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01 다른 문명의 흔적 =========================================================================
“표면에 달라붙은 이물질의 상태를 볼 때, 긴 시간 해저에 가라앉아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제주도에서부터 한서진의 가드를 맡은 구프게니가 열심히 설명했다. 그들이 탄 헬기가 떠나온 순양함이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게 보였다.
두개골을 실은 항공모함은 지금 제주도에서 남쪽으로 상당히 먼 해역에 있었다. 보안 유지를 위해서였다.
한서진과 구프게니는 제주도 7함대 기항에서 순양함을 타고 이동한 후, 다시 헬기로 옮겨 타서 항공모함으로 날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짐승의 두개골이 분명합니까?”
“네, 그렇습니다. 적어도 인간이 알고 있는 동물은 절대로 아닙니다.”
“혹시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공룡종은 아닙니까?”
만약 그렇다면 제대로 된 허탕을 치는 것일 테지만, 한서진은 그런 게 아님을 직감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하필 에테르 스톰이 발생한 해역에서, 폭발이 터진 직후에 떠올랐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
“에테르와 관련된 종인 건 분명합니다. 직접 보시면 박사님도 납득하실 겁니다.”
한서진은 작게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저도 부팀장님과 비슷한 예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시다면 다행이군요.”
“그나저나 오늘 부팀장님을 따라 나선 것으로, 전에 말씀하신 부탁을 들어준 셈 치면 됩니까?”
“죄송합니다. 그건 곤란하겠군요.”
헬기는 날카로운 로터음을 퍼트리며 바다 위를 빠르게 날고 있었다.
어느덧 저 멀리 희미하게 항모 전단이 보이기 시작했다. 수십 척의 호위함을 거느린 초대형 항공모함의 형체가 또렷해지자, 한서진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이건…….”
“어떻습니까?”
어느새 헬기는 항공모함 갑판 위에 당도해서 크게 선회하고 있었다.
한서진은 창에 얼굴을 바짝 들이댄 채, 발 아래 펼쳐진 항모 갑판을 살폈다.
전장 300미터가 넘는 항모 갑판 위에는 거대한 짐승의 두개골이 있었다. 군데군데 뻘흙과 바다 이끼 등 이물질이 지저분하게 묻어 있었지만, 그 광택은 눈이 부실 만큼 희었다.
오랫동안 해저에 잠겨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표면에는 조금의 흠집이나 변색도 보이지 않았다.
구프게니는 한서진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떻습니까?”
“정말…… 거대하군요. 이런 생물이 존재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두개골은 항모 갑판 전장에 조금 모자란 정도였다. 항모의 크기를 생각하면 적어도 200미터 이상은 된다는 소리였다.
‘초룡.’
두개골을 보자마자 떠오른 생각이었다. 아니, 거대한 두개골이 떠올랐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였지만, 지금에서야 그것을 확신했다.
‘틀림없어. 초룡이다.’
가벼운 전율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입술이 창백하게 변하고, 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레노지안은 거짓된 꿈속 세상이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그래야 이곳이 오롯한 현실로 확정될 수 있으니.
그런데 초룡의 뼈가 발견되다니. 이걸 대체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은가.
“내리시지요.”
어느덧 헬기가 갑판에 착륙했다. 헬기에서 내린 한서진은 별 세 개를 단 백인 장성이 수하들을 거느린 채 부동 중인 걸 보았다.
앞을 지나가자 장성이 경례를 붙였지만, 한서진은 제대로 보지 못하고 지나쳤다. 장성이 머쓱함을 느끼면서도 얼른 뒤를 따라 붙었지만, 한서진은 그것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거대한 두개골 앞에 선 한서진은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멍하니 올려다보기만 했다.
“표면에 침착된 이물질의 상태를 볼 때, 적어도 수백 년 이상은 가라앉아 있었다는 소견입니다. 일단 육안으로 확인한 게 그 정도이고, 실제로는 더 오래됐을 겁니다. 자세한 건 반감기 측정을 통해 알아봐야겠습니다만.”
