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20 기와집 태우기 =========================================================================
지뢰 피해자들을 조용히 둘러보고 돌아온 뒤, 한서진은 고민에 잠겨 있었다.
‘과연 엘릭서로 될까?’
만능 치료제, 엘릭서.
그러나 이미 잘려나간 사지를 복원해주는 것도 가능할까? 한서진은 확신할 수 없었다.
‘통째로 쓰는 건 좋지 않아.’
이미 오래 전 엘릭서의 존재는 감추기로 마음먹었다.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서만 쓰기로 결심했다. 엘릭서가 세상에 알려질 경우, 건강과 장수를 원하는 부호들의 등쌀에 시달릴 것이기 때문이다.
보물을 빼앗길 거라는 두려움 따위는 없지만, 몹시 귀찮아지는 인생은 사양하고 싶다. 엘릭서를 혼자서만 움켜쥐고 있다는 대중의 비난 역시 뒤따를 테고, 그런 피곤함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럼 H 시리즈를 보완해볼까?’
주요 장기 중에서 간을 새로 복원하는 것은 이미 성공했다.
H시리즈는 세상의 찬사를 받고 있으며, 사람들은 심장이나 췌장, 위장, 혈관 등 다른 주요 장기에도 적용 가능한 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한서진도 에테르 연구에 바쁘지만 않았더라면 H시리즈의 추가 라인업을 개발하는데 시간을 할애했을 것이다.
가급적 급하지 않은 방법으로 해결책을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흘렀다.
떨어지는 해를 지그시 바라보며, 초췌하게 병상에 누워 있던 최현식을 떠올렸다. 세상을 잃은 듯 칙칙한 눈빛이던 다른 환자들도 잇따라 떠올랐다.
‘돈이 전부가 아닌데.’
돈을 잃으면 적게, 친구를 잃으면 많이, 건강을 잃으면 전부 잃은 것이다.
정부에서 많은 보상을 했다지만, 전부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돈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도 그랬던 적이 있었지…….’
자신도 한때 사회의 작은 부품이던 시절이 있었다.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고 중요하지도 않은, 보잘것없는 부품. 부서지면 언제든 새로 교체 가능한 대체품이 까마득하게 줄을 서 있는, 그런 아무것도 아닌 작은 부품.
피해자들 역시 마찬가지로 작은 부품에 불과했다. 그래서인지 더욱 그들의 절망이 가슴에 남았다.
특히 빛을 잃은 최현식, 어둠으로 가득한 그의 세상에 희망의 불을 지펴주고 싶었다.
“꼭 엘릭서가 아니어도 되잖아?”
한서진은 벌떡 일어나서 팔을 걷어붙였다. 주모니터 앞에 앉은 그는 여러 개의 창을 켰다. BII 시스템 화면을 불러온 뒤 스펙을 점검하고, 인터넷 홈페이지를 켰다.
라이카,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독일의 카메라 제조 회사였다.
홈페이지에서 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직접 전화기를 들었다.
“성역은 없다.”
도원패 정부가 단단히 벼르고 있던 칼을 빼들었다.
임시로 특별수사본부를 구성하여, 금속 탐지장비 납품에 비리는 없었는지 적극적으로 파고들기 시작한 것이다.
GK그룹이 납품대상자가 되고, 성능을 시험하는 과정에서 전 방위적인 로비가 있었다는 혐의가 드러났다. 그뿐만 아니라 GK그룹이 납품한 일체의 군 장비에서도 그런 정황이 있었다는 게 속속들이 밝혀졌다.
수사가 활기를 띠면서 GK그룹의 인사들이 속속들이 구속되었다. 검찰에는 김시형 측만 건재한 게 아니었다. 중간에서 눈치를 보면서 저울질을 하는 세력도 있었고, 그들은 이때다 싶어 GK그룹을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지뢰 피해 사건으로 분노하고 있던 여론은 GK그룹 인사들이 잡혀갈 때마다 환호를 보냈다. 강도 높은 압박 수사가 길어지며 응원은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마침내 검찰이 GK그룹 회장 사택에 들이닥쳤고, 그를 수갑에 채워 압송해갔다.
수척한 얼굴로 수갑과 포승줄을 찬 채 검찰 포토라인에 선 GK 회장의 모습은 불티나게 매스컴을 탔고, 국민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GK를 욕했다.
