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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397화 (397/609)

00397  골드 화폐  =========================================================================

“안 그래도 자네한테 말하고 싶었는데, 요즘 일본이 통 문제야.”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차를 즐기며 백철중이 넌지시 이야기를 꺼냈다.

한서진은 차분히 되물었다.

“일본이요?”

“HAMC 때문에 한동안 잠잠해서 좋았는데, 겁을 상실했는지 요새 자꾸 긁고 있네.”

“국민 반감이 장난 아니겠군요.”

“엄청나지. 듣자니 현지 동포들 차별도 부쩍 심해졌다고 하네. 극우 청년들도 극성을 부리고 있고.”

한서진은 천천히 찻잔을 입에서 뗐다.

“이상한 건 도원패 정권은 이베이 내각과 제법 친밀한 사이라는 거야. 그런데 뒤통수를 맞고 쩔쩔 매기만 할 뿐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하고 있어.”

“짜고 친 건 아니라는 거겠죠.”

“우리 그룹에도 도움을 요청했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도움이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뻔하지. 희토류 가지고 좀 흔들어보겠다는 걸세. 과거 중국이 그랬듯이.”

“저한테는 아무 말 없었습니다만.”

“어떻게 감히 자네에게 말을 꺼내겠나? 상소할 게 있으면 자네 밑의 사람들과 먼저 조율을 해야지. 안 그런가?”

한서진은 찻잔을 입에 대며 피식거렸다.

“그 말씀을 들으니 격세지감이네요. H반도체 공장에 입사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H반도체 같은 회사 만 개는 거뜬히 살 수 있지.”

작은 실소가 터졌다.

웃음을 그친 후 백철중이 입을 열었다.

“스토미 그룹이 판을 주도한다는 정보가 있어. 원래 일본 정계가 원했던 그림은 아니라는 거야.”

백철중은 어느새 찻잔에서 손을 떼고, 신중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물론 지금은 일본 정부도 신이 나서 가세하는 중이지만. 지지율이 제법 올랐거든. 외부의 적은 내부를 단결시키는 법이니.”

“회장님께서는 찬물을 끼얹고 싶으시군요.”

“도원패 정권을 도와주는 셈이 되는 건 내키지 않지만, 일본이 설치는 꼴을 놔둘 순 없지. 내 속마음은 그렇다네.”

한서진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시원하게 말했다.

“일본은 재량껏 대응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재량껏?”

“네, 어떻게 하시든지 상관없습니다. 회장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제 이름을 얼마든지 파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럼 자네를 구국의 영웅으로 만들어도 괜찮나?”

한서진은 피식거렸다. 생각을 하니 우스웠다.

“영웅은 취미가 없는데요.”

“감투 하나 더 쓰는 것도 나쁘진 않지. 자네가 신경 쓸 건 일절 없을 걸세. 내가 약속하지.”

“그럼 그 말씀만 믿겠습니다.”

한서진은 일본이 Table A와 어떻게 얽혀 있는지 자세한 정황은 설명하지 않았다. Table A의 존재가 비밀이기도 했지만, 백철중이 진실을 안다고 달라질 건 없기 때문이다.

문득 백철중이 안타까워 했다.

“자네가 마음만 먹는다면 정말 이 나라에서 뭐든지 할 수 있을 텐데.”

“지금도 못 할 건 없습니다만.”

“뭐든지, 정말 뭐든지 말일세. 그 의미를 진짜 모르겠나?”

“…….”

“얼마 전 군중 해산 사건……. 다들 알음알음 쉬쉬하고 있지만, 난 그때 확신했네. 그리고 전율했지. 에테르의 무한한 가능성을 느꼈고. 게다가 자네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 비밀을 쥐고 있지 않은가?”

집단 세뇌든 뭐든, 대중을 통제할 수 있는 힘마저 있다면 한서진이 못할 건 정말 없을 것이다.

“사실 세계 정복을 한 번 해보고 싶긴 합니다.”

“정말인가?”

백철중은 살짝 놀라며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마치 큰 행운을 마주한 사람처럼.

한서진은 지금 상황이 조금 웃겼다.

