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09 발명은 언제나, 뜻하지 않게 =========================================================================
“허억!”
한서진은 짧은 비명과 함께 잠에서 깼다. 폐가 터질 듯이 숨이 찼고, 온몸이 땀으로 가득했다.
창밖에는 희끄무레하게 동이 터오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6시가 조금 안 된 때였다.
그는 차분히 숨을 고르며, 조금 전 꾸었던 꿈의 기억을 더듬어 나갔다.
‘효진 씨…… 아니, 왕비가 아니었어.’
왕비 스칼린은 신효진과 동일인물이 아닐까 싶을 만큼 똑같이 닮았다. 거의 매일 보는 얼굴인데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는 신음처럼 호흡을 흘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지금까지…… 당연히 왕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몇 번이나 반복되었던 꿈.
초룡을 얻고, 이름을 지어주고, 그녀가 축하한다. 곧이어 그녀가 왕이 아닌 ‘자신’을 인식하고 속삭이듯 말을 건넨다.
레노지안은 꿈이자 거짓이라고, 이곳만이 진실이라고.
그 상황을 지켜보며, 당연히 그녀가 왕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 치의 의심도 품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 처음 인식한 얼굴, 꿈이 닫히기 직전에 본 표정은 왕비가 아니었다.
성장기를 막 시작한 앳된 소녀, 그가 모르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던 것이다.
‘불길해.’
그는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올렸다.
거의 일 년이 넘어가도록, 레노지안의 세상에 다시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과거에 이미 여러 번 봤던 장면만 간헐적인 꿈으로 겪을 뿐이다. 바로 지금처럼.
처음에는 레노지안과 거리가 벌어지는 듯해서 좋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게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동안에도, 레노지안의 세계는 점점 강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지금 레노지안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한서진은 그게 알고 싶었지만, 입구가 막힌 이상 알 도리가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지하주차장에 멈췄다.
주차장으로 나온 신효진은 원격으로 시동을 켰다. 헤드라이트에 불이 들어오며 시동이 걸렸다.
롤스로이스 신형 컨버터블. 얼마 전 송하나가 자신에게 준 선물이었다.
―언니 같은 여자가 혼자 살면서 어설프게 좋은 차 타고 다니면 오해 받아요. 이런 거 타고 다녀야 무시 안 당해요.
그 말과 함께 선물해준 롤스로이스는 10억에 조금 못 미치는, 초고가 수퍼카였다. 본래 그녀의 인생에서는 언간생심 바랄 수도 없었던 사치품.
그리고 롤스로이스를 끌고 다니면서, 그녀는 송하나가 염려했던 게 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저 여자 봐. 혼자 살면서 외제차 타고 다녀. 무슨 여대생 스폰 그런 거 아니야? 요새 그런 거 엄청 많다던데.
―얼굴 반반한 거 보면 니 말이 맞는 거 같기도. 아니면 밤에 술집을 나간다던가.
―지랄하지 마. 술집 일 해서 저런 차 탈 수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아무리 예뻐도 일반 여대생한테 8, 9억씩 하는 차와 집까지 사주면서 스폰해주는 미친 놈이 어딨냐? 그냥 집이 엄청 잘 사나 보지.
―뭐? 저 차가 8, 9억이나 한다고?
언젠가 아파트 주민들이 쑥덕거리는 걸 얼핏 들었다. 신효진은 그때에야 송하나가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좋은 집에 혼자 살면서 1억 이하의 어설프게 좋은 차를 타면 그런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런 점이 이해가 안 가기도 했고, 씁쓸하기도 했다.
신효진은 차를 몰고 서울 외곽에 있는 연구소로 향했다. 그녀의 직장이 있는 곳이다.
좋은 차를 타서 좋은 점은, 주변에서 알아서 양보를 해주고 비켜준다는 것이다. 초보 운전인 자신의 솜씨가 서툴러도 무난하게 넘어간다.
똑같은 운전 실력이어도 차에 따라서, ‘운전 더럽게 못하네’가 ‘운전 더럽게 하네’로 평가가 바뀐다. 참 재미있는 세상이다.