한서진은 우두커니 두개골을 올려다보았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서 만지려다가, 손가락 한뼘만큼을 사이에 두고 멈칫했다. 형언하기 힘든 두려움이 엄습했다.
손이 닿기만 해도 현실의 무언가가 뒤틀려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 그것이 심장에 스멀스멀 차올랐다.
한서진은 손을 떼고, 몇 발짝 뒤로 물러났다.
거대한 두개골 위로 태양 빛이 스치듯이 내려꽂힌다.
그 빛살이 유독 눈이 부시다고 느껴져 손을 들어 가리는 순간, 주변의 시야가 암전했다.
먹물을 쏟은 듯한 어둠이 사방에서 밀려들고, 주위에서 자신을 부르는 놀란 목소리들이 환청처럼 아스라이 멀어졌다.
흰 뼈가 눈이 부신 섬광을 발하며, 순식간에 전신이 찬란한 은빛으로 물들었다. 은색 광채는 마치 본래의 색깔이었던 것처럼 영롱한 아름다움을 뿜어내며, 한서진의 몸을 감쌌다.
그리고 모든 게 끊겼다.
―이 모든 게 폐하를 위해서입니다. 용서하세요.
―왕비, 어떻게 이런!
―왕비 전하! 그러시면 안 됩니다!
슬픔과 절규에 젖은 비명이 들렸고.
―신이여! 언제까지 우리를 이곳에 가둬둘 수 있을 것 같더냐!
―천 년이 흐른다 해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피에 젖은 전쟁의 함성이 귓가를 쩌렁쩌렁하게 만들었고.
―백성들을 부탁합니다, 폐하…….
늙은 신하들의 쥐어짜낸 간청이 가슴을 아련하게 만들었다.
무수한 풍경이 눈앞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인간의 인지를 넘어선 속도지만, 장면 하나하나가 눈에 밟힐 듯이 선명한 궤적을 남긴다.
문명이 시작되고, 쌓아올리고, 발전하고, 투쟁하고, 모든 것을 잃고, 다시 쌓아나가고, 기원이 계속적으로 반복된다. 역사의 과정이 생생하게 눈앞을 흐른다.
불을 발견했듯이 마법을 발견하고, 신의 힘을 얻고, 용의 군단을 꾸린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세상을 일통하며, 모든 땅에 지배력을 퍼뜨린다.
시간이 끊임없이, 계속 흐른다.
문명은 고도의 발전을 이뤘다. 사람들의 인식도 문명 수준에 걸맞은 수준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갈증은 마르지 않고, 왕가를 괴롭혔다. 높은 곳을 바라보게 채찍질했다.
거대한 용의 모습이 눈앞을 빠르게 다가온다. 크게 벌린 입이 마치 자신을 잡아먹을 듯처럼 느껴져, 한서진은 저도 모르게 두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자, 눈앞에는 익숙한 얼굴의 여자가 있었다.
신효진을 닮은 여자는 화려한 장신구로 치장한 채, 긴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채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수척한 표정에는 어두운 피로감이 가득했다.
―영원한 꿈은 누군가에게는 축복,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저주가 될 수 있습니다.
지친 그녀의 목소리가 아스라이 멀어진다. 주변의 모든 것이 의식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었다.
―폐하께서는 저주라 생각하시나요?
두 눈시울에 뜨거운 무언가가 차오른다. 그것이 뺨을 따라 툭 흘러내리는 것을 느낀 순간, 그의 입이 제멋대로 열렸다.
그것은 자신의 입에서 나왔음에도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곳에서 아련히 울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지 않소. 이것은…… 고결한 축복이요.
깜빡거리는 백열등 빛이 눈꺼풀을 두드렸다.
지끈거리는 통증이 가볍게 머릿속을 흘러다녔다. 눈을 뜬 한서진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생각보다 몸이 무겁지는 않았다. 간헐적인 두통만 빼면 아무렇지 않을 만큼 괜찮았다.
“박사님, 정신이 드십니까?”
