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396화 (396/609)

00396  골드 화폐  =========================================================================

백악관은 질타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모든 이가 AU화를 환영하는 것은 아니었다. 경제전문가들은 AU화가 가져올 부작용을 몹시 두려워했고, 그 비난의 칼끝은 한서진이 아닌 연방정부를 향했다.

“연방정부는 시장이 AU화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한 명의 자연인이 화폐발행권을 행사한다는 것은 연방은행이 사기업이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이건 한서진 박사의 인품과는 별개로, 사회 시스템상 절대 용인해서 안 될 일입니다.”

“적어도 협의를 통해 연방정부가 주도권을 가져오는 거래 정도는 성사시켜야 합니다. 한서진 박사를 설득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아니, 연방정부가 반드시 해내야 할 숙제입니다.”

한 명의 자연인이 기축화폐 발행권을 휘두르는 것, 경제전문가들은 그 사실이 앞으로 가져올 미래를 두려워했다.

그 거대한 권리를 한 사람의 양심에만 맡겨 놓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이해하기 때문이다.

연방정부는 그런 질타에 난감한 기색을 비췄다.

―실질적으로 간섭 수단이 없다. 법은 이런 일이 생길 가능성을 전혀 상정하지 않았다. 입법자들은 우주에서 금 100억 톤을 캐낼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지 않았다.

개인이 화폐를 발행하는 것은 불법이다.

그러나 AU화는 사람들이 편의상 ‘골드화’라고 부를 뿐, 실질적으로는 금을 담보로 한 양도성 무기명 채권이다.

단지 사람들이 한서진의 이름과 신용을 믿고, 진짜 화폐처럼 사용할 뿐이다.

때문에 법을 통해 제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연방정부가 실질적인 행정력을 발휘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상대는 한서진이었다. 막대한 영향력을 지닌 미국의 영웅, 대통령으로서도 제재가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AU화가 미국의 이익을 해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달러화의 불안정한 부분을 커버하면서, ‘역시 미국이다’라는 긍정적인 평을 이끌어내는데 한몫했다. 세상이 달러 때문에 얻은 실망을 AU화가 채워준 것이다.

손해를 보는 것은 오로지 연준위, 그리고 한서진 뿐이었다.

그렇게 연방정부와 월가가 신음하고 있을 때, 한서진의 전용기가 미국을 향해 출발했다.

한서진은 공항에서부터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끝도 없이 밀려든 인파가 영웅의 귀가를 찬양했다.

그는 VIP 전용 게이트를 통과해 경호원들의 철저한 호위 속에 의전 차량에 올랐다. 그리고 곧장 백악관으로 향했다.

대통령이 그와 악수를 나누는 모습은 수많은 플래쉬 세례를 받으며 실시간으로 중계되었다.

―적과의 동침, 과연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을 것인가?

주요 언론사들은 자극적인 제목을 걸며 대중의 궁금증을 마구잡이로 자극했다.

한서진과 크리스 대통령이 사이가 썩 좋지 않다는 것은 이미 유명한 사실이었다. 한서진과 친한 클레튼 대통령이 크리스 때문에 연임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런 두 사람이 백악관에서 처음으로 마주하게 되었으니, 미국 사회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AU화의 향후 진로 방향과 시장 균형을 위한 논의가 이뤄진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 과연 어떤 합의를 끌어낼지 세상은 긴장감을 품고 주시했다.

그리고 드디어 비공개 독대가 이뤄졌다.

“요즘 제법 시달리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한서진이 먼저 꺼낸 말에 크리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대답을 하기 전에 샴페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럴 수밖에요. 황금 100억 톤의 소행성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으니까요.”

“저 역시 조금 놀라긴 했습니다.”

“박사님이 놀라실 일이 뭐가 있습니까?”

“세상이 그렇게 쉽게 제 말을 믿어줄 줄은 몰랐거든요. 금의 담보성을 어떻게 입증해야 하나 여러 가지로 설명을 많이 준비해놨는데, 그런 건 요구하지도 않더군요.”

한서진은 자신이 생각해도 우스운지 가볍게 피식거렸다.

“다들 지구가 네모나다고 해도 믿어줄 기세였습니다.”

