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07 그리고 일상 =========================================================================
63빌딩, 스카이아트.
한강의 절경과 서울 한복판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아찔한 높이를 발아래 두고 있으면, 마치 하늘을 걷고 있는 듯한 묘한 짜릿함이 느껴진다.
김주원은 수트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로, 유유자적하게 흘러가는 한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면에 반사되는 햇빛의 광택이 제법 어여쁘다.
그 바로 옆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리는 수많은 자동차들의 행렬이 묘한 매칭을 이룬다. 세월의 흐름을 담은 강과 바쁜 현대를 상징하듯 끝이 없는 자동차의 행렬, 김주원은 그 기묘한 배치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저, 혹시 김주원 씨 되시나요?”
가늘고 고운 여성의 목소리가 그를 일깨웠다. 김주원은 그제야 몸을 돌렸다.
“네, 제가 김주원입니다.”
대답을 하면서, 김주원의 시선은 눈앞의 여성을 빠르게 캐치했다.
일단 예쁘고 늘씬하다. 그리고 단아하다.
부드러운 조화를 이룬 이목구비는 인위적인 느낌이 조금도 묻어나지 않는다. 만약 저것이 성형시술의 결과라면, 그 의사는 다시없을 걸출한 명의이리라.
무릎에서 살짝 위를 덮는 검은 원피스와 와인색 재킷은 심플하면서도 우아한 배치를 빚어냈다.
적당한 힐의 굽이 늘씬한 각선미를 돋보여주고, 한 듯 만 듯한 자연스러운 화장은 깊은 산의 샘물처럼 청초한 느낌을 살려냈다.
김주원의 눈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는 한쪽 테이블의 의자를 빼며 권했다.
“여기 앉으시겠어요?”
“감사합니다.”
여자, 한지혜는 눈웃음을 건네며 자리에 앉았다. 재킷을 벗자 좁고 얇은 어깨선이 드러났다. 희고 긴 목에서부터 아래로 떨어지는 부드러운 곡선은 천상 여자 그 자체였다.
“솔직히 조금 전에 절 부르셨을 땐 많이 놀랐습니다. 제 기대하고는 너무 달랐거든요.”
“어떤 의미로요?”
“아시면서 일부러 확인하시는 건 아니죠?”
“어머, 정말 몰라서 묻는 건데요. 하나가 제 이야기를 대체 어떻게 하던가요?”
“그냥…… 제 예상보다 훨씬 제 스타일이셔서 놀랐습니다. 사실 큰 기대는 안 하고 나왔습니다.”
한지혜는 입을 가리며 웃었다.
“저도 조금 놀랐어요. 근사한 호텔 레스토랑에서 뵐 줄 알았거든요. 한강 주변에 전망 괜찮은 레스토랑 많잖아요.”
“평범한 카페라서 실망하셨나 봅니다.”
“오히려 신기했어요. 63빌딩 스카이아트 카페에서 선을 보는 사람은 우리 둘 밖에 없을 걸요.”
“선이라고 하니까 어색합니다. 그냥 소개팅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네, 그래요. 그럼.”
거의 기대를 않고 나왔던 김주원은 눈앞의 여자가 몹시 마음에 들었다.
일단 미인인 것을 떠나서 이미지가 차분하고 단아하다. 천상 선녀라는 느낌이 이럴까.
두 살 연상이라고 들었는데, 얼굴이나 피부톤을 보면 스물 초반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전체적으로 차분한 분위기와 입고 있는 옷 스타일 덕분에 성숙해 보일 뿐.
만약 청바지 스키니진에 박스티를 입고, 야구 모자를 쓴다면 영락없는 대학 신입생으로 봤을 것이다.
고급 호텔 레스토랑이 아닌, 평범한 카페인데도 실망한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 상황이 신기하고, 즐기고 있는 듯하다. 그 점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대화가 이뤄졌다.
“아직 학생이시라고 들었습니다.”
“네, 한 학기만 다니고 오래 휴학했었거든요. 집안 사정 때문에 몇 년 동안 일을 했었죠.”
“아…… 그러셨나요.”
“다행히 근래에 집안 사정이 괜찮아져서 다시 입학했어요. 주원 씨는 미국에서 대학을 나오셨다고 하셨나요?”
“예, 조기졸업했습니다.”
“어머, 정말 대단하세요. 머리가 엄청 좋으신가 봐요. 전 머리 좋은 사람이 부럽던데.”