출근한 신효진은 자신의 자리에 앉아 책을 폈다. 요즘에는 남는 시간에 수능 공부를 하고 있었다.
대학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 송하나는 두 손을 들며 찬성과 지지의 뜻을 보였다.
“제가 좋은 과외팀을 붙여줄까요? 한국대는 몰라도 그 바로 아래 대학들은 보장할 수 있는데. 그만큼 실려 있는 팀이거든요.”
신효진은 조금 부담스러운 마음에 거절했다. 일단 자기 힘으로 닿는 데까지는 해보고 싶다고 했다.
“자력으로 공부하는 거 엄청 힘든데…… 정 안 되면 제가 기여 입학이라도 한 번 알아봐줄게요. 나중에 말만 해요.”
한서진 개인 비서라지만, 사실 그녀가 할 일은 별로 없다. 자질구레한 일은 다른 비서 동료들이 알아서 한다.
그렇다고 시기나 질투를 받는 것은 아니다. 한서진의 약혼녀인 송하나와 친구 사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다들 조심스러워하고 어려워하는 분위기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오후 2시가 되자, 한서진이 그녀를 호출했다. 그녀는 서류를 챙겨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서류는 위장이었다.
“어제 아서 왕이 드디어 초룡을 얻었어요.”
“정말요?”
신효진이 제일 먼저 꺼낸 말에 한서진은 놀란 반응을 보였다.
“네, 예전에 처음 스칼린을 만났던 여행에서 놓쳤던 바로 그 초룡이래요. 타르온이란 이름을 부여받았어요.”
“타르온…….”
한서진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의 기억에서도 선명한 이름이었다. 바로 오늘 새벽에도 그 꿈을 꾸지 않았던가.
‘그 여자는 대체 누구지? 스칼린 왕비가 아니면…….’
설마 왕에게 왕비가 두 명이었던가? 하지만 그렇게는 보이지 않았는데?
신효진은 조용히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말을 이었다.
“타르온이란 이름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대요.”
“어떤 의미입니까?”
“카드리안 가문이 신좌를 빼앗겼을 때,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운 기사의 이름이래요. 아서 왕의 먼 조상이기도 하고요. 지금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오래 전에 잊힌 전설 속의 이름이라고 하던데요.”
“그런 의미가 있었군요.”
한서진은 이름의 유례에는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신효진은 그걸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역시 모르시는구나.’
그녀는 망설였다.
그의 이야기와 그녀가 겪은 경험이 서로 모순된다. 그의 경험에서는 아서 왕이 직접 이름을 지었지만, 그녀의 꿈에서는 왕이 아닌 스칼린이 직접 지어 주었다.
그리고 스칼린, 즉 신효진은 한서진이 말해준 이야기를 토대로 무심코 이름을 지었을 뿐이다. 원래 타르온이라고 했으니까 타르온이란 이름을 말한 것이다.
당연히 이 모순을 말해줘야 한다. 그런데 왠지 자꾸만 망설여진다.
“저, 박사님. 사실은요…….”
“말씀하세요.”
“제가 이름을 지어 주었어요.”
“……네?”
“……왕가의 전통이래요. 왕이 얻은 초룡의 이름을 왕비가 짓는 거요. 그래서 제가 타르온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어요. 박사님이 초룡의 이름이 타르온이라고 하셔서…….”
“…….”
한서진의 안색이 경직되었다. 그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신효진을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가 얼굴을 가만히 숙였다.
‘효진 씨, 아니 스칼린 왕비가 이름을 지어줬다고?’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자신의 기억과는 전혀 다르지 않은가.
“분명히 그쪽에서 먼저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습니까? 효진 씨가 먼저 나선 게 아니고요?”
“네, 저는 가만히 있었어요. 그런데 아서 왕과 친부가 그게 전통이라며 자꾸 재촉했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래도 다른 이름 말고, 제가 알고 있는 본래 이름을 지어줬어요.”
저 잘했죠,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한서진은 거기에 신경 써줄 여력이 없었다.
‘왜 꿈이 서로 다른 거지?’
신효진과 자신이 꾸는 꿈의 시간대가 서로 다른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래도 당연히 동일한 사건의 흐름이 반복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오차가 있다니.