“GK가 방산비리만 저지르지 않았어도 그런 대참사는 없었다!”
“GK는 피해 장병과 간부들 앞에서 죽음으로 사죄해야 한다!”
“GK가 저지른 방산비리가 고작 이 정도일 리가 없다! 이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이참에 GK를 철저히 파헤쳐서 모든 불법 사실을 찾아내야 한다! 방산뿐만 아니라 다른 사업에서도 온갖 비리로 얼룩져 있을 게 틀림없다!”
“하여간 있는 것들이 더 해요!”
수많은 기자들의 질문과 카메라 세례를 받는 GK회장의 얼굴은 모든 것을 단념한 듯이 보였다.
이미 그는 알고 있었다. 정권에서 자신을 희생양으로 찍었다는 것을.
민심을 달래주기 위해 화려한 제물이 필요했고, GK그룹이 제단에 오르도록 선택받은 것이다.
자신을 비롯한 오너 일가는 이제 고개를 들고 살 수 없는 죄인이 될 것이고, GK그룹은 계열사별로 산산이 찢겨져 다른 재벌들이 나눠 가질 것이다.
그런 미래를 예감한 그의 표정은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재벌 회장으로서 누구도 부럽지 않은 인생을 살아왔지만, 세상의 외면 앞에서는 풍랑 앞의 나뭇잎이나 마찬가지였다.
한편 마녀 사냥하듯이 GK‘만’ 몰아붙이는 흐름에 우려를 나타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GK를 동정해서가 아닌, 다른 이유에서다.
“결과적으로 GK의 방산비리 때문에 희생당한 장병과 간부들이 유감스럽다. GK가 잘못한 건 맞다. 하지만 GK만 집중 수사하는 시국이 너무 우려된다.”
“엄밀히 말해 GK는 방산비리 중에서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지뢰 탐지 장비 같은 자질구레하고 작은 것들에서만 비리를 저지른 작은 도둑일 뿐, 정작 큰 도둑들은 지금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다.”
“작은 도둑만 족치지 말고 큰 도둑도 함께 족쳐라!”
“정부는 GK를 본보기로 삼고, 나머지는 얼렁뚱땅 감추려는 의도가 있는 게 아닌지?”
GK를 제물로 내세워 이 폭풍을 잠재우려는 교활한 의도가 아니냐는 비판이 일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회장님, 이미 GK는 끝났습니다. 남겨진 가족들을 생각하셔야지요.”
“이것이 국민들의 분노를 달랠 유일한 방법입니다. 검찰도 어쩔 수 없어요.”
검찰에서는 GK회장을 상대로 적극적인 회유와 압박에 들어갔다. 순순히 제물이 되어 제단에 바쳐지라는 요구였다.
정부에서는 파격적인 속도로 보상 절차를 마무리 지었다. 피해자 및 유족들을 상대로 보상금을 지급하고, 국가유공자로 등록한 뒤 모든 혜택을 보증하는 약속을 해주었다.
“영광입니다, 박사님.”
처음 한서진의 전화 연락을 받은 라이카 측은 쉽사리 믿지 못했다. 그러나 통화 상대방이 한서진이라는 것을 정말 깨닫게 된 순간 일은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곧바로 사장으로 직통 연결되었고, 사장은 굽실거릴 듯이 정중하게 대했다. 간단한 개요를 들은 사장은 곧바로 기술진을 이끌고 독일에서 한국으로 날아왔다.
듣기로는 모든 스케줄을 취소하고 즉시 비행기에 올랐다고 하는데, 한서진으로서도 감탄이 나올 만큼 빠른 행동력이었다.
“저희 카메라가 필요하시다고요?”
“그렇습니다. 실물에 최대한 가깝, 아니 실물과 동일한 빛 정보를 인식할 수 있는 스펙의 카메라가 필요합니다.”
“그 카메라가 BII와 접목되는 거군요.”
“네, 맞습니다.”
라이카 사장은 강한 눈빛을 품은 채 임원 및 기술진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럼 박사님께서는 BII 시스템에 저희 제품을 장착하시겠다는 거군요. 영광입니다.”
“정확히는 BII를 이용한 의료기기에 귀사의 카메라 기술을 적용하고 싶은 겁니다.”
“……의료기기요?”