항모까지 동행한 구프게니의 비서가 화들짝 놀라서 반응했고, 군의관으로 보이는 미군 장교가 얼른 달려왔다. 한서진은 그의 지시에 따라 몇 가지 검사를 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박사님께서 두개골을 보시다가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그래서 급히 항모 의료실로 모셔왔습니다. 별 이상 소견은 발견되지 않아서 조금만 기다려도 깨어나지 않으시면 육지로 후송할 계획이었습니다.”
“내가 얼마나 기절해 있었죠?”
“30분 정도입니다.”
“30분이라…….”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한서진은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의식이 끊긴 동안 보았던 모든 게 생생히 기억났다. 레노지안이 찬란한 역사를 이루고, 카드라인 왕실이 패배하고, 인간의 왕으로 전락하게 될 때까지의 과정 전부가.
그저 빠르게 스치듯이 보기만 했기에, 모든 것을 낱낱이 알 수는 없었다.
마지막에 들렸던 왕비와의 대화만큼은 똑똑히 기억났다. 자신의 입을 빌어 그녀에게 전하던 왕의 진심까지도.
‘리미트리스 드림이 꼭 저주만은 아니라고?’
자세한 건 알 수 없으나, 분명 왕비는 그런 의미로 말을 한 것 같았다.
본래 저주가 아닌 축복이라는 걸까. 아니면 어느 한쪽에 치우지지 않은, 중도적이라는 뜻일까.
한서진은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문득 갑판에 실린 두개골을 보고 암담한 기분이 들었다.
‘그나저나 초룡의 두개골…… 그건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왕이 머무르는 차원에서 넘어온 것일까?
그렇다면 대관절 언제?
‘구프게니 부팀장은 적어도 수백 년 이상은 된 것처럼 보인다고 했어. 하지만 그렇게 짧을 리가 없어.’
초룡의 뼈는 본래 은색 광채를 띠고 있다. 에테르를 다루는 권능 덕분이다.
그 찬란함이 삭아서 완전히 하얗게 부식되기까지는 까마득하게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수백 년 정도로 될 일이 아니다.
‘오래 된 뼈가 갓 넘어왔거나, 오래 전에 넘어왔다가 죽어서 뼈가 가라앉아 있었거나. 둘 중 하나겠지.’
한서진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때 연락을 받은 구프게니가 다급히 들어왔다가 멀쩡한 모습을 보고 안심했다. 그가 자리에 앉자 다른 이들이 모두 자리를 비켜 주었다.
“갑자기 의식을 잃으셔서 걱정했습니다. 다행히 가벼운 일사병 같다고 하더군요.”
“고맙습니다.”
일사병 따위는 아니지만. 한서진은 조용히 넘어갔다.
구프게니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반감기 측정 결과가 나왔습니다.”
“얼마나 오래 된 뼈입니까?”
“최소 10억 년 이상입니다.”
“……10억 년.”
천문학적인 숫자에 한서진은 입을 다물었다. 10억 년, 얼마나 긴 시간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레노지안에서 지구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시간의 굴곡이라도 일어난 건가? 그래서 짧은 시간 안에 10억 년이 흘러버린 건가?’
한서진은 여러 가지 가정을 떠올렸다.
구프게니가 다시 말했다.
“놀라운 건 그것만이 아닙니다. 두개골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그 크기를 보면 무게 역시 어마어마하겠지요.”
전장이 200미터가 넘는 길이를 생각하면 무게 역시 수백 톤은 족히 넘어갈 것이다. 한서진은 그렇게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그러자 구프게니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약 300kg입니다.”
“……300kg이라고요?”
“그보다 더 적게 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성분 조사를 해봐야겠지만 일단 뼈가 생명체라고 믿어지지 않는 구조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지구상의 자연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물질이라고 하더군요.”
“지구상의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 물질…….”
한서진은 퍼뜩 생각이 닿는 부분이 있었다.
크기에 비해 지나치게 가벼운 무게,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 물질, 자신의 지식 내에서 단 한 가지가 떠올랐다.
이 모든 상황에 명쾌하게 들어맞는 한 가지 단서.
“박사님도 잘 알고 계시는 물질입니다.”
“……오리할콘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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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댓글, 그런 저주는 없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