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423화 (423/609)

00423  어차피 말이 통하지 않으면  =========================================================================

‘거슬려.’

자신의 결심에 특별한 영웅심은 없다.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신념 따위도 없다.

그저 안락한 삶을 원했을 뿐이다. 그래서 한국을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되었으면서도, 별다른 간섭 없이 하고 싶은 연구만 하면서 지내왔다.

그간 자신이 한국에 발휘한 영향력은 H그룹이나 송하나, 김시형 등 주변 사람들을 통한 간접적인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 결심에 변화가 생겼다.

주변의 소음이, 보고 싶지 않아도 보이는 사회의 뒤틀림이 자꾸만 신경을 건드렸다.

뻔히 보이는 불법과 비리가 판을 치고 돌아다니는데도,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넘어간다.

그런 불협화음을 만들어내는 이들이 짜증났고, 그걸 제대로 잡아내지 못하는 이들이 답답했으며, 알려 하지도 않고 넘어가려는 이들이 답답했다.

“최근 15년 간 국방부 비리 총액 규모가 145조 원입니다. 비리 요건에 해당되는 내역만 따졌을 때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공론화도 되고 있지 않죠.”

“그러다가 이번에 GK 지뢰 탐지기로 터졌고.”

“그렇죠. 그건 145조 원 규모에 비하면 먼지에 불과한 정도고요. 그나마 지뢰 탐지기에서 터져서 사상자 9명으로 끝났지, 만약 전쟁 중에 군함이나 전투기, 미사일에서 이런 비리가 터졌으면 어땠을까요?”

“…….”

정지원은 145조 원이라는 액수보다는 그 구체성에 놀랐다.

“혹시 미국이 알려줬어?”

“타르타로스가 알려줍니다.”

“……그 정도였구나.”

그는 가볍게 신음했다.

한서진은 드높은 곳에서 한국 사회 전체를 한눈에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것도 항상. 그런 상상이 머리를 스치자 더 이상 웃어넘길 수만은 없게 되었다.

“제가 진짜 화가 나고 답답한 건 비리를 저지르는 대기업과 군 장성들이 아닙니다. 그거 하나도 못 잡아내고 정부 눈치나 봐왔던 검찰이나, 모른 체 묵인하고 넘어간 행정부의 도덕적 해이도 아니고요.”

“곳간에 든 도둑들이 대놓고 털어가는 데도 조용히 누워만 있는 주인 때문이구나.”

“그래놓고 털렸다고 뒤늦게 호들갑이지요. 시간 지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해지고, 계속 반복됩니다.”

“그게 그렇게 거슬렸구나.”

한서진은 웃음이 사라진 목소리로 차갑게 말했다.

“그냥 안 보이면 괜찮은데, 자꾸 보이잖습니까.”

“네가 안 보려고 노력하는 건?”

“눈을 뜨고 있는데 어떻게 안 볼 수가 있습니까. 그렇다고 제 눈을 감을 수도 없고요.”

결심이 확고한 것은 확인했다. 하지만 마음이 불편한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서진이가 나서서 한바탕 뒤집어주는 것도 괜찮겠지.’

낡고 병든 시스템에 오래 전에 실망했다.

유능한 인재들은 돈으로 쌓아올린 금자탑에 착취당하는 구조로 바뀐 지 오래였고, 계층 간 사다리는 사라졌다.

성공은 재능이나 노력이 아닌, 직계존속의 통장 잔고로 결정된다.

더 좌절했던 것은 사회가 그런 병폐를 용인한다는 것이다. 병을 지적하는 사람이 오히려 매장당하고, 쫓겨난다.

속도는 느리지만 분명하게 가라앉는 섬이었고, 그래서 기회를 잡아 탈출했다.

섬에서 탈출한 뒤에는 안전한 전용기 소파에서 천천히 침몰되는 광경을 즐겼다.

가끔은 적선하듯이 섬에 머무르는 주민들에게 약간의 구호품을 던져주기도 했고, 땅에 잠시 내려 그들을 위무하기도 했다.

섬의 침몰은 자신의 책임이 아니기에, 그리고 자신은 안전히 탈출했기에 마음 편히 관람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예 메스를 대지 않을 거면 모르지만, 이왕 도려낼 거면 전부 도려내라. 환자가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어차피 결국 안 죽는다.”