“그냥 운이 좋았습니다. 사실 어려서부터 일찍 나만의 일을 하고 싶어 했거든요. 대학은 통과점,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죠.”
김주원은 보면 볼수록 그녀의 눈빛에 빠져들었다.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차분하고 단아한 첫인상이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하나한테 듣기로, 주원 씨는 패션 사업을 하신다고……?”
“아, 예. 작은 백화점 하나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백화점이요?”
한지혜의 표정이 잠시 떨떠름해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김주원은 살짝 의아했다. 백화점이라는 말에 왜 저런 반응을 보일까.
그녀는 곧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대단하세요. 저보다 어리시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젊으신 나이에 벌써 거기까지 이루신 건가요?”
“백화점이라고 해봤자 지점이 서울에 세 개 밖에 없는 조그마한 백화점입니다. 아마 들으셔도 잘 모르시는 이름일 겁니다.”
“그래도 대단하세요. 진짜 어떻게 하신 거예요?”
“대학을 다니면서 사내벤처를 차렸었습니다. 다행히 이 년도 안 돼서 회사가 급성장을 했고, 그걸 매각하면서 적당한 기본 자본을 만들 수 있었죠. 그 돈으로 경영권을 확보할 수 있었죠.”
“어머, 그럼 그 벤처를 계속 했으면 더 잘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사실은 제가 패션 유통에 관심이 많습니다. 어렸을 때 꿈은 패션 디자이너였어요.”
“그럼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하지만 백화점은 조금 노선이 다르지 않나요?”
“대신 다양하고 많은 종류의 의류매장을 취급할 수 있죠. 나중에는 LVMH 같은 거대한 종합패션 브랜드를 구축하는 게 꿈입니다. 그래서 백화점 경영 외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패션 디자인도 따로 하고 있습니다.”
한 모금도 안 댄 커피가 식어가는 것도 모른 채, 두 사람은 대화에 집중했다.
아카식 블레이드가 태평양을 넘어오는 동안, 한서진은 제주도 남쪽 해역에 떠 있는 초대형 특수 연구선박에서 오리할콘 뼈 연구에 한창이었다.
현존하는 어떤 첨단 장비로도 내부 스캔이 불가능했기에, 기존 연구는 전자 현미경으로 표면의 입자 구조를 관찰하는 선에서 그쳤다.
하지만 에테르를 이용하면 다르다.
‘역시 일반 오리할콘이 아냐. 합금 오리할콘이라고 하는 게 차라리 맞겠네.’
모니터에 출력된 수치를 한참 동안 판독한 뒤 한서진은 결론을 내렸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니면 성장하면서 온몸의 뼈가 합금 오리할콘으로 변해가는 건가.’
‘기본’ 오리할콘은 강도가 절대적인 정도는 아니다. 인간의 기술력으로 절삭이나 해체가 가능하다.
하지만 초룡의 뼈를 구성한 합금 오리할콘은 작은 부스러기를 떼어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 어떤 절삭기를 사용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 정도면 웬만한 고폭탄에 직격당해도 끄떡도 없겠네.’
타르타로스 2가 에테르 스캔을 통해 예측한 시뮬레이션 결과는 대단했다. 합금 오리할콘으로 전쟁 무기를 만든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상상만 해도 모골이 송연했다.
“한 박사, 어떻소?”
니트론이 다가와서 궁금한 듯이 물었다. 한서진은 키보드에서 잠시 손을 떼고 대답했다.
“내부 구조 스캐닝은 어느 정도 완료되었습니다.”
“오오, 정말이오? 어떤 스캐닝 장비도 내부 투시가 불가능했는데.”
“에테르 스캐닝은 전혀 원리가 다르지요. 입자 그 자체에 간섭할 수 있는 힘이니까요.”
“역시 에테르는 우주의 근원이 맞는 것 같소. 제5의 힘이 아니라 제0의 힘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아요. 안 그래요?”
“틀린 의견은 아닌 것 같군요.”
한서진은 피식거리며 니트론이 모니터를 자세히 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는 연신 감탄을 흘리며, 정신없이 판독 수치를 감상했다.
특히 그는 합금 오리할콘 뼈가 가지는 구체적인 스펙 시뮬레이션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데이터가 사실이라면…… 합금 오리할콘은 그 어떤 것도 견줄 수 없는 최고의 금속이군요.”