“박사님이 그렇게 말하면 믿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는 네모난 모양인데, 사실은 에테르의 차원 왜곡으로 인해 우리 눈에는 구체로 보인다던가?”

“그거 그럴 듯하군요.”

크리스는 그와 눈을 마주치며 피식거렸다.

은근한 자신감이 가슴을 맴돈다. 바로 그와 한 배를 탔다는 사실에서 기인한 것. 더구나 세상은 그걸 알지 못한다는 은밀함이 묘한 중독성을 끼얹는다.

“서클이 안절부절 못하고 있습니다.”

“뭔가 지시를 내리던가요?”

“뻔한 겁니다. AU화를 견제하고, 사실상 통화로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도록 해라, 그런 겁니다.”

“어느 선까지 요구하던가요?”

“그런 건 없었습니다.”

크리스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연준위를 수호할 수만 있다면 경우의 수와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뜻이지요.”

한서진은 별로 놀라지 않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크리스가 물었다.

“달러를 완전히 대체할 생각이십니까?”

“적어도 기축화폐로서의 기능은 그렇습니다.”

기축화폐로서는. 의미심장한 말에 크리스는 문득 느껴지는 게 있었다.

“달러가 미국 내 자국통화로서 기능하는 것까지는 간섭하지 않겠다는 뜻인가요.”

“일단은 그렇습니다. 뭐, 미국이 굳이 AU화를 자국 통화로 쓰겠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제가 먼저 나서서 잠식할 마음은 없습니다. 한국도 어차피 국내에서는 원화를 쓰고 있습니다. AU화는 국제 거래에서 쓰이고 있지요.”

“서클의 숨통이 트이겠습니다. 연방은행이 국영화될 가능성은 없겠군요.”

“그거야 미국 정치가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 아니겠습니까.”

“그렇지요. 미국이 스스로 해결해야 할 일이지요.”

크리스는 말을 하면서도 신기했다.

자수성가로 일어선 그는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을 뚫기 위해 발버둥쳤다. 미국 최상류층에 진입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 결과 대통령 자리에 앉게 되었고, 자신을 앉힌 이들의 지령만 훌륭히 이행하면 서클의 한 자리를 얻기로 약속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서클이 마치 불구대천의 적인 것처럼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이 모든 심경 변화는 바로 눈앞의 청년 덕분이었다. 한때 자신이 몹시 질투했던 사람, 그러나 그런 과거가 이제는 부끄럽다.

독대를 끝낼 시간이 다가왔다.

크리스는 몹시 아쉬운 듯이 말했다.

“저 문을 열고 나가면 우리는 다시 적이군요. 아니, 그렇게 행세해야 하는군요.”

한서진은 크리스에게 철저한 연기를 요구했다. 원래 모르고 당하는 게 더 치명적이고 아픈 법, 그 통증을 적들에게 선사할 생각이었기에.

연극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짧은 시간 안에 막을 내리지는 않을 것이다.

아주 긴 시간, 어쩌면 영원히 막을 내리지 못할 수도 있다. 지금처럼 편히 분장을 벗고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언제 또 올까.

한서진은 피식거렸다.

“세상이 어떻게 생각하고 바라보든, 우리가 친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 점을 잊지 마십시오.”

독대가 끝났다.

대기 중이던 기자들은 독대를 마치고 나온 크리스 대통령의 찌푸린 얼굴을 특종으로 보도했다. 대동상이한 헤드라인이 모든 기사의 서두를 장식했다.

「협상 실패.」

독대를 마치고, 한서진은 곧장 한국으로 돌아왔다.

따지고 보면 미국에서 체류한 시간은 48시간도 채 안 되는 셈이었다. 이틀에도 미치지 못하는 짧은 시간, 말 그대로 대통령 독대만 끝나고 곧장 돌아왔다.

그런 급한 일정이, 독대를 마치고 찌푸린 크리스의 표정과 맞물리며, 사람들 사이에서 온갖 의심과 상상을 만들어냈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백철중 가족을 만났다. 모처럼 가지는 저녁 식사 자리였다.

“미국은 잘 다녀왔나?”

“예, 염려해주신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크리스 표정이 영 별로던데…… 자네가 쓴소리라도 했나 보군.”

“뭐, 비슷합니다.”

