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424화 (424/609)

00424  어차피 말이 통하지 않으면  =========================================================================

―미래그룹 오너 일가, 모든 금융 자산 수거 완료.

―SKK그룹 오너 일가, 모든 금융 자산 수거 완료.

―삼산중공업 오너 일가, 모든 금융 자산 수거 완료.

―완료……. 완료…… 완료…….

한서진은 조용한 눈빛으로 주모니터에 떠오른 결과를 응시했다.

타르타로스는 전산망의 핵무기나 다름없다. 그것도 유일한.

그동안 그는 타르타로스란 핵무기를 마치 재래식 무기처럼 가볍게 사용해왔다. 그것도 항공모함이나 전차 군단 급 정도가 아니라, ‘소총’ 정도의 출력으로 극도로 낮춰서 활용했다.

지구 전체의 전산망을 지배할 수 있으며, 그 어떤 것도 마음먹은 대로 조작할 수 있는 가공할 핵무기. 그것을 가지고 고작해야 원하는 정보를 수집하고, 빅 데이터를 가공하는 정도로만 써 왔던 것이다.

그렇게 봉인한 핵무기 발사 버튼을 조금 전에 막 눌렀다. 소리 없는 발사, 그러나 그 위력은 가공했다.

불과 몇 초도 안 되는 사이에, 국적이 다른 은행들 사이에서 수백만 번 이상의 가상거래를 일으키며 자금을 세탁한 것이다.

돈이 숫자로만 표시되는 시스템 하에서, 타르타로스 2는 그야말로 핵병기 그 자체였다.

은행 중앙시스템을 ‘통제’해서, 그들의 예금을 지구 수만 바퀴쯤 돌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무지막지한 뺑뺑이를 돌린 뒤에 처음과 끝만 남기고, 중간의 흔적을 싹 지워버렸다.

아무리 추적해도 돈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으리라. 각 은행 역시 자신들의 책임을 발뺌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기술적으로 이체 자체는 정상적으로 이뤄졌으니까. 그들 일가가 항의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 어떤 항거도 용납하지 않고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가공할 위력, 그래서 핵무기나 다름없는 것이다.

온라인을 끊어도, 전원을 꺼도 소용없다.

타르타로스 2는 에테르 에너지를 통해, 원하는 데이터베이스에 접촉할 수 있으니까.

타르타로스의 데이터 통제를 피하기 위해서는 모든 거래 내역을 종이에 펜으로 쓰는 수밖에 없다. 전산 입력은 어떠한 형태를 띠든 타르타로스를 벗어날 수 없으니.

‘이러려고 타르타로스를 만든 게 아닌데.’

엄밀히 말해서 불법이다.

법으로 처벌할 수 없다 해서 사인이 단죄하는 게 과연 옳을까. 법적으로는 분명히 그르다.

그러나 불법을 저지른 이들을, 법으로 처벌할 수단이 없다 해서 손 놓고 있는 게, 오히려 더 큰 잘못이 아닌가? 그런 ‘큰 잘못’을 저지른 이들이 이것을 비난하는 것은 또 자격이 있는가?

한서진은 그런 의문에 끊임없이 흔들면서도,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인지했다.

‘영웅 따위는 아니지. 절대로.’

선한 마음에서 이뤄진 행위가 아니다.

그저 보고 싶지 않아도 보이는 거슬림을 치워버리고 싶은 마음일 뿐이다.

수단이 불순하지만 결과는 정당.

결과가 정당하지만 수단은 불순.

어느 쪽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서 다른 평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평가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어차피 그들의 평가를 받을 일은 없을 테니까.

미래그룹은 비자금을 들고 잠적한 이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다행히 그들은 한국을 벗어나지 못한 채였다.

미래그룹은 그들을 경찰에 넘기는 대신 강제로 끌고 와서 감금한 뒤 취조를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비자금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러나 그들이 상상하지도 못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다.

“저, 저도 모릅니다.”

“그냥 한 통의 문자를 받았어요. 놈은 제가 차명으로 비자금을 관리하고 액수가 얼만지 정확히 알고 있었어요!”

