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05 다른 문명의 흔적 =========================================================================
“로스차일드?”
한서진은 흠칫 놀라서 다시 한 번 카를린을 주시했다. 저도 모르게 몸이 뻣뻣해졌다.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이 히죽 웃음을 보였다.
“그러고 보니 화폐권을 놓고 요즘 로스차일드와 한창 싸우시는 중이죠?”
“로스차일드 사람이 어떻게…….”
“Table A에 있는지 의아하신 거군요. 이해해요.”
카를린은 몸을 의자에 깊이 묻으며 팔짱을 끼었다. 작은 손짓 하나하나에도 여유가 넘쳤다.
“그쪽 피가 흐른다면 무조건 돈 밖에 모르는 장사치는 아니죠. 물론 그쪽 가문의 보편적인 성향이 그렇다는 건 인정하지만요.”
“카를린 씨, 그 말씀은…….”
“아까 말씀하셨죠. 우주의 진리를 밝혀내는 게 목적이라고, 그리고 저와 우리 역시 그렇다고 대답했고요.”
니트론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끼어들었다.
“은행집 딸내미라고 죄다 돈 놀이에 혈안이 돼 있는 건 아니오. 카를린은 어려서부터 과학과 자연법칙에 관심이 많았소. 그래서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과학으로 진로를 잡았지.”
“카를린 씨의 가족은 이 분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까?”
“당연히 모르오. Table A는 존재 자체가 극비니까.”
니트론은 과거를 회상하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의 표정은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위원 중 금융 가문 출신이 카를린이 처음은 아니오. Table A 초기부터 금융 가문 출신이 한 명은 반드시 있었소. 나름 우리 전통이기도 했고.”
“전통?”
“아, 우리 같은 과학자들은 돈을 쓸 줄은 아는데 벌 줄은 몰라서. 카를린 같은 이가 한 명 정도 있으면 살림살이 꾸려나가는데 편하거든요. 구프게니, 지금 우리 Table A 자산이 어느 정도나 되나?”
“총 자산 가치를 따지면 1조 8,250억 달러 정도 될 겁니다.”
“들었소? 로스차일드 덕도 톡톡히 봤지. 전부 카를린 위원 덕분이오.”
자칫하면 공생관계라고 오해하기 딱 좋은 말이다. 하지만 한서진은 어긋나지 않고 제대로 이해했다.
그는 카를린을 똑바로 보다가 말을 떼었다.
“가문을 도구로 이용하시는군요.”
“진리를 탐색하기 위해서는 돈이 많이 들죠. 과학은 원래 어쩔 수 없어요. 그럴 때 집안에 돈이 많다는 건 참 좋은 장점이죠. 그렇지 않나요?”
카를린은 싱긋 웃었다.
한서진은 또렷이 느꼈다. 그녀는 로스차일드 가문 출신이지만, 돈놀이를 하는 장사꾼이 아니다. 뼛속부터 과학자다.
가문의 재산, 영향력은 그녀가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도구이자 수단일 뿐이다.
“걱정하지 마시오, 한 박사. 카를린은 Table A와 로스차일드가 서로 부딪친다면 무조건 Table A 손을 들어줄 사람이니.”
“일단 저부터가 Table A입니다. 당연히 저부터 살아야죠.”
“참 마음에 드는 말 아니오?”
니트론은 껄껄 웃었고, 한서진은 깍지를 끼며 자세를 낮추고는 다시 물었다.
“그럼 카를린 씨는 로스차일드 내부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는 겁니까?”
“상속권은 거의 없다고 보시면 돼요. 대신 인맥이 넓죠. 가문에서도 신경 써서 절 밀어주고 있는 편이고요. 제가 노벨상 수상자라도 되면 그만큼 좋은 것도 없으니까요. 어른들 입장에서도 어설픈 펀드매니저보다는 노벨상 수상자가 낫지 않겠어요?”
“그런가요.”
“박사님이 연방은행을 한 방 먹인 것은 저도 재밌게 봤어요. 개인적으로는 판정승이 아닌 KO승을 바랬지만, 공룡은 원래 한 번에 쓰러지는 법이 아니니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겠죠.”
“가문을 싫어하시나요?”
“좋아하지는 않죠. 어렸을 때 과학자를 한다고 하니까 다들 말린답시고 귀찮게 굴었거든요.”
“같은 연구원 남자랑 결혼한다고 했을 땐 난리가 났었지. 카를린 부모님이 결사반대했었지, 아마?”
다른 위원이 웃음을 터트리며 끼어들었다.
카를린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한서진은 다시 한 번 분명히 느꼈다. 그녀에게는 가문조차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카식 블레이드는 한국으로 옮기기로 결정 났다.