“그럴 생각입니다.”

눈빛에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다.

정지원은 어깨를 으쓱했다.

근래 한국에서 가장 긴장감을 탔던 그룹을 꼽으라면, 단언컨대 미래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에서 가장 큰 방위산업체를 거느리고 있으며, 해외 업체와도 연줄이 닿아 있다. 군 무기를 직접 생산하기도 하지만 위탁이나 중개를 하기도 한다.

많고 다양한 군 장성 인맥을 거느리고 있으며, 지금도 퇴역 장성들 상당수가 사외내 이사나 고문으로 감투를 차고 있다.

방위산업의 큰 축을 담당했기에, 그 어떤 기업보다도 많은 특혜와 비리에 다양하게 얽혀 있다. 경영진조차 구체적인 규모를 파악하기 어려울 만큼 난해하다.

소위 말하는 ‘가장 많이 해먹은’ 회사이지만, 오히려 지금은 여론의 관심 밖에서 완전히 비껴나 있었다.

“정부가 GK를 표적으로 삼았습니다. 그 이상으로 수사 규모를 확대하지는 않을 겁니다. 나중에 김시형 검사가 나설 것을 대비해서 군 특별수사부를 계속 유지하게 될 겁니다. 그럼 김시형이도 나설 명분이 없어지니까요.”

“우리 그룹으로서는 정말 다행입니다. 지금쯤 GK는 집에 붙은 불만 보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겁니다.”

임원회의 도중 가벼운 웃음이 터졌다.

회사가 넘어갈 수도 있는 큰 고비였는데, 다행히 기적적으로 틀어막을 수 있었다.

미래그룹 조태호 회장은 근심을 잊은 듯이 껄껄 웃었다.

“나중에 GK 회장 노후나 좀 돌봐주게. 그래야 인지상정이지. 전체를 대표해서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았는가.”

“알겠습니다, 회장님.”

“돌아가는 상황 보면 GK 회장은 교도소에서 노후를 보내야 할 듯합니다. 노후책은 그 자식들에게 돌려야겠는데요.”

작은 웃음이 다시 한 번 그친 뒤 조태호 회장이 진지하게 말문을 열었다.

“전부터 누누이 말했지만 철저히 조심하게. 워낙 시국이 좋지 않아. 이런 때 잘못 걸렸다가는 GK 꼴 나는 걸세.”

“알겠습니다, 회장님.”

“한때 재계 1위였던 진성그룹도 100조 원이 넘는 비자금을 강제로 환수당해야 했네. 그리고 한서진 박사의 장인 그룹인 H그룹이 지금은 무소불위의 업계 1위지. 대통령도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쫓아내는 사람이야. 다들 긴장해.”

진실과는 조금 다르지만, 원래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믿는 법이다.

아무튼 조태호 회장은 GK그룹이 빠르게 처리되는 것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이번 정권에 시도한 로비는 다행히 어렵지 않게 먹혔다.

다른 방산업체들도 지금쯤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축배를 들고 있을 것이다.

‘운 없는 친구 같으니.’

GK회장을 떠올리며 그는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찼다.

스펙 미달의 지뢰 탐지기 납품, 그 자체로는 대단한 비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하필 그게 북한 붕괴와 DMZ 지뢰 수색으로 이어지며 이런 불운을 초래했다.

만약 북한이 붕괴하지 않았으면 대대적인 DMZ 지뢰 수색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GK그룹이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몰락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역시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운이다. 그리고 GK는 그 운이 따라주지 못했다.

그때 회의실 문이 벌컥 열리고는, 비서실장이 굳은 얼굴로 빠르게 다가왔다. 그리고 낮게 귓속말을 건넸다.

“회장님, 큰일입니다. ‘33번 계좌’가 텅 비었습니다.”

“뭐라고?”

조태호 회장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순간 비서실장이 장난이나 헛소리를 한 줄 알았다.

33번 계좌, 비자금 계좌를 통틀어서 가리키는 비밀 명칭이었다. 그런데 그게 텅 비었다고?

회장의 안색이 심각해지자 회의는 어영부영 끝났다. 조태호 회장은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비서실장을 닦달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33번 계좌가 왜 몽땅 비었어?”

