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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425화 (425/609)

00425  어차피 말이 통하지 않으면  =========================================================================

‘거슬리는 건 그냥 치우자.’

한서진이 품은 결심이었다.

공명심이나 정의감에서 발로한 게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 심지어 수단의 불법성도 가리지 않을 것이다. 실행할 수 있는 방법은 전부 취한다.

과연 세상이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하지만, 그럴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진 않을 테니.

“오빠의 생각은 잘 알겠어요. 저도 찬성하구요, 할 수 있는 건 힘껏 도울게요.”

“고마워.”

“뭘요, 우리는 운명공동체잖아요. 당연히 함께 해야죠.”

밝게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았고, 운명공동체라는 단어도 달콤하게 들렸다.

“근데요, 오빠.”

“응.”

“빼내신 돈은 다 어디에 쓰실 거예요?”

“…….”

한서진은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H컨설턴트에서는 방산비리 공론화 작업을 크게 진행시켰다.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방산비리에 얽힌 여러 가지 자료를 대대적으로 공개했다.

“검찰은 사건을 은폐, 축소하지 말아야 합니다! GK그룹은 방산비리의 일각일 뿐, 더 큰 비리가 감춰져 있습니다! 그걸 찾아내서 조사하는 게 검찰의 일입니다!”

검찰이 김시형을 통해 부분적으로 정화되었다 하나, 아직도 갈 길은 요원했다. 특히 김시형 라인이 재벌 불법 상속 승계에 집중하고 있는 지금, 방산비리 문제를 끝까지 파고들만 한 동력원이 부족했다.

H컨설턴트에서 적극적으로 공론화를 펼치며 물고 늘어지자 대충 GK그룹을 제물로 바치고 수습하려 했던 검찰도 앗 뜨거라 하고 놀랐다.

행정부도 마찬가지였다.

“H컨설턴트가 나섰다는 건 한서진 박사가 움직였다는 뜻이 아닌가?”

혹시 한서진이 방산비리 사건에 못마땅한 것을 느낀 건 아닐까? 그도 한국 사람이니 뉴스 등을 보고 분노가 치밀었을 수도 있다. 방산비리에 얽히거나 그로 인한 이득을 취한 적이 없는 사람이니.

“다행히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H컨설턴트의 독자적인 판단인 것 같습니다.”

“그런가? 그나마 다행이군.”

도원패 대통령은 일단 한시름 놓았다.

“한서진 박사가 국내 문제에 관심 없는 거야 워낙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 재산을 불려줄 연구 개발에만 정성을 쏟고 있죠. 괜히 긴장한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대통령님. 적당한 선에서 대응하면 큰 문제는 없을 듯합니다.”

“좋아. 그렇다 치고, 다들 말해보게. 어떻게 대응하면 좋겠나?”

측근들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자기들끼리 눈빛을 교환했다.

이윽고 외교안보수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GK그룹 선에서 문제를 매듭짓는 건 너무 조심스러운 결정이 아니었나 합니다. 때문에 반발이 더 심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관련 그룹들은 조금씩이라도 털고 지나가야 합니다. 솜방망이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적당히 출혈을 봐야겠지요.”

“안보수석 말은, 일단 하나도 빠짐없이 처벌하자는 건가? 강도만 조금 낮추고?”

“네, 그렇습니다.”

대통령은 신음하며 고민에 잠겼다.

지금 시끄러운 건 GK그룹만 제물로 바치고 나머지는 봐주려고 하는 거냐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이왕 이리 된 거 한 놈만 족치지 말고, 전원 결원 없이 조금씩이라도 터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수위 조절이 중요한데.’

문제는 조금씩이라지만 전부를 건드리다 보면 불길이 어디까지 퍼질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 사건을 최대한 덮고 지나가려는 정부의 방침에 어긋나서는 안 된다.

과연 검찰이 그 절묘한 균형 잡기를 할 수 있을까?

“초가삼간 불태우는 일은 없도록 주의하게.”

미래그룹 분위기는 전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수백억 원의 기업 비자금이 한순간에 증발했고, 비자금을 관리하던 이들을 찾아냈지만 성과는 없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자기가 한 짓이 아니라고 했다.

