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26 어차피 말이 통하지 않으면 =========================================================================
검찰은 GK에만 한정했던 수사 방침을 깨고, 방위산업체 전체로 수사 범위를 넓혔다. 미래, SKK, 삼산중공업 등 방위산업에서 굵직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던 기업들은 화들짝 놀랐다.
임원들이 줄줄이 소환되었고, 여러 가지 비리가 차례차례 드러나기 시작했다. 구속 영장이 발부되고, 임원들이 줄을 서서 구치소에 자리를 잡았다.
성공적인 로비로 안심하고 있던 재벌 방산업체들로서는 난데없이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룹 비자금과 오너 일가 금융 자산 증발로 혼란스러운데, 예상치 않은 반전을 맞이한 것이다.
“검찰이 갑자기 왜 이렇게 나옵니까? 정부는 GK만 처벌하는 선에서 마무리하기로 이미 결정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H컨설턴트에서 계속 공론화를 펼치며 여론을 자극해서 그렇습니다.”
“자잘한 비리 좀 잡아내겠다고 지금 판 자체를 뒤집어엎을 셈인가요?”
방산업체들은 급히 대책 마련에 들어갔으나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로비를 시도하자니 이미 비자금이 몽땅 날아가고 없는 상황, 그렇다고 정식 회사 자금으로 로비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목이 마르다고 소금물을 들이켜는 셈이나 마찬가지이니.
쉬쉬하고 있지만, 오너 일가 금융 재산과 그룹 비자금이 증발한 것은 다들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 자연스럽게 하나의 결론을 도출했다.
‘혹시?’
‘설마?’
그 결론이란, 지금의 사태는 한서진과 정부가 비밀리에 손을 잡고 펼친 게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대놓고 말을 못할 뿐, 비자금이 사라진 것은 금융 오류나 미국의 짓이 아니라, 한서진이 벌인 일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어느 정도 팽배했다.
여기에 처벌을 GK로 국한하기로 한 정부가 마지막에 결정을 뒤집었다.
둘이 손을 잡았거나 혹은 정부가 한서진의 지휘를 받거나, 어느 쪽이든 간에 충분히 의심이 들 만한 상황이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BII 의료기기와 방산 비리. 두 뜨거운 감자에 한국 사회는 용광로처럼 달아올랐다.
미국 FDA는 BII-E001을 전격적으로 승인했다. 유례가 없는 빠른 절차였지만, 이미 H시리즈의 전례 덕분에 가능했다. 당시 법 절차를 수정해놓은 덕이다.
그렇다 해도 파격적일 만큼 빠른 승인 절차였던지라, 미국 시민들은 물론이고 지켜보던 세계 여론도 역시나 하는 반응을 보였다.
―세상은 BII-E001를 원한다!
고글 형식으로 된 시제품, 10시간의 사용 시간에 시각 능력이 정상인의 80% 미만이지만, 그래도 시각 장애인들에게는 더 바랄 것 없는 희망이었다.
초기 물량으로 1만 개를 생산하기로 했지만, 미처 생산에 들어가기도 전에 예약이 완판 나버렸다. 정식 예약을 받고 1분도 채 되지 않아 완료되고 만 것이다.
가격은 1만 달러로,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저렴하게 책정되었다. 1만 개의 물량 중 6,000개는 미국에, 4,000개는 한국에 풀기로 했다.
여기에 미국 물량 6,000개는 한서진이, 한국 물량 4,000개는 H그룹에서 대신 구매해주기로 해서, 세상의 찬사가 이어졌다.
초기 물량이 무사히 생산되고 예약자들에게 배급되며, 세상은 다시 한 번 난리가 났다. 빛을 되찾은 1만 명의 사람들은 울고 웃으며 기뻐했다.
「BII-E001는 초기 타입일 뿐입니다. 앞으로 더 작고 오래 가며, 성능이 뛰어난 개량형 모델을 거듭해서 만들 겁니다. 머지않아 시각장애라는 말은 이제 역사 속 유물이 될 겁니다.」
BII-E001는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모두가 마냥 좋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인공신체는 인간의 존엄함을 짓밟는 것.
