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04 다른 문명의 흔적 =========================================================================
한서진은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카식 블레이드…….”
“당시 Table A의 초대 팀장이 붙인 이름이오. 하늘, 즉 우주의 기록을 간직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소. 보다시피 날의 중간이 부러져 완전한 검의 형태를 잃은 상태요. 처음 건져 올릴 때부터 저런 상태였소.”
“…….”
한서진은 귓가로 흘려들은 채, 넋을 잃은 듯이 아카식 블레이드를 올려다봤다.
전체 길이가 거의 70미터에 육박하는 거대한 크기, 심지어 중간쯤에서 부러진 날을 제외하고 남은 크기가 이 정도다. 그렇다면 실제로는 얼마나 거대했을까.
‘신의 검?’
레노지안의 세계의 흔적인 것은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하다. 하지만 인간이 다루기에는 지나치게 크고, 웅장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카드리안 가문이 패배했다는, 그 세상의 신이 사용하던 검은 아닐까.
“당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미 해군 잔존병력은 아카식 블레이드를 항모에 실어 철수했소. 크기에 비해 가벼운 무게 덕분에 어렵지 않게 실을 수 있었다 하오. 루즈벨트 대통령은 Table A의 창설을 명했고,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소. 그리고 아카식 레코드 덕분에 맨해튼 프로젝트의 완성을 더 앞당길 수 있었지요.”
“…….”
“물론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소. 아카식 블레이드는 연구하면 할수록 놀라운 비밀을 알려 주었어요. 우리 인간이 알던 과학은, 아카식 블레이드에 담긴 진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지. 한때 우리는 아카식 블레이드가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었소.”
“신…….”
“신이 아니고서야 저런 위대한 물건을 다룰 수 있을까요?”
신을 찾는 과학자, 하지만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만큼 아카식 블레이드를 향한 경외감이 큰 것이리라.
“검의 구성 물질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거요. 우리도 처음 본 물질이지. 미스릴이나 오리할콘과도 또 다릅니다. 우리는 아직 그 실체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소.”
니트론은 7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검을 올려다보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외부의 자극에는 여러 가지로 반응을 보입니다. 그게 천운이었소.”
“반응을 보인다고요?”
“그래요. 덕분에 Table A는 이 검을 연구하면서 많은 지식을 얻었소. 그걸 통해 많은 자연과학적 법칙도 발견할 수 있었고, 그게 미국의 기초과학 발전을 이끄는 원동력이 됐습니다.”
한서진은 다시 아카식 블레이드로 시선을 돌렸다.
날 끝이 부러지고 소실된 검, 지금의 미국이 쌓아올린 위대함을 만들어준 다른 문명의 흔적.
레노지안의 문명은 어디까지 닿아 있을까. 그런 상념을 짚으며, 한서진은 정신을 집중했다.
통찰안이 발동하며 아카식 블레이드를 훑었다. 찌잉 하는 통증이 되돌아오자 그는 저도 모르게 비틀거렸다.
“박사님?”
“한 박사?”
구프게니와 니트론이 얼른 그를 부축했다. 그는 이마를 짚으며 괜찮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잠시 현기증이 나서.”
“이런…… 한 박사에게 아직 부담스러운 이야기였나 보군요. 이해합니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어요.”
“……조금 혼란스럽긴 합니다.”
한서진은 얼버무리며, 다시 한 번 아카식 블레이드를 주시했다. 그리고 두 눈에 정신을 집중했다.
‘윽!’
기다렸다는 듯이 집중력이 풀어지며 통증이 되돌아왔다.
틀림없다. 아카식 블레이드가 통찰안을 거부하며, 반발력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런 적은 처음인데.’
한서진은 당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호승심이 생겼다.
지금까지 통찰안으로 꿰뚫어보지 못한 적은 있어도, 통찰안의 권능 자체를 거부당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오기를 품고 아카식 블레이드를 노려보았다.
‘오냐, 넌 좀 특별하다 이거지?’
“Table A가 제5의 힘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아카식 블레이드를 연구하면서부터였소.”