라이카 사장은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BII 기술제휴 이야기라기에 독일에서 한달음에 달려왔다. 요즘 세상을 뜨겁게 달구는 가상현실 기술에 라이카가 한 자리를 맡을 수 있게 됐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근데 가상현실이 아니라 의료기기라고 한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BII는 시각 정보를 뇌가 이해할 수 있는 시각 자극으로 변환해 직접 뇌신경에 입력할 수 있는 기능이 있습니다. 그걸 바로 카메라와 결합하자는 거죠.”
“잠깐만요, 혹시 의료기기라 하신 것은…….”
“라이카 기술은 전 세계 모든 시각장애인들에게 유일한 빛이 되어줄 겁니다.”
사장을 비롯한 라이카측 인원들의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기대했던 가상현실 기술제휴는 아니지만, 이건 그 이상으로 대박이 아닌가.
“단순히 영상 정보를 뇌에 입력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시각 대체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사물을 보기 위해 안구를 움직이고 초점을 맞춥니다. 중요하지 않은 영상 정보는 눈앞에서 보면서 흘리기도 하지요. 그 조화를 맞추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많은 연구와 개량이 필요합니다.”
“맞습니다.”
“물론 그 전에, 사람의 두뇌가 실제 풍경과 동일하다고 느낄 수 있는 영상을 재현하는 게 먼저겠지요. 밝거나 어두운 환경, 그 어느 곳에서도 자연스러운 모습 말입니다.”
라이카측 인원들은 이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단순히 뛰어난 카메라를 제조하는 게 전부가 아니다. 풍경을 있는 그대로 담거나, 혹은 자연스러운 색의 조화를 재현해내는 것으로 그치지도 않는다.
말 그대로 인간의 눈 그 자체가 되어줄 카메라를 제조해야 한다. 사람이 시각으로 풍경을 인식하는 감각 형태에 관한 깊은 이해와 고찰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해보고 싶다.’
기술진은 주먹을 꾹 쥐었다.
카메라 시대의 새로운 혁명이 될 위대한 작업이다. 안구를 흉내 내는 것에서 출발한 카메라가, 이제는 안구 그 자체가 되는 것이지 않은가.
가슴이 벅차고, 흥분이 끓어올랐다.
카메라의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될 시작점에 자신들이 우뚝 서게 될 기회를 얻었다. 카메라에 인생을 건 장인으로서 온몸의 세포가 환희를 질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영상 처리 부문은 귀사에 전적으로 맡기겠습니다. 누구보다 잘 해내실 거라 믿습니다.”
“믿고 맡겨 주십시오. 기왕이면 인간의 눈을 훌쩍 뛰어넘는 눈을 만들어보겠습니다. 우리 회사는 이래봬도 15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곳입니다. 독일의 기술력은 세계 제일입니다.”
즉시 비서가 나서서 계약서를 체결했다.
라이카 사장은 인생에 다시없을 행운을 쥐었음을 깨달았다. 한서진이 추진하는 프로젝트에 주요 파트너로 선택받았을 뿐만 아니라, 직접 그와 대면하고 협약을 체결했다.
한서진과 면담을 했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본사 및 본국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누릴 수 있으리라. 앞으로 자신의 인생은 이제 180도 달라질 것이다.
“카메라와 영상 소스 문제는 해결됐고.”
영상 정보를 어떻게 처리하는지는 자신의 전문이 아니었다. 그 부문은 적지 않은 시각적 예술성이 필요하다. 150년 전통을 자랑하는 독일 카메라 명가는 좋은 파트너가 되어줄 것이다.
이제는 영상 정보를 시각 정보로 변환해 입출력 과정을 처리하는 영역이 남았다.
‘디지털 신호를 아날로그 신호로 전환하는 건 이미 해결했지만…… 굳이 아날로그로 할 필요가 있을까?’
뇌는 아날로그 시각 신호를 인식할 수 있다. 그래서 기존 BII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신호로 전달한다.
하지만 라이카측과 협의를 마치고 심도 깊은 토의를 한 결과,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생겼다.
육안보다 더 세밀하고 정확한 시각 정보를 뇌가 자연스럽게 해석할 수 있도록 전달할 수 있다면, 그게 더 좋은 결과가 아닐까?
“재밌겠는데. 한 번 해보자.”
============================ 작품 후기 ============================
4000K의 울트라 메가 해상도, 진정한 Hyper IMAX의 시대가 열립니다.
Coming s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