라 국민입니다.”

대통령은 조금 맥빠진 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저는 그분이 이 나라 실정에는 무관심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만.”

“여러 모로 실망했던 게 많아서지요. 그러나 미국에서 영웅 취급을 받으면서도 계속 우리나라에서 살고 있는 것을 보면 확실하지 않겠습니까?”

“…….”

“이번 사건, 확실한 매듭을 짓는 게 어떻습니까? 행정부로서도 두고두고 자랑할 만한 치적이 될 겁니다.”

대통령은 가만히 상상했다.

오랜 고질과 병폐에 시달려온 국방 비리를 전격적으로 타파한 대통령! 도원패란 이름이 역사 교과서에 두고두고 회자된다면?

“국방 비리뿐만이 아닙니다. 지금 김시형 검사와 그 친한 이들은 검찰 고위층의 외면 속에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들을 지지하여 이 나라의 체질을 개선하는 겁니다. 대통령님이 마음만 먹는다면 임기 동안 큰 치적을 남길 수 있는 겁니다.”

사실 대통령은 고민이 깊었다.

임기 동안 뭔가를 하고 싶어도, 딱히 할 게 없었다. 비리를 척결하자니 그 대상이 몇 다리 걸쳐서 자신과 얽혀 있고, 그렇다고 몰래 뒷돈을 챙기자니 재정감시 TF팀이 눈에 불을 켜고 예산 집행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눈치만 보느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임기를 까먹고 있었는데, 한서진 측으로부터 이런 제안을 받을 줄이야.

“대통령님께서 받아들이신다면 우정의 표시로 준비한 선물을 드릴 겁니다. 물론 남들의 시선을 피해야 하니, 임기가 끝난 후가 되겠지만요.”

“우정의 표시요?”

“3조 AU.”

“…….”

“아시겠지만, 한 박사에게는 큰 의미가 없는 액수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니지요.”

대통령은 자신에게 원하는 게 뭔지 이해하고 있었다. 임기 동안 사정없이 세상을 물어뜯을 흉폭성, 그리고 이빨이다. 지인, 친구를 가리지 않고 그저 시키는 대로만.

그 대가는 무려 3조 AU.

그는 천천히 끄덕였다.

“한서진 박사님은 미국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영웅도 되고 싶어하시는군요.”

“어떻습니까?”

“국가를 위한 일인데 국민의 종으로서 어찌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이야기는 끝났고, 두 노인은 친근하게 악수를 나눴다.

============================ 작품 후기 ============================

“박사님, 정의로운 사냥개가 되는 걸 허락해 주세요. 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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