니트론의 설명에 다른 위원, 브래드가 나섰다. 그는 50대 중반의 나이에 화학의 거장이 된, MIT 현직 교수였다.
“정확히는 Table A가 아니라 팀장님 본인이라고 하셔야 합니다. 제5의 힘이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가설을 정립한 것은 팀장님의 노력이었잖습니까.”
“험험, 어쨌든 나는 가설의 영역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입증과 검증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소. 그것도 꽤 오랫동안. 그런데 한 박사가 어느 날 느닷없이 그걸 실전에 응용하고 있더라, 이거요.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겠습니까?”
한서진은 머쓱해져서 시선을 살짝 돌렸다.
“농담이 아니라 처음에는 아카식 블레이드 문명인이 한서진 박사한테 접촉해서 개인 교습이라도 해준 줄 알았소. 그게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됐으니까. 물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사실 교수님은 지금도 가끔 그런 식으로 농담처럼 말씀하시곤 합니다.”
“아니, 이 사람아. 여기서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
브래드의 참견에 니트론은 민망해하며 나무랐다.
눈이 마주치자 헛기침을 하며 연신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어지간히 낯이 뜨거웠던 모양이다.
저녁때가 되자 7인의 위원들은 식사까지 함께 했다.
저마다 아카식 블레이드를 연구하면서 한 번 이상씩은 겪었던 고충에 관해서 썰을 풀기도 했다.
자유롭게 화제가 오가는 와중, 한서진은 위원 중 홍일점인 금발의 여성이 자꾸만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느꼈다.
‘나사 연구원이라고 했던가.’
나사 연구원이면 객관적으로도 상당한 과학 인재다. 특히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의 나이를 고려하면 더욱.
그러나 Table A의 중추 의사결정을 내리는 7인 위원의 한 명이라기에는 다소 모자란 감이 있었다. 한서진은 내내 그 점이 궁금했다.
“카를린 씨, 아까부터 저만 계속 쳐다보시는 것 같던데, 혹시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어떨 때는 정곡이 속 시원한 법, 한서진은 여성 위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카를린은 조용히 눈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유혹하려는 건 아니니 안심하세요. 저도 양심은 있는 사람이랍니다.”
양심?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하자 카를린은 피식거리며 부연설명을 했다.
“마흔 셋 유부녀가 한 박사님 같은 분을 탐내는 건 양심이 없는 짓이지요.”
“네?”
한서진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무리 봐도 그보다 열 살은 더 젊어 보이는데? 심지어 결혼까지 했어?
그는 헛기침을 하고 재빨리 말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닙니다. 그저 유독 빤히 쳐다보시기에 할 말씀이 있으신가 해서.”
“알아요. 나도 농담한 거예요.”
깍지 낀 손을 앞으로 뻗으며 기지개를 켠다. 어깨에서부터 손가락 끝까지 쭉 떨어지는 선이 부드럽고 길다.
몇 년 전만 해도 남자 여럿 휘어잡았을 것 같다. 아니,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은 듯하지만.
“박사님은 이 중에서 가장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시는 분인 것 같아서요. 본인도 그런 걸 원하시는가 하고 생각하느라고 빤히 쳐다봤네요.”
“예?”
“얼마 전 있었던 군중 해산 사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잊을 수 없는 놀라운 사건이었지요.”
“…….”
한서진은 입을 다물었고, 주변에 저절로 조용해졌다.
100만 군중 해산 사건, 수많은 음모론을 야기했으며 지금도 선진국 권력자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는 원인이다.
다만 미국, 그리고 한서진의 눈치를 보느라 누구도 공개화를 하지 못할 뿐이었다.
그렇게 음모론으로 굳혀지며 시간의 흐름에 덮이고 있었던 사건인데, 카를린이 다시 끄집어내버렸다.
“저 역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박사님이 에테르를 이용해 대중의 심리에 어떤 유의미한 작용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에테르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돼요. 참으로 놀라운 힘이지요. 아, 물론 박사님을 추궁하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해 마시길.”