어디서부터 어긋난 것인가. 고민에 찬 한서진은 굳은 얼굴이 펴지지 않았고, 신효진은 조용히 일어나서 빠져 나왔다.
워싱턴, 퍼랩스 호텔.
콘스틴 펄 로스차일드가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체인 호텔로, 미국 대도시 위주로 영업을 하고 있다.
그리 큰 규모는 아니지만 최고급 서비스 제공을 모토로 삼고 있어, 상류층 인사들이 주로 찾는 최고 레벨의 호텔이다.
콘스틴 펄 로스차일드는 일주일째 호텔 스위트룸에서 체류 중이었다.
“이상이 우리와 확실한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는 기업의 명단입니다.”
“……규모가 생각보다 크군.”
젊은 남자가 건넨 보고서를 확인한 콘스틴의 얼굴이 바로 굳어갔다. 명단에 적힌 기업들은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미국의 주요산업에서 전통 있는 영향력을 자랑하는 업체들이었다.
“어떤 단일화된 그룹 이름으로 묶인 건 아니군. 심지어 사업이 겹치지도 않아.”
“맞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통일성이 부족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번 달러 전쟁 때, 이 기업들은 동일한 방향을 잡고 움직였습니다. 연방은행에 적대적으로 행동했죠.”
“그게 정말인가?”
콘스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동시에 가슴이 벅차게 뛰었다. 그간 미심쩍게 여겨왔던 의문, 그것의 단서를 마침내 잡은 것이다.
“틀림없습니다. 미국이 아닌 유럽 쪽에서 행동했기에 그 움직임이 크게 두드러지진 않았습니다만, 이들의 자금과 로비 흐름을 보면 FRB에 반하는 방향이었습니다.”
“겉보기에는 서로 연관이 없어 보이는 미국 기업 수십 개가, 유럽에서는 손을 잡고 함께 움직였다? 그것도 일사불란하게?”
“무언가 구심점이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 구심점은 FRB의 행보가 달갑지 않았던 것이겠죠.”
로스차일드는 FRB를 움직여 달러발행권을 휘둘렀다. 한서진을 견제하고, 그럼으로써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힘의 과시 목적은 서로 싸우자는 게 아니라, 서로가 강한 걸 인정하고 손을 잡자는 취지에서였다.
그러나 사건은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갔고, 연방은행의 실체는 속속들이 드러났다. 금 소행성이 등장하며 AU화가 새로운 기축화폐로 등장했고, 달러는 이제 미국 내 통화로만 전락하는 신세가 되었다.
연방은행, 그리고 로스차일드를 위시한 금융 가문들이 패배한 것이다.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은, 이런 대규모 전쟁이 벌어지고 패전을 했음에도,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단지 한서진의 힘이 너무 강해서, 화폐 자본이 저절로 패배해야만 했던 것일까?
그렇게 간단히 넘어가기에는 석연찮은 점이 너무 많았고, 콘스틴은 비밀리에 움직여 자세한 조사를 했다.
그리고 마침내 단서가 될지도 모르는 흔적을 잡은 것이다. 바로 이 명단에 적힌, 30개가 넘는 미국 기업들이었다.
“기업 가치를 따지면 1조 달러가 넘는군.”
“더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직 다 찾아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렇겠지.”
콘스틴은 뚫어져라 기업 이름들을 쳐다봤다.
하나같이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많은 수익을 내는 건 아니지만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미국의 산업과 과학을 지탱하는, 전통 있는 기업들이다.
만에 하나 이 기업들이 하루아침에 모두 사라진다면? 미국의 산업은 순식간에 주저앉고 말 것이다.
이 기업들이 함께 움직였다면, 그 중심점은 대체 무엇인가?
한참을 뚫어져라 보던 콘스틴은 무언가를 깨달았다.
“금융기업은 단 한 개도 없군. 심지어 그 비슷한 업무를 하는 곳조차 없어.”
“그렇군요. 그게 결정적인 단서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좀 더 파고들어 봐.”
분명히 뭔가 있다.
그것을 확신한 콘스틴은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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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걸 찾았다! 금융기업은 단 한 개도 없군!”
“왜냐하면 카를린 로스차일드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