언제까지 한서진이 미국에 머물 수는 없는지라, 그의 원활한 연구를 위해 한국으로 가져가기로 한 것이다. 니트론 역시 한국에 사실상 이민 온 것이나 마찬가지라, 그 안건은 어렵지 않게 결정이 되었다.
“어차피 지금 우리가 가진 지식으로는 더 이상의 비밀을 엿보는 게 불가능합니다.”
아카식 블레이드를 연구하는 동안에서 미국의 과학은 많은 발전을 이뤘다. 그러나 이제는 한계점에 이르렀다.
실제로 십 년 전부터는 아카식 블레이드를 연구하면서 얻은 지식이 다른 과학의 발전으로 이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제5의 힘의 단서를 잡았지만 그뿐이었소.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난해한 지식이었던 거지.”
원시부족도 자동차를 보고 바퀴의 원리를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복잡한 엔진이나 변속 장치, 컴퓨터 등은 아무리 봐도 이해하기는커녕 그게 뭔지도 모른다.
그들은 아마 쓸모없는 게 주렁주렁 달려 있는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Table A도 마찬가지다.
7인 위원이 다른 점은, 자신들이 이해하기에 너무 지고한 영역이라는 점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박사는 아카식 블레이드의 존재조차 모른 상태에서 제5의 힘, 에테르를 실생활에 적용시켰소. 우리는 십 년째 제자리걸음이지만, 한 박사라면 반드시 더 큰 비밀을 밝혀낼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소.”
“그리고 오리할콘 뼈도 어차피 한국에 있으니까, 원활한 연구를 위해서는 아카식 블레이드도 같이 있는 게 낫지요.”
아카식 블레이드도 오리할콘 뼈를 적재한 초대형 연구선박과 동일한 연구선에 실렸다. 연구선박은 항모 2척이 포함된 미 함대의 호위를 받으며 한국으로 출발했다.
너무 과한 경호가 아닐까 싶지만, 7인 위원은 오히려 그 반대라고 했다.
“아카식 블레이드는 지금의 미국 헤게모니를 세운 위대한 보물입니다. 여기에 담긴 지식을 전부 얻는다면 세상의 황제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절대 과한 게 아니에요.”
“마음 같아서는 항모 30척쯤은 호위로 붙이고 싶은데, 그랬다가는 오히려 지나치게 눈에 띄니까요.”
연방정부가 아카식 블레이드의 중요성을 알았다면 본토 밖으로 내보내는 걸 절대 금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연방정부는 아카식 블레이드가 뭔지는 커녕 그 존재조차 몰랐다.
7인 위원회의 목적은 미국의 국익을 수호하는 게 아닌, 진리를 탐색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중요한 보물을 본토 밖으로 내보내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연구선이 최고의 시설을 갖추고 있긴 하지만, 언제까지나 배에 실어둘 순 없어요. 바다는 사고도 나기 쉽고 또 날씨가 궂으면 연구에 지장이 있으니까요.”
“H팰리스에 서둘러 새 연구기지부터 지었으면 합니다.”
한서진은 7인 위원회의 요구를 받아들여, 평양지대에 지어질 신도시 H팰리스에 에테르 전용 연구소를 짓기로 했다.
단순한 연구소가 아닌, 그룸 호수 공군기지 이상 가는 철저하고 삼엄한 보안시설을 갖추기로 했다. 아카식 블레이드나 오리할콘 뼈를 지상시설에 보관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시설이 지어지는 동안에는 지금까지처럼 초대형 연구선박에서 연구를 진행하기로 했다.
그 모든 과정은 미 연방정부, 화폐 자본가들의 시선을 피해 은밀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호위를 맡은 미군조차도 자신들이 무엇을 지키고 있는지 몰랐다.
미국에서 머문 시간은 보름 가까이 되었다.
한국에 오자마자 송하나를 만났는데, 보름이 아니라 몇 달 만에 보는 듯이 반가웠다. 그는 종일 내내 그녀를 품에 꼭 껴안은 채 시간을 보냈다.
“많이 바쁘셨어요?”
“대충 처리했어. 미국 친구들과 연구 테마가 좀 있는데, 앞으로는 한국에서 하게 될 거야.”
“그렇게 해도 되는 거예요?”
“그럼. 연구 주체가 나인데 당연히 여기서 해야지.”