한서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예비장인에게 말해주지 못할 건 없지만, 크리스와의 관계는 아는 사람이 최대한 적은 게 좋았다.

송하나는 몸에 달라붙는 검은 시스루 원피스에 와인색 숄을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정제된 화려함이 돋보이는 자태에 한서진은 속으로 흐뭇했다.

“저도 H그룹도 오빠를 서포트하려고 그동안 열심히 준비도 많이 하고 일도 많이 했는데…… 오빠가 한 번 움직이니까 무용지물이 됐네요.”

“미안.”

“사과하실 건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더 기쁘죠.”

송하나는 비스듬히 돌아보며 배시시 웃었다.

“덕분에 국내에서 움직이기 더 수월해졌거든요.”

“이러다가 나라를 통째로 접수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백철중이 농담처럼 말했다. 그의 얼굴에도 즐거운 기색이 가득했다.

한서진은 정색을 하고 물었다.

“요즘 국내 사정은 어떤가요?”

“패닉 그 자체일세. IMF 때도 이보다는 덜했던 것 같아. 체급이 낮은 기업들은 줄줄이 부도를 맞고 있네. 소비 심리도 얼어붙었고.”

“나라에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군요.”

도원패 정부는 보유한 외화를 모두 AU화로 바꾸었다. 자산 가치도 지키고, 한서진의 환심도 사는 일타이득성 방침이었다.

그런데 경기가 얼어붙었다니.

“물론 북쪽 개발에 얽힌 기업들이야 노났지.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그 돈은 북쪽 개발 외에는 사용할 수 없지 않은가. 다른 목적으로 쓴다면 TF팀이 부리나케 나서서 고발할 텐데. 안 그러냐, 하나야?”

“아빤 왜 갑자기 저한테 그래요.”

송하나가 볼멘소리로 말하며 한서진의 눈치를 흘끔 살폈다. 백철중은 그걸 보고 껄껄 웃었다.

“연준위가 벌인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국내 경기가 혼란스럽다니 조금 마음이 안 좋긴 하네요.”

“자네 책임은 아니니 너무 신경 쓰지 말게. 이참에 국내도 시원하게 한 번 정리하는 게 좋아. 떨쳐낼 건 떨쳐내고 가야지. 안 그런가?”

백철중은 웃음을 지우고 진지하게 말했다.

“자네가 바라는 나라를 위해서라면, 시원하게 쓸어내고 새 물을 담는 게 낫지. 뭐든 새로 만드는 게 가장 쉽고 깔끔한 법일세.”

“제가 바라는 나라라…….”

한서진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원래 그런 거창한 목적 따위는 없었다.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왔을 뿐.

자신 때문에 대통령이 쫓겨나고, 새로운 대통령이 설설 눈치를 보고 기어도, 그저 아무 느낌이 없이 덤덤했다.

“원래 제가 욕심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누가? 자네가?”

백철중은 어처구니 없는 말을 들은 듯 황당해하다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오늘 자네가 아주 시원하게 나를 웃겨주는군. 안 그러냐, 하나야?”

“아빠, 그만 웃으세요. 우리 오빠 민망하게.”

“욕심이 없다라. 그래, 맞는 말일 수도 있군. 원래 큰 부자일수록 자기 격에 맞는 큰 재물에 욕심을 느끼지, 자질구레한 잡동사니에 욕심을 갖지는 않잖은가. 자네 마음은 이해하네.”

“여보, 하나가 째려보잖아요. 그만해요.”

송지현이 만류하자 백철중은 겨우 웃음을 지웠다.

“자네가 욕심을 품기에는 이 나라가 너무 작지. 미국과 기축화폐 정도는 되어야 자네가 욕심을 가질 만하지. 안 그러나?”

“회장님.”

“SJ인더스트리를 미국에 세울 때부터 알아봤네. 자네 야망이 아주 크다는 걸 말이야. 그런데 욕심이 없다고 말하니 너무 웃겼네.”

“억울합니다. 제가 기축화폐에 욕심을 낸 것도, 화폐 자본가들이 하도 귀찮게 구니까 홧김에 그런 겁니다.”

“아아, 그렇다고 해두지.”

한서진은 진짜 억울했다.

============================ 작품 후기 ============================

그렇구나. 주인공은 나처럼 억울한 프렌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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