보통 이런 말을 하면 당연히 농담으로 치고 넘어간다. 하지만 지금 H그룹의 총수가 화들짝 놀라서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것이 바로 그의 말이 가지는 무게였다.

“아, 물론 마음만 그렇다는 겁니다. 지금은 해야 할 일들이 있거든요.”

“그럼 나중에는 꼭 할 거지?”

“그때까지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요. 근데 진지하게 해야겠다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그럼 시간을 들여서라도 진지함을 갖추게. 나는 그때까지 열심히 준비하고 있겠네.”

백철중은 다짐을 요구하듯이 재차 말했다.

“죽기 전에 자네가 왕관 쓴 모습, 꼭 보게 해주게.”

과연 비유적인 의미일까, 말 그대로의 의미일까.

미국 정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자국 기업 간에 AU화를 이용해서 거래하는 것을 제재하는 조치를 내놓았다. 금지는 아니고, 거래를 할 때 먼저 정부에 신고하고 승인을 받도록 하는 제한을 둔 것이다.

기업들은 거래 관계에서 주고 받는 재화의 종류까지 참견한다며 불만이 높았으나, 투명한 과세를 위해서라도 이런 조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명분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덕분에 미국 내에서 거래되는 AU화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 어느 정도 구체적인 파악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관계자들은 그 어마어마한 물량에 놀라고 말았다.

“자그마치 8,530억 AU입니다. 달러로 환산하면 거의 1조 달러 가까이 됩니다.”

8,530억 AU.

50AU는 1g에 해당하기에, 금으로 환산하면 정확히 17,060톤에 달하는 가치를 가진다. 게다가 숫자가 금과 정확히 연동되기에 화폐 가치를 정확히 가늠할 수 있다.

재무무 관리들은 그만큼의 AU화가 이미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소름이 돋았다.

“게다가 이건 1차적으로 확인한, 그것도 미국 내에서 거래되는 물량만 따진 겁니다. 아직 집계되지 않은 물량, 그리고 해외에서 거래되는 물량까지 집계하면 실로 어마어마합니다.”

콜키 재무부 장관은 AU화가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두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AU화의 존재는 자신과 친구들의 이익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

크리스 대통령도 그걸 느끼고 있을 것이다. 콜키 장관은 굳은 얼굴로 회의를 마치고 일어섰다.

“금융 경제 안정을 위한 한서진 박사의 고결한 뜻은 이해하지만, 이런 식으로 정부의 고유 권한을 침범하는 것은 매우 곤란한 일이오.”

국무회의에서 크리스 대통령은 다소 강경한 어조로 자신의 뜻을 펼쳐 나갔다.

“시장 안정은 반드시 정부의 주도로 이뤄져야 하오. 여러분들도 내 그런 뜻을 깊이 이해해주기 바랍니다.”

위원들은 이해했다는 듯이 무겁게 끄덕였다.

그간 대통령은 한서진과 얽힌 일은 소극적으로 대처해온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결심을 굳힌 모양이었다.

한서진과 부딪쳐 임기 내내 삐걱대는 한이 있더라도, 주도권을 양보하지 않기로 말이다.

회의가 길어졌다. 위원들은 다양한 견제 정책을 내놓았고, 크리스 대통령은 군말 없이 모두 수용했다.

그리고 다음 날, 백악관은 특별 경제 조치를 발표했고, 금융 시장이 크게 술렁였다.

「개인의 사실상 화폐 발행은 절대 있을 수 없어.」

「AU는 오로지 사적 채권으로서만 인정.」

「은행의 AU 매입, 제한을 둘 것.」

여러 조치가 쏟아져 나오며 시장이 크게 뒤흔들렸다.

전문가들은 크리스 대통령이 마침내 한서진에게 대항하기로 결정했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은행과 기업들은 어느 편에 서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했다.

혼란의 와중에도 AU화의 신용은 그 두께를 유지했다.

연방정부는 달러의 신용을 지키고, AU화의 시장 침식을 견제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는 듯이 보였다.

―크리스 대통령과 한서진 박사의 끝없고 지루한 견제전이 시작되었다.

어느 경제 전문가가 냉정한 예측을 내놓았다.