―눈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머지않아 사람의 모든 것을 기계로 대체 가능한 시대가 올 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연 그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신체적 무결성이란 인간의 존엄함을 유지하는데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기계로 사람의 신체를 대신하는 것은 신이 하사한 소중한 신체의 존엄함을 무너뜨리는 짓이다. 한서진은 즉시 BII-E001를 폐기해야 한다!
다소 어처구니없는 반발이었고, 많은 이들도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어느 곳에나 있는 이상한 사람들이라고만 간단히 치부했을 뿐이다.
그러나 SJ인더스트리 측은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본사는 인공신체로 인한 인간의 존엄성 붕괴를 우려하는 분들의 가치관을 존중합니다. 따라서 그분들에게는 BII와 관련된 일체의 제품이나 서비스가 닿지 않도록, 본사는 최선을 다해서 노력할 계획입니다.」
그 말에 반발자들은 다시 한 번 발칵 뒤집어졌다. 반발자들의 명단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돌자 일부는 즉시 입장을 번복했지만, 다수는 자신들의 고집을 그대로 유지했다.
「본사는 반대론자 분들의 생각을 존중합니다.」
SJ인더스트리는 그 말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그런 소소한 소란과 상관없이, 빛을 되찾은 이들은 크게 기뻐하며 한서진에게 깊은 감사를 표했다. 사람들은 한서진이 또다시 역사를 바꿨다며 칭송했다.
많은 이들이 한서진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싶어 했지만, 그는 BII 관련해서 더 이상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자신의 입장이나 소감을 발표하지도 않았다.
한편 다른 방향에서 BII 기술을 경계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한서진 박사는 뇌파 입출력 기능의 자세한 원리를 공개해야만 한다!
―뇌의 신경 자극을 읽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리고 어떤 기억이 있는지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 아닌가?
―한서진 박사는 그런 의혹에 낱낱이 해명하고, 한 치의 사생활 침해가 없음을 보증해야만 한다!
BII가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할 것이라는 우려는, 인공신체에 대한 거부감보다는 훨씬 진중하게 받아들여졌다.
특히 문물의 발달로 사생활 침해와 노출이 심해진 시대이니만큼, 많은 이들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BII-E001를 개조해서 녹화 기능이라도 생기면 사생활 침해가 심해지는 거 아닌가?”
“여자 시각장애인이 BII-E001를 쓰고 여탕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난리 나겠네. 대놓고 불법 몰래 카메라를 찍는 거잖아.”
“그런 문제들은 말끔히 해결된 건가?”
BII-E001에 만약 영상 저장 장치가 탑재된다면 그 자체로 불법 카메라가 된다. 안구형 모델 같은 경우에는 아예 대비조차 불가능하다.
그런 우려가 커지자 BII 프로젝트 팀에서 즉각 진압에 나섰다.
「BII-E001에는 영상 저장 장치는 일절 탑재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불법 개조를 방지하기 위해, 임의로 제품을 해체할 경우 작동이 멈추게 되어 있습니다.」
「뇌에 전달되는 영상 신호는 아날로그 신호로 전환되어 직접 전달되기 때문에 외부에서 가로채는 게 불가능합니다. 설령 가로챈다 하더라도 현재 기술로는 복원이 불가능합니다. 영상 아날로그 신호를 판독할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서 단 한 명뿐이기 때문입니다.」
BII 시리즈는 경이적인 첫 출발을 내딛었다.
그만큼 세상의 관심도 많이 받았고, 찬양 외에도 질시와 두려움, 경계에도 시달려야 했다.
“오, 어서 오게.”
한서진이 들어서자 백철중은 과하다 싶을 만큼 반가운 기세로 맞아들였다. 그는 손수 한서진의 어깨를 감싸고 안내했다. 그가 지나칠 때마다 가사 직원들이 깍듯하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응접실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백철중은 묘한 웃음과 함께 질문을 꺼냈다.
“방산업체 놈들, 자네가 한 거 맞지?”
“네, 맞습니다.”
“오호? 순순히 인정해줄 줄은 몰랐네만.”
“회장님께 숨겨서 뭐 합니까. 어차피 그쪽도 어느 정도 짐작은 할 텐데요.”