“설마설마해서 확인해보니 정말로 놈이 말한 시간에 정확히 인출해 갔더군요. 게다가 놈이 보낸 문자는 이미 지워져 있었어요. 통신사에 조회해보니 놈이 문자를 보낸 기록 자체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문자를 받았는데 말이죠.”

“죄송합니다. 누가 봐도 제가 횡령한 것으로 보일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도망쳤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어렵사리 실토 받은 이들의 자백은 하나같았다.

비자금 내역 및 관계를 정확히 알고 있는 정체모를 문자를 받았고, 설마 하는 마음에 잔고를 조회해보니 문자 내용대로 이미 인출되고 없었다는 사실이다.

누가 봐도 믿어주지 않을 상황 아닌가. 재벌의 혹독함을 알고 있는 그들은 결국 도주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만 미래그룹이 재빨리 움직인 터라 해외 출국이 불가능했고, 덕분에 국내에 서투르게 숨어 있다가 잡혀온 것이었다.

“이게 말이 돼!”

쓰러졌다가 겨우 깨어난 조태호 회장은 불같이 화를 냈다.

비자금 관리인들이 사전에 입을 맞춘 것이라고, 엉뚱한 핑계를 늘어놓는 것이라고.

그러나 최측근들은 심각했다.

“회장님…… 어쩌면 그들의 말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이미 회장님 일가에도 동일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그 지적에는 조태호 회장도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자신과 아내, 그리고 자녀와 손주들의 모든 금융 자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 비자금 관리인들이 개인 재산까지 손댈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측근들의 추론이 옳을 수 있으리라.

“이건 절대로 우연이 아닙니다. 단순한 전산 오류도 아닙니다. 국내 은행들을 닦달하고 있지만 아무런 이상한 점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전자 이체 거래는 분명히 정상적으로 이뤄졌습니다.”

“그럼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단 말인가!”

“…….”

“…….”

아무리 호통을 친들 답을 알 수 없으니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수밖에.

은행들끼리 미래그룹을 엿 먹이기 위해서 서로 담합하고 비리를 저질렀을 리는 없다. 분명 어떤 존재가 미래그룹을 작정하고 팬 것이다.

그 존재는 집단인지 개인인지,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 등은 전혀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조태호 회장과 미래그룹에 분명한 악의를 품고 있으리라는 것. 그리고 은행 전산망을 자기 마음대로 주물럭거릴 수 있는 해킹 실력이 있다는 것.

그 정도 해킹 실력이라면 미국 비밀정보부서에서 나선 거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미국이 미래그룹에 그래야 할 이유가 있는가?

“일단 검찰에 신고하고 은행 고소해. 비자금은 몰라도 개인 재산은 지들도 빼지 못할 거야. 그리고 주식도.”

“그럼 비자금은 포기합니까?”

“미쳤나! 그게 얼만데 포기해!”

조태호 회장은 눈을 부릅뜨며 화를 냈다.

“우리 쪽 검사들 있지? 거기 줄 대서 은밀하게 조사할 수 있도록 알아 봐. 이거 보통 일 아니다. 자칫…….”

조태호 회장은 말을 흐렸다.

이건 어떤 소수의 해커 집단 차원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적어도 행정부 이상의 공권력을 가진 집단에서야 겨우 벌일 수 있는 일이다.

‘도원패 이놈이…….’

혹시 로비가 제대로 먹히지 않은 걸까?

방산비리를 GK그룹에 한정하여 매듭짓는 척 하면서, 뒤로는 이런 식으로 드러나지 않게 제재하는 게 아닐까? 정부가 작정하고 나선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도 같았다.

‘곤란한데.’

조태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도원패 정권이 행한 것이라면, 미래그룹 혼자서 발버둥 쳐봐야 아무 소용없다. 돈의 힘이 제일이라지만, 살아있는 권력이 뒷일 생각 않고 작정한다면 재벌 한둘쯤 해체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이렇게 번거롭게 할 필요가 있나?’

그게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상상도 하지 못한 형태의 수난을 겪으니, 머리에 심한 과부하가 걸렸다. 어디서부터 매듭을 확인해야 할지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때 재산관리 변호사가 들어왔다. 그의 어두운 얼굴을 본 순간 조태호는 또다시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자네, 무슨 일인가?”

