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06 그리고 일상 =========================================================================
토요일 오전, 1층 홀로 내려온 한서진은 분주하게 서두르는 한지혜를 발견했다. 그는 입에 대고 있던 건강음료 잔을 떼면서 물었다.
“데이트라도 가냐? 왜 이렇게 어수선해?”
“친구랑 같이 전시회 가. 내일이 마지막이거든.”
무슨 전시회? 한서진은 살짝 의아했으나 더 묻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그럼 늦겠네. 알았어, 잘 다녀와라.”
“그래서 말인데, 오빠…….”
갑자기 한지혜가 배시시 웃으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한서진은 팔짱을 끼며 눈살을 찌푸렸다.
“달팽이관 썩으려고 하니까 목소리 간지럽게 하지 말고 평소처럼 말해. 뭐가 필요한대?”
“나 오빠 차 좀 하나만 빌리면 안 돼?”
“깨끗하게 쓰고 갔다 놔.”
“헐, 내가 무슨 차를 빌릴 줄 알고?”
“아무거나 갖다 써.”
“와! 오빠 짱!”
한지혜는 엄지손가락을 척 세워 보이고는 신이 나서 원목 테이블로 달려갔다. 5단으로 된 테이블 서랍을 전부 열자 그 안에 담긴, 수십 개가 훌쩍 넘는 차 키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랍 바닥에 깔린 고급 천에 가지런히 정렬된 차 키들이 영롱한 금속 빛을 반짝거렸다. 어떤 것을 고를지 즐거운 고민에 빠진 한지혜는 그저 신이 났다.
“결정했어! 이걸 탈 거야!”
한지혜가 차 키를 집어 들며 좋아하자 한서진은 흘끔 쳐다보고는 말했다.
“그거 살살 밟아라. 잘못 밟으면 사고 난다.”
“걱정하지 마. 내 운전 실력 몰라?”
“한정판이니까 조심하고. 세상에 딱 9대 밖에 없는 거야.”
조수혁은 자동차 매니아였다. 비록 장롱 면허지만.
대학교 들어오자마자 면허를 땄지만, 운전을 할 기회가 없었다. 이제 스무 살인 그에게 자동차는 국산이라 해도 너무 비쌌고, 아버지는 절대로 차를 빌려주지 않았다.
‘니 면허 어디를 믿고?’
조수혁은 억울했다. 운전도 자꾸 해봐야 늘지, 처음부터 운전을 잘하는 사람이 어딨느냔 말이다.
하여간 차를 좋아하는 그에게 모터쇼는 즐거운 행사였다. 비록 차를 살 돈은 없지만, 중학생 때부터 꼬박꼬박 참석해왔다.
언젠가는 전시회에 나온 차를 살 수 있으리라고 큰 꿈을 품고, 오늘도 그는 기대했던 전시회장을 찾았다.
모터쇼는 10일 동안 열렸지만 그는 개최일을 포함해서 4일 동안 전시회장을 찾았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제 다음 전시회는 2년 뒤네. 내년에는 그냥 눈 딱 감고 부산 내려가? 근데 잠은 어디에서 자지?’
모터쇼 마지막 날, 조수혁은 반쯤 섭섭한 마음을 안은 채 눈에 불을 켜고 전시회장을 돌아다녔다.
늘씬하게 잘 빠진 레이싱걸들이 자동차 옆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지만, 레이싱걸들은 그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자동차, 그것만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뿐이었다.
마지막 날이다 보니 그는 전시회가 열리자마자 입장해서 더욱 열의를 불태우며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느꼈다.
‘왜 이렇게 사람이 적지?’
뭔가 이상했다. 마지막 날인 것 치고는 관람객이 비교적 적었던 것이다.
“야, 이상하게 사람 적지 않냐? 오늘 마지막 날인데?”
“그러게. 뭐 사람 적으니 편해서 좋긴 하다. 어제는 정말 전시장이 폭발할 것처럼 많았잖아.”
“마지막 날인데 왜 이렇게 안 왔지?”
그는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관람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배가 고파져서 친구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식당가로 이동 중 그는 저 멀리 주차장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려 있었던 것이다.
“뭐야? 왜 저기만 사람들이 저리 많아?”
“왜 이렇게 사람이 적다 했더니 저기에 다 몰려 있었구만.”