보름이나 떨어져 있으면 어린 나이에 따라가고 싶다고 할 만한데, 그런 말은 전혀 하지 않는다. 한서진은 그게 자신의 바쁜 일정을 배려해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깨와 다리를 쓰다듬으며, 한서진은 오랜만에 그녀와 잡다한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사흘 간 데이트로 시간을 보내며 휴식을 취한 뒤, 그는 곧장 제주도로 향했다. 아카식 블레이드를 실은 연구선박은 지금 태평양을 건너는 중이었다. 적어도 한 달은 넘겨야 제주도 해역에 도달할 것이다.
그는 본격적으로 오리할콘 뼈 연구를 시작했다.
일본은 최근 곤란한 외교적 상황에 빠져 있었다.
미 화폐자본가들이 지나치게 빨리 판정패를 당한 바람에, 그 사이에 낀 입장만 난처하게 된 것이다.
한서진과 연준위의 대립이 길고 지루해질수록 일본이 유리한 선택지를 얻을 수 있는 구도였는데, 너무 빠르게 판정패가 나와 버렸다.
한일 외교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고, 양국에서는 반일, 반한 감정이 극명한 열기를 발하고 있었다.
여기에 H그룹의 잔소리를 들은 러시아의 우주자원수출기업, HAMC가 대일본 희토류 수출 금지 조치를 취했다. 덕분에 자동차, 컴퓨터, 전자 등 첨단 분야에 종사하는 일본 제조업체들이 큰 타격을 입었다.
희토류를 수입하지 못하니 당장 제조공장을 놀려야 할 처지가 된 것이다.
이 모든 그림을 구상했던 스토미그룹은 정재계에서 과격한 항의를 받아야 했다.
“스토미그룹을 믿고 내 모든 인맥을 다해서 내각을 움직였소! 이번 기회를 잘만 활용하면 한국에 밀리는 대미국 동맹관계를 강화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믿었단 말이오! 그런데 이 일을 어떻게 할 거요! 미국은 오히려 그전보다 더 한국을 살갑게 대하고 있고, 우리 일본을 쳐다보는 눈초리는 싸늘해졌습니다!”
내각에 이어진 끈에서 어마어마한 항의와 질책이 돌아왔고.
“희토류 수입이 모조리 끊겼습니다. HAMC에 아무리 통사정을 해도 들어주질 않습니다. H그룹 백철중 회장의 압박이 상당하다고 합니다.”
“당장 공장을 돌릴 재고분은 두 달 치도 채 되지 않습니다. 그마저도 소모된다면 공장은 완전히 멈추고 맙니다.”
“유츠키 회장! 이 일을 대체 어떻게 책임질 겁니까! 스토미그룹을 믿고 움직인 정부와 기업들을 어떻게 하실 셈인가요!”
한일 관계 악화에 스토미그룹이 배후로 있다는 소문이 증권가에 파다하게 돌았다. 정재계에서 스토미그룹을 향해 벼르고 있다는 루머도 사방으로 퍼졌다.
아니, 그것을 루머라 믿는 사람은 이미 없었다.
“이베이 총리가 이참에 스토미그룹을 제대로 손보려고 한다. 재벌 해체는 기본이고, 그룹이 공중분해 될 수도 있어.”
“스토미그룹에서 손을 떼라. 70년 영광은 이미 끝났다.”
추락하는 것은 끝이 없다고 했던가. 그룹 계열사의 주가는 곤두박질치듯이 떨어졌다.
유츠키 회장은 이 모든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카이고르 컴퍼니의 구프게니 키신, 지금의 스토미그룹을 만들게 해준 오랜 멘토.
그를 믿고 일을 벌였지만, 상황은 최악을 맞이했다.
유츠키 회장은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구프게니 키신의 번호를 눌렀다. 이미 사흘째 연락이 되지 않지만, 그래도 그에게 기대를 걸어야 했다.
「Hello.」
놀랍게도 신호가 몇 번 울리지 않고 구프게니가 전화를 받았다. 유츠키 회장은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고문님. 접니다.”
「아아, 스토미 그룹 이야기는 들었네. 그간 도울 방법을 찾느라 미처 연락을 못 받았네.」
“아! 역시 그러시군요!”
유츠키 회장은 한 줄기 광명이 눈앞을 비추는 듯했다.
그러나 착각임을 깨닫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카이고르 컴퍼니에서 스토미그룹의 주식을 무제한 매입해줄 수 있네. 매입가는 다른 이들이 부른 가격의 무조건 두 배일세. 매입 시기도 자네가 원하면 언제든지 가능하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미안하네. 바빠서 이만 끊지. 자세한 건 카이고르 컴퍼니 대표, 그 친구에게 물어보게나. 내가 말은 해뒀네.」
뚜, 뚜, 뚜…….
유츠키 회장은 끊어진 수화기를 들고 한참이나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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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이리 된 거 할 수 없다. 내게 넘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