여기에 오너 일가가 가진 금융 자산이 현금과 주식을 포함하여 한꺼번에 증발했다. 은행과 증권사에 아무리 항의를 해봐도 ‘정상적인 거래’였다며 극구 부인할 뿐이었다.

실명, 차명을 가리지 않고 모든 계좌에 들어있는 주식과 현금을 잃은 것이다.

조태호 회장이 쓰러져 혼수상태인 동안, 회장 일가와 그룹 고위 임원들은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상황 분석 중이었다.

“절대로 단순한 전산 오류는 아닙니다. 차라리 미 국방부 사이버 팀에서 나섰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겁니다. 그 정도 급이 아니고서야 누가 흔적조차 없이 이런 일을 해낼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미 국방부라 해도 은행 다수의 전산 기록을 흔적도 없이 지우는 게 가능한가?”

친한 행장들을 닦달해서 은행 서버를 철저히 뒤졌지만, 전자 거래는 지극히 정상적으로 이뤄졌다.

이것이 암시하는 것은 둘 중 하나다.

정말로 정상적인 거래였든지, 아니면 정상적인 거래로 완벽히 탈바꿈할 정도로 실력 있는 해커가 나섰든지.

“우리나라에도 그런 실력을 갖춘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

불현듯 누가 내뱉듯이 던진 말에 분위기가 갑자기 고요해졌다. 사람들은 각자 입을 꾹 다문 채 서로의 눈빛만 살폈다.

어렴풋이 속으로는 짐작하면서도, 차마 꺼내지 못한 이름. 그것이 모두의 머릿속에 일제히 떠올랐다.

조태호 회장의 장남인 조치현 부회장이 무뚝뚝하게 물었다.

“세연동 그분을 말하는 건가?”

세연동 그분, 한서진을 향한 그들의 두려운 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호칭이었다.

“Z7은 세계 최고의 수퍼컴퓨터입니다. 그전에 존재하던 최고의 수퍼컴을 가볍게 뛰어넘는 성능을 지녔지요. 그런 Z7조차도 세연동에서는 오래된 구형 모델이라는 말이 나돕니다. 세연동에는 Z7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놀라운 성능의 수퍼컴퓨터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SJ사이트의 자연 재해 예측 모델은 바로 그 수퍼컴퓨터가 구동한다고 하지요.”

“자네 말은, 그분이 우리에게 이런 일을 했다는 건가?”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가능한 사람은 그분 밖에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미국은?”

“할 수야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야 할 동기가 없습니다. 미 국방부가 뭐 때문에 우리 그룹의 비자금과 회장님 일가의 금융 재산을 빼돌리겠습니까?”

“…….”

“…….”

침묵은 더욱 경직되었다.

금융 자산의 증발이 전산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벌인 짓이라면, 그리고 한서진과 연결돼 있다면?

구체적인 상상이 머릿속을 스치자 조치현 부회장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냐! 이건 말이 안 돼!’

그는 필사적으로 생각을 부정했다.

한서진의 힘이라면 미래그룹을 공개적으로 박살내는 것은 일도 아니다. 아니, 미래그룹뿐만 아니라 방산비리에 얽힌 모든 기업들을 응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뭐 하러 번거롭게 이런 짓을 하겠는가. 비자금이 자신들에게나 큰돈이지, 그에게는 시계 하나 값도 못 될 텐데.

그때 회의실 문이 열리고, 회장 비서실장이 빠른 걸음으로 들어왔다. 부친은 조태호 회장이 쓰러진 지금 부회장이 회장 업무를 대행하고 있기에, 비서실장은 그에게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부회장님, 이번 사건에 얽힌 다른 그룹들 말입니다.”

“다른 그룹들이 왜요?”

아버지의 가신인지라 부회장도 존중을 했다. 비서실장은 귓속말로 전했다.

“아무래도 우리 그룹과 똑같은 일을 당한 것 같습니다.”

“뭐라고요?”

“제가 확인한 기업만 네 곳입니다. SKK그룹, 삼산중공업, 백산, CS, 아직 확인하지 않은 다른 기업도 똑같은 일을 당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조치현 부회장은 창백하게 질렸다.

그런 기상천외한 일을 당한 게 자신들뿐만이 아니라고?

