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08 그리고 일상 =========================================================================
스칼린의 삶은 완벽하다.
유서 깊은 가문의 혈통을 타고 난 강인한 여기사로, 대륙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미모까지 갖추었다. 여행 도중 멋지고 강한 기사를 만나 운명 같은 사랑에 빠졌는데, 그는 바로 대륙의 유일 군주인 아서 왕이었다.
둘은 손을 잡고 왕성으로 돌아와 대륙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식을 올렸고, 인자함과 공정함으로 세상을 다스렸다.
비록 아직 아이는 없지만, 젊디젊은 나이를 생각하면 그리 중요한 건 아니었다.
가문, 운명, 남편, 힘, 미모, 행복, 명예, 사랑.
모든 것을 갖춘 스칼린의 인생은 한여름의 태양처럼 눈이 부시고 찬란했다.
“왕비 전하, 폐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조금 전 외곽 경비대에서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지금 왕성으로 향하시는 중이라고 하십니다.”
“그게 정말이더냐?”
왕실 전용 연무장에서 홀로 검술을 연습하고 있던 스칼린은 시녀장의 보고에 뛸 듯이 기뻐했다.
왕이 왕성을 떠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초룡을 찾아 떠난 여행이었다.
처음 자신과 만났을 때를 포함하면, 그녀가 본 것만 벌써 6번째 여행이었다. 저번까지는 자신도 함께 여행을 떠났지만, 왕실을 너무 오래 비워두는 것은 좋지 않다는 신하들의 간곡한 청 때문에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남았다.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스칼린은 왕의 직무를 대리하면서 매일 그리운 마음을 달랬다. 결혼하고 나서, 아니 첫 만남 이후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몹시 빨리 돌아오셨구나. 혹, 초룡의 단서를 찾은 것은 아니실까?”
“기뻐하소서, 왕비 전하. 폐하께서 마침내 초룡을 얻으셨습니다.”
“그게 정말이냐?”
스칼린은 자신의 일처럼 크게 기뻐했다. 아니, 부부는 일심동체니까 자신의 일이나 마찬가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랑하는 반려가 마침내 필생의 숙원 중 하나를 성취한 게 너무 기뻤고, 더 이상 초룡을 얻으러 여행을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또 한 번 기뻤다.
스칼린은 땀에 젖은 몸을 대강 씻고, 옷도 새 걸로 갈아입기만 한 채 뛰쳐나갔다. 치장을 할 겨를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그를 만나보고 싶었다.
왕성 문을 나서자 무수히 많은 백성들이 몰려 나와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스칼린이 모습을 드러내자 백성들은 레노지안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찬양했다.
세상이 떠나갈 듯한 만세 소리 속에서, 스칼린은 저 멀리 커다란 게 날아오는 게 보였다.
비행체의 형체가 점점 커졌다. 그것은 황금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용이었다.
용의 머리에는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 아서가 늠름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용의 좌우에는 근위기사단이 용을 탄 채 호위하듯 함께 날고 있었다.
직접 비교하며 본 초룡의 몸집은 무척 컸다. 근위기사단이 거느린 용, 그 커다란 몸체가 터무니없이 작게 느껴질 정도였다.
광장 위로 초룡이 느리게 비산하다가 완전히 허공에 멈추자, 거대한 날개가 펄럭이며 만들어내는 바람에 백성들을 쓰러뜨릴 듯이 압박했다. 그럼에도 백성들은 기뻐하며 환호했다.
수백 여 미터가 넘는 높이에서 왕은 가볍게 바닥으로 뛰어내리며 착지했다.
스칼린은 밝은 미소를 띤 채 왕에게 다가갔다. 왕은 다정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초룡을 얻었소.”
“축하해요, 리온. 드디어 숙원을 성취했군요.”
“아니, 이제 겨우 한 걸음을 떼어놓은 거요. 신좌를 탈환하기 전까지 카드리안은 절대 멈추지 않을 거요.”
왕과 왕비는 다정히 손을 잡은 채, 하늘에서 날개를 펄럭이는 초룡을 올려다보았다. 태양마저 가리는 크기는 보면 볼수록 신비하고 장엄했다.
“정말 멋져요.”
“그거 아시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놓쳤던 바로 그 초룡이라오.”