“…….”
“그때의 영상은 저도 몇 번이나 봤어요. 감탄하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했죠. 눈을 뗄 수 없었던 기억이 나요.”
“무엇 때문이시죠?”
“박사님이 100만 명 앞에서 했던 말.”
“…….”
“미개하게 살지 말라,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었죠.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혼자 많은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느새 다른 이들은 숨을 죽인 채 둘의 대화를 경청하고 있었다.
기묘한 공기의 흐름에서, 한서진은 카를린이 7인 위원에서 가지는 발언권이 여간 큰 게 아님을 느꼈다.
과학자로서 그녀는 다른 대가들에 비해 모자란 감이 상당했지만,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갖추고 있는 게 틀림없으리라.
“별 거 아닌 말인데, 왜 그렇게 진지하게 고찰하셨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박사님이 어떻게 대중을 바라보느냐, 그 관점의 성향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박사님은 인류를 발전시킬 진리의 빛을 밝혀주실 분이니까요.”
“그건 조금……. 낯부끄럽고 민망한 말씀이시군요.”
“아니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박사님이 세상을, 대중을, 사회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건 다른 위원 모두가 긍정할 겁니다. 아카식 블레이드를 공유한다는 것은 우리 Table A의 모든 것을 오픈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대답을 들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서진은 저도 모르게 니트론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느릿하게 끄덕여 보였다.
“세상의 발전을 이끄는 이의 지도적 성향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 그것은 인류의 발전이나 정체, 진화나 파멸을 불러오기도 하니까요.”
“…….”
“그냥 편하게 말하면 되오. 어떤 대답을 하든 우리가 태도를 바꿀 일은 없으니까. 이미 어느 정도는 한 박사의 성향을 짐작하고 있소. 카를린은 다만 직접 한 박사의 육성으로 듣고 싶은 거요. 원래 여자들이 저렇지.”
“니트론 교수님, 그건 여성차별적인 발언입니다.”
“난 그냥 경험칙에 의거해서 내놓은 사견일 뿐일세. 내 할머니, 어머니, 와이프, 딸과 손녀들도 그랬지. 생각해보니 어렸을 적 짝꿍과 대학생 시절 짝사랑했던 랩 동기도 그랬어.”
“교수님의 화려한 여성 편력은 그만하면 됐고요, 박사님의 대답은 어떠신가요?”
생글거리는 눈빛이 똑바로 쳐다보며 묻는다.
“진리를 연구해서 세상을 바꾸거나,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거나, 혹은 그 밖의 다른 바람이 있으신가요?”
“저는…….”
한서진은 문득 말을 멈췄다.
불현듯 지나온 과거가 주마등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가난하고 불행했던 젊은 시절, 시한부 선고를 받고 직장에서 쫓겨나듯 나갔던 기억, 백세완에게 부품처럼 이용당했던 과거, 통찰안으로 거둔 눈부신 성공…….
레노지안의 힘으로 버젓이 성공을 거두고 지금의 자리까지 올랐다. 대중은 자신을 존경하면서도, 또한 두려워하고 음해하기도 했다.
선동으로 담을 넘으려던 100만 군중의 모습, H시리즈 치료제의 개발로 수많은 환자들에게 감사와 칭송을 받은 기억, 그 외에도 양극 된 감정이 머릿속을 교차했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제가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나 삶은 고려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제가 알고 싶은 우주의 법칙을 찾아내고자 할 뿐이지요. 그게 답니다.”
“…….”
“…….”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한서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대답이 그들에게 흡족하게 받아들여졌음을 깨달았다.
“저, 그리고 우리 역시 그렇습니다.”
카를린이 미소를 짓고 말하자 니트론이 껄껄 웃으며 끼어 들었다.
“거봐, 한 박사도 그런 사람이라고 했잖아. 하여튼 누가 금융 재벌가 아니랄까 봐, 체질은 못 속인다니까.”
“……금융 재벌가요?”
“아, 몰랐소? 카를린은 로스차일드 출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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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린이 십 년만 젊었어도 아침드라마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