“연예인이라도 왔나? 그래서 전시장 내부에 사람이 그렇게 적었나?”
농담이 아니라 몇 백 명 수준이 아니라, 천 명 단위를 훌쩍 넘길 듯한 숫자였다.
조수혁은 친구와 함께 인파를 헤치고 다가갔다. 뭐 때문에 사람들이 이리 몰려 있는지 궁금했다.
‘연예인은 아닌 것 같은데…….’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낑낑거리면서 마침내 중앙까지 파고 든 조수혁은 입을 쩍 벌리며 놀라고 말았다.
아무 말도 못하고 굳어 있는 사이, 옆에서 친구가 호들갑을 떨었다.
“와, 저게 뭐냐? 무슨 차가 미래 영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네. 무슨 모델인지 알아?”
“페라리 Z 스카이…….”
“페라리인 건 나도 알겠어. 저건 얼마나 하는 거냐?”
“……저건 돈 주고도 못 사.”
석상처럼 굳어 있던 조수혁은 꿈에서 깨어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거 판매가가 400만 달러가 넘어. 우리 돈으로 40억이 넘는 차량이라고.”
“4, 40억이라고? 아무리 수퍼카라지만, 차 한 대에?”
“40억이 있어도 못 사. 딱 9대만 한정 생산했거든. 진짜 왕족들만 타고 다니는 차라고.”
조수혁은 반사적으로 말을 내뱉으면서도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에 저 모델이 들어왔던가? 혹시 모방해서 제작한 레플리카는 아닐까?
하지만 아무리 뜯어봐도 레플리카 특유의 부실한 마감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날렵한 붉은색 곡선이 뿜어내는 광택은 진짜만이 가질 수 있는 고급스러움을 품고 있었다.
조수혁은 왜 여기에 사람들이 몰려 있는지 이해했다.
전시회장에 있는 가장 비싼 차라고 해봤자, 이 페라리의 타이어 한 대 값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딱 9대만 생산된, 그야말로 로열 중의 로열 클래스.
모델이 아닌 차를 보기 위해 참석한 관람객이라면 이곳에 끌릴 수밖에 없었으리라.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차 찾느라고 한참 걸렸어. 근데 알고 보니 사람들한테 가려서 안 보였지 뭐야.”
“얼마나 사람이 많이 왔길래…… 무슨 전시회였는데?”
“서울모터쇼. 자동차 박람회.”
한서진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을 흘렸다.
“거길 뭐 볼 게 있다고 가? 우리집 주차장보다 차가 더 적을 텐데. 볼 거 하나도 없을 걸.”
“전시회니까 두루두루 보러 가는 거지 꼭 차만 보러 가? 모델 구경도 하고 사람 구경도 하고, 그러는 거지. 그리고 친구랑 같이 놀기도 하고.”
“그런 곳에 페라리 한정판 끌고 가는 건 주최측에 민폐야. 다음부턴 매너 좀 지켜.”
한서진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그 후 한동안 모터쇼 관련 기사에 초한정판 페라리를 타고 온 정체불명의 미녀에 관해 온갖 썰이 올라왔지만, 그가 접하게 되는 일은 없었다.
국내에 있는 북한 난민의 수만 천만 명이 넘는다.
그 외 나머지 난민들은 일본과 미국에 마련된 임시 보호소에서 지내고 있었다. 한국으로서는 그 숫자를 감당하는 것만 해도 버거웠기 때문이었다.
일본에 체류하는 난민들은 당시 미국 클레튼 정부의 중재로 이뤄진 일이었다. 거리가 가깝고 당장 쓸 수 있는 보호시설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내에 있는 천만 난민은 특별히 재사회화 교육을 받지도 못한 채 식량과 생필품만을 배급받으며 하루하루 살아가기만 할 따름이었다.
북한 난민 문제는 사회적으로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잉태한 거나 마찬가지였고, 정부로서도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었다.
“북한에 신도시 여럿을 개발해 난민들을 정착시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즉시 도시 개발 사업을 시작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럴 만한 여력이 안 되잖습니까? 지금 국내 건설사들은 모조리 H팰리스 공사에만 매달리고 있어요.”