“그게 정말인가요? 어떻게 그런 우연이…….”
“더 놀라운 게 뭔지 아시오? 이 녀석은 아직 성장기에 있다고 하오.”
스칼린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놀랐다.
“그럼 저기서 더 커진단 말인가요?”
“옛 기록에 따르면 가장 거대했던 초룡은 몸집만으로 대도시를 능가하는 크기였다고 하오.”
스칼린은 감탄을 금치 못하며 초룡의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몸집만 해도 수백 미터는 족히 될 듯한 지금만 해도 엄청난데, 저기서 더 성장한다고? 과거에는 그보다 훨씬 더 큰 개체도 존재했었다고?
“아, 맞아요. 이름은 지어주었나요?”
“물론 짓지 않았소.”
“네?”
당연하다는 듯한 왕의 말투에 스칼린은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왕은 크게 웃으며 그녀의 두 손을 감싸 쥐었다.
“레노지안 왕가에서 초룡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왕비 고유의 권한이자 전통이오. 당연히 그대가 이름을 지어줘야 하지 않겠소?”
―찌이잉.
가벼운 떨림이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짧게 머리를 강타한 괴리감에 그녀는 잠시 굳었다.
‘잠깐만?’
그녀는 ‘현실’에서 한서진과 ‘꿈’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그래서 서로가 겪는 꿈에 몇 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차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그녀는 한서진이 들여다봤던, 아서 왕의 기억을 몇 번도 넘게 반복해서 들었다. 그래, 분명히…….
‘초룡의 이름을 지어주는 게…… 왕비의 고유 권한이라고? 전통?’
한서진이 들려준 이야기는 그것과 전혀 달랐다. 초룡의 이름은 왕이 직접 지었다고 했는데?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왕이 재촉했다.
“어서 이름을 지어 주시오.”
“어, 음. 그게…….”
스칼린은 당황해서 더듬거렸다.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이래도 되는 건지, 아무 문제는 없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어느덧 사방이 고요해졌다. 왕은 물론이고 수행을 따라나선 수백의 신하, 그리고 일정 거리를 두고 몰려든 무수한 백성들까지 자신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 부담감을 이기지 못한 그녀는 반사적으로 내뱉었다.
“타르온, 타르온이라고 하겠어요.”
“타르온?”
순간 왕이 흠칫하며 놀랐다. 뿐만 아니라 가까이에 공손히 서 있던 왕실 수석마도사, 친부마저도 당황해서 얼굴을 들었다.
다른 신하들만 연유를 모르는 듯 자기들끼리 웅성거리며 쑥덕거렸다. 타르온이란 이름에 놀란 건 오직 왕과 친부뿐이었다.
왕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이름을…… 어찌 아시오?”
“네? 그, 그냥 생각나는 대로 지은 것뿐인데요. 왜 그러시나요, 리온?”
스칼린은 조금 당황해서 버벅거렸다. 타르온이란 이름에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라.”
왕은 뭔가를 고심하듯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조금 여유를 되찾은 친부가 웃음을 띠며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왕비 전하께서 무심코 지어주신 이름이 하필 그 이름이라니, 참으로 믿어지지 않는 우연입니다. 이것이 운명이 아닌가 싶습니다, 폐하.”
“운명…… 그런가. 이게 운명인가.”
“리온…… 대체 왜 그래요? 타르온이란 이름에 무슨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나요?”
왕은 비로소 옅은 웃음을 지으며 스칼린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거렸다.
“타르온은 오래 전에 잊혀진, 그대가 전혀 알 리 없는 이름이오. 그래서 놀랐던 거요.”
“어떤 이름인데요?”
“카드리안이 신좌를 빼앗겼을 때,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웠던 분이 계셨소. 가문 최고의 용사는 아니지만, 최후까지 용맹하게 싸우다가 전사하신 분이지. 그 분의 이름이 바로 타르온이오.”
“…….”
“지금은 아는 이가 거의 없는, 오래 전에 잊혀진 고대의 전설이오. 참 기막힌 우연이지 않소? 그대가 우연히 지어준 이름이 하필 그분의 이름이니, 나와 장인이 놀랐던 거요.”
친부도 웃으면서 거들었다.