“확실하진 않아. 자네를 심중에 두는 놈들도 있긴 한데, 미국이나 우리 정부가 한 짓이라고 생각하는 쪽이 더 많네. 자네가 이런 일에 굳이 발걸음을 할 거라고는 생각 않는 거지.”
“그런가요.”
“그래도 자네 영향력이 닿아 있다는 것만큼은 부정하지 않는 쪽일세.”
한서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난리가 났겠군요.”
“난리가 나다마다. 통장에 있는 모든 돈이 통째로 증발했으니까. 그놈들 지금 발칵 뒤집혀서 어쩔 줄을 모르네. 거기다가 검찰까지 다시 뒤엎고 있으니, 초상집이나 다름없지.”
백철중은 천천히 바라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나한테 들었네. 칼을 빼들었다면서?”
“죄송합니다. 거슬리는 게 너무 많아서 말입니다.”
“아니, 나에게 사과할 건 없네. 그놈들하고 그다지 친한 것도 아니고, 엄밀히 말해서 그놈들이 자기 죗값 치르는 건데 무슨 상관인가. 다만 방법이 과격해서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하군.”
“굳이 방법을 따지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자네에게 그런 면이 있는 줄은 또 몰랐군. 언제나 온화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지뢰 피해자들은 제대로 치료비나 보상금도 지원받지 못한 채 고생하고 있고, 비리에 얽힌 이들은 호의호식하며 지내더군요. 그런 상황에서 굳이 범죄자들을 위해 절차를 지켜줄 마음을 못 느꼈습니다.”
명백한 날이 서린 음성에 백철중은 쓴웃음을 지었다. 예비 사위의 이런 모습이 싫은 건 아니다. 오히려 반가웠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게 걱정이군. 제주도 프로젝트로 바쁘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심력을 허비해도 되나?”
백철중이 넌지시 짚어내자 한서진은 곧장 대답했다.
“거슬리는 게 많다 보니 신경이 쓰여서 그쪽 연구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집중할 수 있는 환경부터 만들려고 하는 겁니다.”
“자네 성에 차려면 한두 해 가지고는 어림도 없네. 그쪽 연구는 한 달 한 달이 급한 거 아닌가?”
“괜찮습니다. 그쪽 연구를 방치하는 건 아니니까요. 오히려 제가 직접 손을 쓰니 속이 풀려서 연구에 집중이 잘 되더군요.”
“흔적이 남진 않겠나?”
“제 앞에선 어떤 수퍼컴퓨터도 전자계산기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디까지 할 셈인가?”
“거슬리는 건 전부 치워버릴 생각입니다.”
“날 보자고 한 건? 한 손 거들어달라는 뜻인가?”
“부탁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대통령과 자리를 만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전혀 생각지 못한 내용에 백철중은 표정이 싹 변했다. 한서진의 입에서 대통령이 거론될 줄은 몰랐다.
“도원패 그놈을? 자네가 만나서 뭐하게?”
“제안할 게 있어서입니다.”
“그놈은 자네하고 상극이야. 지금은 겁을 먹고 얌전히 있을 뿐일세. 애초에 대통령에 당선된 것도 선거에서 어부지리를 취했을 뿐이네. 그런 놈하고 겸상을 하면 자네 체면만 떨어지네.”
“겸상을 하려는 게 아니고, 이용하려는 겁니다.”
“이용?”
“상륙 작전의 선봉대로 쓰기에는 적당하지 않을까요.”
상륙 작전에서 선봉대는 큰 피해를 입기 마련이다. 백철중은 금세 한서진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놈이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네. 자기가 토사구팽 당한다는 걸 모를 놈이 아니야.”
“그러니 회장님께서 중간에 윤활유 역할을 해주셔야죠. 저는 못 믿어도, 회장님은 믿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그놈을 밀어내고 다른 사람을 대통령으로 세우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어차피 누가 해도 마찬가집니다. 그럴 바에는 시간이라도 절약하는 게 낫습니다.”
철저히 이용만 하고 버릴 셈이다. 백철중은 그 의사를 분명히 느끼고, 천천히 끄덕였다.
“알겠네. 내가 나서 보겠네.”
============================ 작품 후기 ============================
“BII는 인간을 피폐시킬 것이다!”
―걱정 마세요. 여러분들은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아니, 잠깐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