“98회에 걸쳐 거의 모든 예금이 인출되었습니다. 해당 은행에 항의 중입니다만 정상적인 인출 거래였다며 오히려 부인하고 있습니다.”

“돈 관리하던 놈들은?”

“……모두 잠적했습니다.”

“이놈들이 모두 내 돈을 처먹고 나른 게야!”

뒤통수에 큰 충격이 밀려온다. 조태호 회장은 비틀거리다가 그만 넘어질 뻔했다. 놀란 비서실장이 얼른 부축했다.

“그런데 좀 이상합니다. 인출 작업은 몇 시간 사이에 걸쳐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이게 가능하려면 비자금 관리자들이 사전에 미리 작당을 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맞아. 듣고 보니 뭔가 이상해.”

조태호 회장은 약간이지만 침착함을 되찾았다.

한두 놈이 돈을 먹고 잠적할 순 있다. 물론 그룹 차원에서 응분의 보복을 받겠지만.

그러나 비자금을 관리하던 모든 이들이 동시에 잠적한다? 이건 분명히 사전 모의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일단 그놈들 모두 찾아내. 찾아내서 무조건 실토하게 만들어.”

“지금 정보팀에서 행방을 쫓고 있는 중입니다.”

“가봐. 가서 뭐라도 알아낸 거 있으면 바로 보고하고.”

800억 원에 달하는 비자금이 몽땅 사라졌다. 조태호 회장은 미칠 것 같았지만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어떻게 피땀 흘려 알뜰살뜰하게 모은 돈인데!

‘이 녀석들, 잡히기만 하면……!’

필히 녀석들이 사전에 모의한 게 틀림없으리라. 어떻게 점조직으로 관리하던 녀석들이 다른 이들을 알게 되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것도 곧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날고 뛰어봐야 한국 땅에서 재벌 이길 자는 없다. 그것도 일개 개인이.

그렇게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데, 비서실장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개인 변호사가 들어섰다. 그의 개인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회장님……. 큰일 났습니다.”

변호사의 목소리는 아까 비서실장이 회의실에 찾아왔을 때처럼 좋지 않았다. 조태호 회장은 불길한 기시감을 느꼈다.

“무슨 일인가?”

“회장님 개인 계좌에서 대부분의 예금이 인출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모님과 자녀분들의 계좌에서도…….”

“……대부분?”

“예, 전부는 아니고, 모든 계좌마다 아주 조금 남긴 했습니다. 정확히 십팔만 천팔백 십팔 원입니다. 각 계좌 잔고액이 전부 동일합니다.”

“181,818원?”

조태호의 머릿속은 순간적으로 하얗게 변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건지 가늠이 오지 않았다. 비자금이야 그렇다 치고, 별도로 관리하는 개인 계좌는 대체 왜?

게다가 남은 잔고가 절묘하다. 181,818원이라고? 그것도 모든 계좌가?

“그리고…… 회장님과 가족 명의로 된 주식들이 전부 주식시장에 나와서 팔렸습니다. 혹시 회장님께서…….”

“내가 그딴 짓을 할 리가 없잖나! 주식이 전부 팔렸다고?”

“네, 전부…….”

“이 사람아! 그걸 제일 먼저 말했어야지!”

조태호 회장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얼마 되지 않는 지분이지만, 회장직을 영위하게 해주는 주식이 전부 팔렸다니. 그것도 아무도 모르는 사이 말이다.

‘말도 안 돼!’

비자금 증발, 개인 계좌 증발, 그리고 주식 매도까지? 이런 일들이 과연 우연히 일어날 수 있는가?

조태호는 쓰러질 것 같은 현기증 속에서도 한 가지 확신을 품었다. 이건 절대로 일시적인 금융 전산 오류 따위가 아니었다.

분명히 무언가가 자신을, 그리고 미래그룹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재계 6위에 당당히 빛나는 재벌을 말이다.

도대체 누가? 왜?

그때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인은 바로 아들이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불길한 예감이 미친 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버지, 제가 보유한 주식과 예금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처음에는 금융 오류인 줄 알았는데, 동생들도 똑같은 일을 겪었답니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해서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

조태호 회장은 그대로 혼절했다.

============================ 작품 후기 ============================

29만원보다는 적게 남겨드릴게.(찡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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