―월가 부호 출신으로, 금융 자본가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공화당 대통령은 타협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한다. 그렇다고 미국의 영웅인 한서진 박사에게 위해를 가하는 일도 할 수 없다. 대통령이 할 수 있는 건 양쪽에 낀 샌드백 신세로 임기가 끝나기를 기도하는 것뿐이다.

―AU화는 이미 대세, 인력으로 그것을 막을 수는 없다.

전문가들의 일침은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되곤 했다.

―연준위, 꼴 보기 좋게 됐다.

W마트, 세계 최대의 유통기업.

창설 초기 인구 5만 이하의 소도시를 중점으로 급격히 체인망을 넓혀 가며 크기를 불렸고, 지금은 세계 각지에 300만 명에 달하는 직원들을 두고 있는, 명실공히 세계 1위의 유통기업이다.

저마진, 저가 전략과 저비용, 공급업체와의 제휴강화 등으로 유통업의 대명제를 실현한 W마트의 본사를 한 명의 손님이 찾아왔다.

슈론 윌튼 회장은 맞이하기 어려운 손님을 애써 태연히 맞이했다. 속에 자리한 궁금증을 억누른 채로.

“슈론 윌튼입니다.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로건 정입니다. SJ인더스트리의 대표이사입니다.”

“앉으시죠. 차는 어떤 걸로 하시겠습니까?”

“에스프레소 한 잔 주십시오.”

정지원은 다리를 꼬며 차분한 눈으로 슈론 회장을 응시했다.

슈론의 궁금증은 더욱 짙어졌다. 반도체와 수퍼컴퓨터 제조전문 기업인 SJ인더스트리가 왜 W마트를 찾아왔을까?

‘도무지 짚이는 곳이 없군.’

뭔가 사업을 제휴하려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미국에서 제일 바쁘기로 유명한 그가 한가하게 이런 자리를 만들 리가 없을 테니.

그러나 짐작이 가지 않는다. 저가형 PC라도 제조한다면 모를까, W마트에서 반도체나 Z7 같은 수퍼컴퓨터를 유통시키려는 것은 아닐 텐데.

‘그게 아니라면, 혹시?’

슈론 회장은 최근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AU화를 떠올렸다. SJ인더스트리는 한서진의 미국 본진이나 다름없는 곳, 당연히 SJ인더스트리는 AU화 확장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바로 용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SJ인더스트리는 W마트와 사업 제휴를 원합니다. 정확히는 SJ인더스트리가 아니라 한서진 박사님의 뜻입니다.”

“박사님이 정확히 W마트를 거론하신 겁니까?”

“물론 그건 아닙니다. 다만 제가 제안드리고자 하는 제휴 사업이 바로 한서진 박사님의 뜻을 관철시키는데 중요한 요소가 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저는 미국에서 한서진 박사님을 대신하여 전권을 행사하는 사람입니다.”

“대표님의 뜻이 곧 박사님의 뜻이라는 거군요.”

“적어도 미국 내 사업에서는 그렇습니다.”

비서가 커피를 두 잔 가져왔다.

슈론은 태연한 척 하면서 커피에 설탕을 넣고 휘저었다. 머릿속에서는 온갖 경우의 수가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웬만한 규모의 제휴 사업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정지원이 직접 찾아올 리가 없을 테니.

심지어 그는 한서진의 뜻이나 다름없다는 말을 흘리며, 이 사업이 가지는 무게를 강조했다.

W마트와 SJ인더스트리, 그 두 회사를 단단히 묶어줄 큰 제휴사업이 대체 뭐가 있을까?

슈론은 팽팽 돌아가는 머리에 과부하가 걸릴 것만 같았다.

“저가형 PC라도 제조하시려나 봅니다.”

“필요하다면 하겠지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W마트가 가진 세계 1위 유통강자의 힘을 원합니다.”

“……혹시 AU화와 연관된 건가요?”

“바로 맞추셨습니다.”

정지원은 자신감이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이었다.

“전 세계 모든 W마트에서 AU화를 현금처럼 쓸 수 있게 시스템을 개조해 주십시오.”

============================ 작품 후기 ============================

W마트는 시작일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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