“회장님, 주식 매각 대금 말입니다. 그것이…….”

“그게 왜?”

매각 대금은 분명히 출금이 정지된 계좌로 받았다. 그런데 대체 무슨 문제라도?

“모두 인출되었습니다.”

“뭐, 뭐야!”

조태호는 저도 모르게 그만 뒤로 우당탕 넘어졌다. 측근들이 놀라서 달려왔다.

그는 핏기가 가득 선 얼굴로, 마치 변호사가 범인이라도 되는 것인양 노려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출금 정지 하라고 했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 돈이 사라져!”

“분명히 출금 정지를 해놓았습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지금도 계좌는 여전히 출금 정지 상태고요.”

“자네, 지금 나랑 장난해? 엉, 장난하냐고! 으아아악!”

조태호 회장은 괴성을 지르다가 또다시 혼절했다.

벌써 두 번째 혼절이었다.

“요즘 아이언맨과 배트맨이 왜 직접 수트 입고 뛰어다니는지 알겠더라.”

“그래야 영화 갈등이 생기니까가 아닐까요? 안 그럼 이야기가 성립이 안 되잖아요. 아니면 재미가 없어지거나.”

송하나의 대답에 한서진은 피식거렸다.

“그게 제일 해결이 빠르거든. 아마 둘 다 답답한 건 못 참는 성격일 거야.”

“아이언맨이 가끔 청문회에서 시달리는 거 보면 그럴 만하다는 생각도 들어요. 근데 오빠.”

송하나는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가까이 붙었다. 그리고 한껏 애교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혹시 오빠도 수트 입나요?”

한서진은 피식거렸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미래그룹이 당한 일은 숨기려야 숨길 수가 없는 일이니까. 이미 재계에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뒤였다.

“수트 따윈 안 입어. 대신 발사 버튼을 누르지.”

“발사 버튼이요?”

“핵 같은 거지. 사람 대신 데이터를 죽이는 무기지만.”

“아하, 역시 오빠 맞군요?”

약혼자에게 숨길 일도 아닌지라, 한서진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송하나는 조금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빠, 영웅놀이 같은 건 안 하신댔으면서.”

“영웅 놀이 아니야. 선한 동기도 아니었고.”

“그럼요?”

“너무 보기 싫잖아.”

“…….”

“그래서 치워버렸어.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라서 그냥 혼자 조용히 처리했고.”

짧은 대답, 하지만 송하나는 온전히 이해했다는 듯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주시했다.

“오빠가 정말로 영웅으로 나선다 해도 전 좋은데.”

“원래 영웅은 피곤해. 그리고 선한 마음이 있어야 돼. 난 그런 게 없잖아.”

“오빠 정도면 충분히 선인이죠.”

“그건 세상이 이 모양이라서 상대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거고, 전혀 안 그래. 그냥 보통 사람하고 똑같아. 영웅은 배트맨 같은 멘탈을 가진 애들이 해야지.”

“걔들은 영화 속 캐릭터잖아요. 실존 인물이 아닌 걸요.”

“어쨌든. 그런 건 흥미 없어.”

송하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 뒤 다시 그를 주시했다.

“제가 왜 재정감시 TF팀을 만든지 아세요?”

“글쎄.”

“돈의 흐름이 깨끗해지면 나라가 투명해지고 건강해져요. 그럼 크게 성장할 수 있죠. 전 기왕이면 오빠가 그런 부강한 나라를 가졌으면 해서요.”

“나라가 소수의 소유물은 아니잖아.”

“가장 보편적인 거짓말이기도 하죠.”

“…….”

한서진은 송하나의 눈빛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역시 백철중의 딸이라는 것일까, 젊은 여자 입에서 나올 만한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의 뜻이 싫진 않다. 정확히는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는 더 이상 그에 관해서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다른 걸 물었다.

“어디까지 하실 생각이세요?”

“먼지가 더 이상 안 보일 때까지.”

============================ 작품 후기 ============================

“그래서 그 돈 다 어디로 갔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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