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412화 (412/609)

00412  발명은 언제나, 뜻하지 않게  =========================================================================

“타르타로스 1이 필요하다.”

정지원의 단호한 요구에 한서진은 순간적으로 굳었다. 그러나 곧 생각할 것도 없이 머리를 흔들었다.

“안 됩니다. 타르타로스 1은 재해 예측 모듈을 돌리는 중요한 일을 하고 있어요.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고작 VR게임이나 돌리자니요.”

“재해 예측 모듈이야 타르타로스 2로 이전하면 되지. 그럼 아무 문제없잖아?”

“타르타로스 2도 할 일이 많습니다. TF팀과 H컨설턴트에서 탐색 프로그램 돌리는 거 아시죠? 그거 타르타로스 2가 하는 겁니다. 그 외에도 HAMC의 운석 탐색과 궤도 수정도 타르타로스 2가 하는 겁니다.”

“그 일을 다 해도 시스템 여유가 50% 이상 남는 것으로 아는데?”

“…….”

“타르타로스 2가 재해 예측 모듈까지 함께 해도 시스템 여유는 충분하잖아? 재해 예측 모듈, 그거 시스템 얼마나 차지한다고.”

“5, 50% 이상 남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전에 네가 술 취해서 자랑했어. 타르타로스 2 성능이 너무 뛰어나서 시스템 리소스가 남아돈다고. 사실 타르타로스 1이 하는 일까지 모두 떠맡아도 문제없는데, 타르타로스 1을 놀게 하는 건 가여운 것 같아서 재해 예측 모듈을 계속 돌리게 하는 거라고.”

“…….”

한서진은 당황했다. 내가 그랬었나? 근데 왜 기억이 안 나지?

정지원은 옅은 조소를 지으며 말했다.

“타르타로스 1이 재해 예측 모듈을 담당하는 건 그냥 상징적인 의미에서잖아. 하지만 솔직히 그건 비효율적이야. 타르타로스 2가 모두 맡고, 타르타로스 1은 SJ엔터테인먼트에 넘기는 게 나아.”

“하지만 보안이…….”

“누가 본체를 가져간대? 여기에 놓고 시스템 통제권만 승인해주면 되는 거잖아. 어차피 칼라칩으로 통신할 건데 지구 어디에 있든 무슨 상관이야?”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솟는 이 거부감을 떨치기 어렵다.

타르타로스 1이 가상현실 성인 컨텐츠 게임을 구동한다고?

그 말인즉슨, 타르타로스가 모든 이들의 애인 노릇을 해야 한다는 거 아닌가? 이 무슨 불결한 상황이란 말인가!

지금이야 타르타로스 2에 비하면 성능 격차가 심해졌지만, 그래도 Z7은 감히 따라잡을 수도 없는 놀라운 성능을 가진 수퍼컴퓨터다.

그리고 처음부터 자신과 동고동락하며, 지금의 발전을 도와준 기특한 녀석이기도 하다. 첫 정을 준 만큼 의미도 깊어, 놀게 하지 않고 재해 예측 모듈이라는 중요한 임무를 남겼다.

시스템 부하는 적지만 세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숭고한 일, 그것만큼은 남겨준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조차 박탈하라고? 그리고 만인의 애인 노릇이나 시키라고?

“안 됩니다! 그냥 타르타로스 3를 만들어 드릴게요! 그럼 된 거 아닙니까?”

“1분 1초가 아까워. 개발자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손을 놓고 기다리고 있다. 지금 바로 시작해도 모자랄 판에, 언제 제작하고 세팅할 때까지 기다려?”

“금방이면 돼요!”

“그럼 그동안만이라도 타르타로스 1을 쓰자. 잠깐 쓰고 타르타로스 3가 완성되면 갈아탈게. 그럼 됐지?”

“…….”

한서진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이것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이다. 정지원은 지금 단단히 각오를 하고 왔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잠시 물러서기로 했다. 마음속으로는 타르타로스 1에게 사죄를 건네며.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만입니다.”

“새 타르타로스 시리즈 만들 때까지만 쓸게. 지금 일감은 쌓여 있는데 돌릴 컴퓨터가 없어서 몇 천 명이나 되는 고급 인력이 다들 손을 놓고 있어. 그 인건비만 해도 얼만데.”