「그 정도까지 했으면 이제 상대방도 알 텐데.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너 말고 그게 가능한 사람이 없다는 생각쯤은 할 거다.」

“상관없습니다. 그러라고 한 짓이니까요.”

「네가 그렇게 단순하고 과격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어.」

“때론 단순한 게 가장 효과적일 때도 있지요.”

한서진의 냉철한 말에 정지원은 한 방 먹은 듯이 잠시 말이 없다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 말이 맞다. 공개적으로 처리하려고 해봐야 시간만 길게 잡아먹지. 우리 한서진 박사님 시간은 황금으로도 살 수 없는 건데.」

“어차피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굳이 대화를 시도할 필요성을 못 느꼈습니다.”

수십 조 원 이상의 규모를 관행이란 이름하에 꾸준히 지속해온 이들이다. 그런 자들과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말이 통하지 않다는 건 방산비리 업체만 꼬집어 이야기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느끼셨나요.”

한서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정지원이 예리하게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총체적 난국이었어요. 기업, 군, 정부, 국민, 그냥 몽땅 다요.”

「정식 절차만 밟았다면 아무리 네 압력이 있어도 단시간 내에 해결 못했겠지.」

방산비리는 군과 기업, 정부의 오랜 삼박자 속에서 연주 되어온 하모니였다. 그런 절묘한 화음이 없다면, 그렇게 오랫동안 큰 규모의 누수가 발생할 수가 없다.

“국민 역시 마찬가집니다. 피해자이면서 한편으로는 책임자이기도 해요.”

도둑이 들어 곳간에서 재물이 빠져 나간다. 그것을 온전히 관리하지 못한 주인은 그 손실 책임을 지는 피해자이기도 하다. 방비를 단단히 하지 않고, 도둑을 제대로 잡지 않은 책임을 져야 한다.

“타르타로스로 시뮬레이션을 해봤는데 합법적인 경로만 밟았다가는 관련자의 5%도 처벌하지 못해요. 여론도 잠시 끓어올랐다가 금방 식어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겠죠. 지금 BII-E001에 모든 관심이 집중된 것처럼.”

「그래서 지금처럼 계속 보이지 않는 곳에서만 손을 쓰려고?」

“물론 아니죠. 무기는 갖고 있는 대로 전부 꺼내는 게 효율적입니다. 전 가장 쓰고 싶은 무기부터 꺼냈을 뿐입니다.”

「제대로 피바람이 불겠구나.」

“거슬리는 걸 그대로 놔두는 것보단 낫겠죠.”

「알아서 하겠지만, 그래도 조심해. 네가 한 일이 알려지면 분명 반발하는 사람들도 나온다. 세상에는 악법도 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저 역시 악법도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별로 지키고 싶지 않을 뿐이죠.”

「그건 나도 그래.」

정지원은 수화기 너머로 낮은 웃음을 흘렸다.

「똑같이 법을 어긴 사람 둘이 있다 치자. 한쪽은 자기 사익을 챙기기 위해서였고 다른 한쪽은 그놈을 잡기 위해서 법을 어겼어. 그럼 세상의 손가락질은 후자를 향한다. 왜 나쁜 놈을 잡는데 규칙을 지키지 않았느냐고. 정작 나쁜 놈이 자기 욕심 챙긴 것에 대해선 별 말을 안 하지.」

“알고 있습니다. 시뮬레이션도 그렇게 나왔으니까요.”

「그래서 배트맨이 밤에 직접 수트를 입고 뛰는 거야.」

가벼운 실소가 터지며 분위기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정지원이 문득 물었다.

「그런데 그놈들 계좌에서 빼낸 돈이 제법 되지 않아? 그래도 꽤 될 것 같은데.」

“진짜 얼마 안 됩니다. 탈탈 털었는데도 7조 원이 간신히 될까 말까 하네요.”

「그 돈으로 뭐할 생각이냐?」

“미국에서 전투기나 사다가 주려고요. 원래 그런 목적의 돈이었으니까, 그렇게 쓰는 게 맞겠죠.”

============================ 작품 후기 ============================

불타는 기와집을 바라보며 그 안에서 타들어가는 빈대 떼를 생각해봅시다. 가슴이 청량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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