“이런 게 운명인가 봅니다. 아마 위대한 기사 타르온처럼 용맹해지라는 운명의 안배가 아닐런지요. 폐하, 부디 초룡에게 그 이름을 부여하소서.”
왕은 고개를 들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초룡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위엄 있게 선언했다.
“나의 영원한 전우여, 이제부터 그대의 이름은 타르온이라고 하겠노라.”
이름을 받고 기쁜 것일까. 그에 화답을 하듯 초룡은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거센 바람을 일으켰다.
스칼린은 마치 한 편의 영화와도 같이 장엄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속으로 가만히 중얼거렸다.
‘타르온…… 난 그저 서진 씨한테 들은 대로 말했을 뿐인데.’
―초룡을 취하신 것을 축하드리옵니다, 폐하.
왕이 끄덕이며, 노신하를 지나친다.
많은 기사와 병사들이 모인 군진의 외곽, 한 인물이 홀로 조용히 서 있다. 붉은 머리카락, 그러나 잘 보이지 않는 얼굴.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신비한 느낌이 아스라이 풍긴다. 인식의 범위가 닫힌 듯 여자의 얼굴만이 보이지 않는다.
―초룡을 얻으셨군요. 이름은 무어라고 지으실 생각이신가요?
―타르온, 타르온이라 하겠소.
―멋진 이름입니다, 폐하.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무척 아름다울 듯한 여자.
왕이 그녀의 얼굴을 당겨 품에 안는 순간, 문득 여자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 목소리는 홀로 이질적으로 들렸다.
―어찌하여 이곳에 다시 오셨습니까.
왕은 그 말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것은 ‘왕’이 아닌,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으니까.
―나의 왕이시여. 이곳의 모든 것은 꿈이자 거짓이며, 그곳만이 진실입니다.
왕은 여자의 속삭임을 듣지 못했다.
여자가 다시 말했다.
―모두가 그대를 속이더라도, 그것을 잊지 마세요.
이미 몇 번이나 반복해서 꾸었던 꿈이다.
몇 번이고 겪었던 장면이다.
그래서 한서진은 이어지는 장면도 예상할 수 있었다.
‘이제 끝이구나.’
곧 막이 끝난 무대에 커튼이 내리듯, 암막이 사방을 뒤덮으리라. 모든 소리가 멀어지고, 풍경이 어두워지며, 자신은 꿈의 세상에서 밀려나올 것이다.
그리고 눈을 뜨면 자신의 침실이거나, 혹은 연구실에 잠들어 있는 걸 깨닫겠지.
‘……어?’
그러나 오늘은 뭔가 달랐다.
몇 번이나 반복되었던 지난 꿈들과 조금 달랐다. 왕비로 생각되는 여자가 의미심장한 말을 속삭였음에도, 아직 꿈의 세상이 닫히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세상의 모든 것이 멈춰 있었다.
시간의 흐름이 얼어붙은 그 순간, 오로지 여자만이 그 구속에서 자유로운 듯이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여자가 서서히 얼굴을 들어, ‘이쪽’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여자의 눈은 왕이 아닌, 한서진의 망막을 또렷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왕이시여.”
여자가 말했다.
그 음성은 꿈결의 일부분 같았던 아까와는 전혀 달랐다. 마치 진짜 현실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왕, 아니 ‘한서진’은 필사적으로 팔을 움직였다.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한 몸을 억지로 움직이자, 그 통제에 저항하듯 강한 반발력이 밀어닥쳤다.
마치 온몸이 찢어발기는 듯한 통증이 덮쳤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참으며, 여자의 얼굴을 만졌다.
“마지막 명을 듣지 않을 걸 그랬습니다.”
여자의 볼을 따라 톡, 하고 눈물이 흘렀다.
한서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여자의 뺨을 감싼 채로 굳어 있기만 했다.
“원망스럽습니다. 어찌하여 저를 당신의 세상에 남겨주시지 않았나요.”
여자를 제외한, 풍경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멀어지듯이 희미하게 울린다. 동시에 그녀의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그곳은…… 여전히 아름다운가요?
그녀는 왕비가 아니었다.
============================ 작품 후기 ============================
“여기는 불반도, 그렇진 않은 것 같다. 오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