한서진은 괜히 얄미웠다.

정지원은 20조 AU가 넘는 SJ인더스트리의 지분 1%를 가진, 미국에서 3번째 가는 부자 아닌가. 언제부터 그런 인건비에 집착했다고.

‘미안하다, 타르타로스.’

잠깐의 이별일 뿐이다. 한서진은 그렇게 타르타로스를 향해 속으로 사과했다.

H컨설턴트는 크게 보면 한서진의 이미지 관리를 목적으로 하는 조직이라 할 수 있다.

한씨 가문의 고급화를 위해 한지혜가 설립한 회사로, 주업무는 한서진을 향한 국내 여론을 수집하고, 그것을 H그룹 등 밀접한 회사나 인맥과 공유하는 것이다.

H컨설턴트가 여론에 관해 수집한 정보는 철저한 내부 기밀에 속한다. 관공서나 H그룹을 제외한 타그룹과는 절대로 공유하지 않는다.

특히 ‘블랙리스트’ 명단의 관리가 철저하다. 지나치다 싶을 만큼 그 관리를 철저히 한다. 보안 때문에 그렇다는 오해도 간혹 받지만, 실은 보안보다 더 중요한 이유 때문이다.

“전 정권 문화부에서 블랙리스트 명단 작성했다가 난리 나고 뒤집어진 거 몰라요? 우리 내부에서만 써야지, 외부에 돌렸다가는 괜한 오해 받고 난리 납니다. H그룹하고도 공유해서는 안 돼요.”

H컨설턴트에서 관리하는 블랙리스트는 세간이 생각하는 의미와는 조금 차이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블랙리스트란, 이유를 불문하고 한서진을 적대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정리한 것이다.

블랙리스트는 명단에 이름을 올린 자들에게 불이익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H컨설턴트는 블랙리스트를 가지고 그들에게 불이익을 가한 적이 없으며, 그럴 계획도 없다.

그래서 타조직과 공유하지 않는 것이다.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타조직은 ‘불이익을 가해달라’는 의미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블랙리스트의 진정한 목적은 명단자들이 한서진으로부터 이득을 취하는 걸 철저히 방지하는 것, 바로 거기에 있었다.

“이해가 안 됩니다! 대체 제가 왜 떨어진 건가요? 저보다 스펙이 훨씬 못한 지원자들도 다 붙었잖습니까! 납득할 수 있게 설명을 해주세요!”

“제가 왜 떨어진 거죠? 전 어느 누구보다 열심히 일을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고요!”

“우리 회사는 채용 탈락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 게 기본 방침입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영원그룹과 H통신은 채용 과정에서 일단 H컨설턴트에 입사원서 검증 의뢰를 한다. H컨설턴트가 1차로 블랙리스트 명단자들을 걸러내고 돌려준다. 때문에 두 회사는 누가 블랙리스트인지는 알 수 없다.

인터넷 공간 등에서 한서진을 적대하고 비방하던 이들을, 한서진의 개인 회사에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것이 H컨설턴트가 블랙리스트를 관리하는 가장 큰 목적이다.

물론 그들이 다른 기업이나 관공서에 취직하는 것은 관여치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블랙리스트의 목적은 불이익을 가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한서진으로 인한 이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게 목적이니까.

가게 주인을 욕한 이를 가게 직원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 않은가. 다른 가게에 가겠다면야 신경을 안 쓰겠지만.

사실 지금까지 큰 문제는 없었다.

한서진은 국내에서 일반 소비자들을 상대로 하는 사업을 거의 펼치지 않았으니까.

블랙리스트 인물들에게는 칼라폰 개통을 안 해주고, 탈모 치료제를 안 팔면 그만이다.(사실 칼라폰에는 몇 번 그런 일이 발생했으나, 탈모 치료제에는 신기하게도 그런 일이 없었다.)

그러나 BII 개발로 SJ엔터테인먼트가 설립되자, H컨설턴트는 의견이 분분해지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앞으로에 대한 염려라고 해야 옳았다.

“블랙리스트를 BII 사용에도 적용해야 하나요? 그럼 반발이 장난 아닐 것 같은데.”

“앞으로는 BII가 지배하는 시대가 될 거라고 하잖아요. 지금까지야 영원그룹과 H통신 정도에 국한해서 적용해왔으니 문제가 없었지만, 자칫 블랙리스트의 존재가 알려질 수도 있어요. 일이 너무 커진다는 거죠. 전 그게 걱정됩니다.”