“그렇다고 언제까지 임시 보호소에서 지내게 할 수만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재사회 교육도 해야 하고, 정착도 시켜야 합니다. 임시 보호소에서는 사회 정착 교육도 힘듭니다. 도저히 여건이 안 돼요.”
“누가 그걸 몰라서 안 합니까? 인력이 없어요, 인력이.”
돈은 넘쳐나도록 있지만, 사람 손이 모자란다. 도시 개발을 주도해줘야 할 건설사들은 H그룹에서 발주한 일감도 제대로 하지 못해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도시 여러 개를 만든다? 인력이 모이질 않을 것이다.
심지어 H그룹은 공사비용을 넉넉하게 챙겨주고, 급행료까지 따로 지급하고 있었다. 그 단가를 맞춰주는 것은 행정부 입장에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낭비였다.
“일본도 문제예요. 가뜩이나 사이 안 좋은데, 일본에 있는 난민들을 당장 우리나라에 보내겠다고 하면 타격이 큽니다. 그 많은 인원을 다 어디에서 재우고, 보호합니까?”
“…….”
누군가가 꺼낸 말에 상상도 하기 싫은지 관료들은 이마를 지그시 눌렀다.
“아무튼 언제까지나 이대로 둘 수는 없어요. 건설사나 교육 인력은 따로 알아보는 한이 있더라도, 북한 신도시 개발을 당장 시작해야 합니다. 이러다가 허송세월만 낭비하고 끝날 판입니다.”
회의 분위기는 일단 정부 주도의 북한 개발을 개시하는 것으로 모이고 있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밀어붙이자는 걸로.
3조 달러만큼 쌓여 있는 북한 개발 기금도 이참에 적절히 소모를 해줘야 했다. 물론 지금은 AU화로 환전한 지 오래지만.
“정부에서 본격적으로 북한 개발을 시작할 모양입니다. 어제 장관 주도 회의에서 여러 안건이 오갔습니다. 대통령에게도 이미 보고가 들어갔고요.”
김범석의 보고에 한지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그런 쪽은 잘 모르지만, 아무튼 큰돈이 들어가는 국책사업이 이제 시작된다는 거네요.”
“그렇지요. 그리고 그 돈은 대부분 박사님께서 출자하신 자금이고요.”
“그럼 TF팀과 H컨설턴트가 엄청 바빠지겠네요.”
TF팀은 본래 송하나가 국채 조달 자금이 누수되지 않도록 감시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었다. 그리고 H컨설턴트는 한씨 가문의 명예가 손상되지 않도록 감시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기 위해 한지혜가 만든 회사였다.
한서진을 위해 일한다는 목적은 동일하다 보니, 그리고 두 조직의 오너가 장차 시누이와 새언니가 될 사이다 보니, TF팀과 H컨설턴트는 거의 한 몸처럼 같이 일할 때가 많았다.
정보도 대부분 공유하는 편이고, 업무 협조도 자주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다.
“H그룹에서 주관하는 건설사업에서도 배째라 식으로 나오는 기업들이 종종 있었어요. 하물며 정부가 주도하는 국책 사업이면 더 하겠죠.”
“아예 관료측에서 누수시키는 자금도 상당할 겁니다. 그런 일이 없도록 철저히 감시해야겠죠.”
“초기 단계부터 제대로 밀착 감시해서 아예 그런 생각을 못 먹도록 만들어야 해요. 그게 다 누구 돈인데.”
한지혜는 주먹을 불끈 쥐며 결의를 드러냈다.
보고가 끝나고 김범석이 나가자 여태껏 조용히 있던 송하나가 문득 물었다.
“근데 언니, 언니는 연애 안 해요?”
“나? 연애?”
느닷없는 화제 전환에 한지혜는 조금 당황해서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나와?”
“언니 한창 연애할 나이인데 너무 혼자 지내시는 것 같아서요. 혹시…….”
“아, 준석 오빠 이야기는 하지도 마. 잊은 지가 언젠데.”
“그럼 제가 한 분 소개해드릴까요? 잘생기고 키도 크고 집안도 괜찮고 공부도 잘해요. 언니랑 잘 어울리실 것 같아서.”
“정말?”
“근데 언니보다 두 살 어린 게 흠이긴 한데…….”
한지혜는 송하나의 두 손을 꼭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
“괜찮아. 나 연하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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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혜가 한 짓은 아무리 생각해도 민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