“하지만 결정적인 단점이 있죠. 현재로서는 제조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당장은 그렇지만 훗날에는 다르겠지요. 양산에 성공할 수만 있다면 세계 산업 시장이 또 한 번 뒤바뀔 겁니다. 반도체 시장이 그러했듯, 철강 산업도 뒤집어지고 말 거요.”
니트론은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한 박사는 지금도 나라 하나를 거뜬히 살 수 있는 부자인데, 대체 얼마나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지 상상이 안 가오. 아니지, 금 소행성까지 포함하면 나라 몇 개는 거뜬히 사고도 남겠군. 그렇지 않소?”
한서진은 대답 대신 멋쩍은 웃음만 흘리며 일어섰다. 잠시 바람을 쐬며 커피 한 잔을 즐길 생각이었다.
그때 니트론이 책상 한쪽에 어지럽게 널린 헬멧류 기기를 발견했다. 그는 의아해서 집어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이건 뇌파 측정 장치 같은데…… 왜 한 박사 책상에 이런 게 있는 거요?”
“아, 요 근래 인터페이스가 불편하다고 느껴서 저만의 인터페이스를 세팅해 보려고 합니다.”
“인터페이스?”
“전산 데이터 입출력을 하다 보면 키보드 방식은 아무래도 느리고 불편하더군요. 그래서 뇌파를 이용한 입출력 방식 장치를 도입해보려고요.”
“오호? 그건 아직 관련 연구센터에서도 개발 초기 단계일 텐데…….”
니트론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뇌파를 통한 데이터 입출력 방식은 미국에서도 연구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실용화는 갈 길이 멀다.
그런데 한서진은 전문 분야도 아니면서, 마치 식칼 하나를 만드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좋은 단서를 잡아서요. 어쩌면 근시일 안에 가능할 것 같기도 해서 틈나는 대로 연구 중입니다. 만약 인터페이스가 완성된다면 합금 오리할콘 뼈나 아카식 블레이드 연구 속도에도 몇 배 이상으로 탄력이 붙을지 모릅니다.”
“그거 엄청난 이야기로군요.”
한서진이 대단한 성능의 수퍼컴퓨터를 갖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방대한 관측 데이터를 분석해서 한 번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재난을 예고하는 SJ사이트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가 가진 수퍼컴퓨터의 이름도, 정확한 성능도 알려진 바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Z7을 훨씬 상회하는 성능인 것은 틀림이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니트론은 그 수퍼컴퓨터, 타르타로스의 존재를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한서진의 구상이 완성되면 얼마나 큰 시너지 효과를 낳을지 예상이 되었다.
타르타로스를 좀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다루기 위한 입출력 인터페이스가 세팅된다면, 연구 속도에 얼마나 가속력이 붙을까.
“그것 역시 에테르를 이용한 방식이오?”
“에테르로 육체에 일어나는 모든 화학 반응을 스캔하고, 그것을 데이터로 전환시킵니다. 그리고 타르타로스로 그 화학 반응의 패턴을 분석해서 의미 있는 상호견련성을 해독해내는 거죠. 그걸 응용한 원리입니다.”
“음…… 만약에 모든 화학 반응에 담긴 정보와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상상이 가질 않는군.”
“일단 뇌파 입출력 방식은 실현 가능해지겠죠. 제가 당장 원하는 것도 그거입니다만.”
니트론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풀썩 웃었다.
“뇌파 입출력 인터페이스도 대단한 거지만, 세기의 대발견이 될 위대한 업적을 너무 하찮게 여기는 거 아니오? 한 박사의 말대로라면 의학은 어마어마한 발전을 이루게 될 텐데. 난 그렇게 확신합니다.”
“에이, 오히려 시시껄렁한 분야에서 먼저 쓰이게 될 수도 있는 거죠.”
한서진은 대수롭지 않게 웃어 넘겼다.
「어땠어요, 언니?」
“진짜 괜찮던데? 자수성가에다가 꿈과 비전도 명확해. 머리도 좋고 능력도 있고.”
「그리고 잘생겼죠. 키도 크고.」
“진짜 대박이지. 근데 주원 씨는 뭐래? 너한테 아무 말 안 하디?”
「모르겠어요. 아직 연락이 없네요.」
“아씨, 저녁 괜히 안 비우고 싹싹 다 먹었나? 얘기 너무 오래 하느라 배가 고파서 그만 다 처먹었는데.”
「그 오빠가 원래 매너가 너무 좋은 사람이라…… 일단 내일까지 연락 안 오면 제가 한 번 물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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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껄렁한 분야 = V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