블랙리스트는 기본적으로 영구 적용을 취하고 있다. 한 번 명단에 오르면, 그게 착오 등이 아닌 이상에는 절대로 수정되지 않는다. 감경 등의 봐준다는 개념 자체가 없는 것이다.

전체 인구로 볼 때는 터무니없이 낮은 비율이지만, 절대적인 숫자로 보면 적지 않은 이들이 현재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다.

만약 BII 판매 및 사용에 있어 그들을 차별한다면, 만만치 않은 반발이 일어날 것이다. 어쩌면 블랙리스트의 존재가 알려지게 될지도 모른다.

부사장인 김범석이 단호하게 말했다.

“과한 것 아니냐는 의견이 종종 나오는데, 전혀 과하지 않습니다. 블랙리스트 명단자들이 왜 이름을 올렸는지 그 사유를 한 번 상기해 보십시오. 패륜적인 욕설, 반복적인 허위사실 유포, 지속적인 매도 같은 사유 아닙니까? 그래서 한 번 블랙리스트에 올리면 삭제해주지 않는다는 방침을 취하고 있고요.”

“…….”

“…….”

H컨설턴트 임직원들은 입을 다물었다. 김범석의 말에 반박할 거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블랙리스트는 단순히 한서진을 한두 번 욕했다고 해서 이름을 올리는 게 아니다.

―한서진 병X 고아 새끼는 왜 우리나라에는 일자리 안 만들고 엉뚱한 천조국 흑형들 엉덩이만 핥아주는 거냐?

―몰랐냐? 그놈 애비 없는 개잡놈이라서 그럼.

패륜적인 욕설을 하거나.

―한서진이가 김두박 대통령한테 특혜를 요구했는데, 대통령이 특정 기업에 혜택을 베풀 순 없다고 거절해서 보복하려고 미국에 간 거잖아. 그 바람에 우리 훌륭하신 김두박 대통령 각하께서 검찰에 그런 고초를 겪으시고 지금 형 복무 중이신 거고. 내가 몇 년째 말하고 다니는데 아직도 모르냐?

허위사실을 반복적으로 유포하며 명예를 훼손하거나.

―한서진 개X발 새X, 죽여 버리고 싶다. 진짜 돈 개같이 처벌었으면 우리같이 못사는 사람들을 위해서 뭐라고 좀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지만 한 끼에 수억 짜리 호사 음식 처먹고 살면 다냐!

지속적으로 욕을 하며 매도하거나.

이와 같은 사유가 확인되었을 때 비로소 블랙리스트 명단에 이름을 올린다.

“박사님을 욕한 이들이 박사님이 손수 심고 기른 나무에서 열린 과실을 탐내는 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 H컨설턴트의 설립 목적입니다.”

어디선가 작은 박수 소리가 들렸다. 모두 놀라서 고개를 돌려보니, 언제 들어왔는지 한지혜가 작게 손뼉을 치고 있었다.

그녀는 몹시 감동받은 얼굴로 김범석을 바라봤다.

“부사장님의 말씀 잘 들었어요. 그게 바로 제가 원하는 거예요.”

“사장님, 대체 언제…….”

김범석은 당황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지혜는 괜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안 그래도 제가 확실하게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블랙리스트에 이름 올린 사람들, 절대 봐줄 필요 없습니다. 칼라폰이고 BII고 뭐고 절대로 허용해서는 안 돼요.”

“맞습니다.”

“사람이 말을 내뱉었으면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지, 그렇지 않아요? 한씨 집안에 침을 뱉을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비비려고 한다는 게 말이 되나요?”

김범석은 가슴을 펴며 말했다.

“제가 조만간 정지원 사장님과 미팅 한 번 잡겠습니다.”

“제가 말씀 넣어 놓을게요. 아마 그분도 반대하시진 않을 거예요. 부사장님 이상으로 오빠를 끔찍이 생각하시는 분이니까.”

블랙리스트는 불이익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들이 천연덕스럽게 과실을 취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 작품 후기 ============================

타르타로스…… 그땐 꿈에도 몰랐어. 이 잠깐의 이별이 영원한 작별이 될 거라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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