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94 침략 예고 =========================================================================
‘개인 사채?’
‘사채를 발행해서 매입한다고?’
이해가 되지 않는 말에 좌중은 순간적으로 침묵에 빠졌다. 지금 김범석의 발언이 가진 의미를 알기 어려웠다.
사채를 발행해서 화폐를 매입하겠다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싶었던 것이다.
“H컨설턴트에서 발행할 사채의 종류입니다. 화면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곧이어 대형 화면에는 지폐 형태와 코인 형태로 된 여러 종류의 ‘사채’가 떠올랐다. 그것을 멍하니 보던 기자들 중 누군가가 중얼거림처럼 말했다.
“저건…… 화폐잖아?”
“지금 H컨설턴트에서 화폐를 발행하겠다는 건가?”
“아니지, H컨설턴트가 아니라 한서진 박사 개인이 발행하겠다는 거지.”
“법적으로 저게 가능해?”
“무슨 소리야? 김범석 부사장이 언제 화폐라고 했어? 사채라고만 했지.”
“형태만 화폐와 유사한 거지 어디까지나 화폐가 아니라 사채라 주장하고 있으니까 법적으로 하자는 없지만…….”
“결국 사채를 돈 받고 팔겠다는 게 본질인데, 그럼 이율은? 채권의 안전성 보증은? 대체 어떻게 하겠다고?”
“한서진 박사 이름값으로 어떻게 되지 않나?”
“말이 되는 소릴 해! 무제한 매입이라고 했는데 지금 쏟아지는 달러를 무슨 수로 감당하려고? 그리고 채권이면 당연히 이자를 줘야 하는데 그런 언급은 일절 없잖아?”
이 채권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에,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고 혼란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김범석은 즐거운 듯이 혼란을 지켜보다가 신호를 보내듯이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기자들은 일제히 언쟁을 멈추고 그를 돌아봤다.
“채권의 안정성이 문제라고 하셨는데…… 그 문제는 물적 담보로 간단히 해결을 볼 수 있습니다.”
작은 손짓과 함께 화면이 바뀌었다.
어두운 우주가 화면에 나타났다. 빠르게 움직이는 소행성이 보였다. 화면이 확대되며 소행성의 모습이 더욱 선명한 해상도로 보이기 시작했다.
소행성은 전체가 누르스름한 광택으로 뒤덮여 있었다. 기자들은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들은 아직 상황을 인식하지 못했다.
“저게 뭡니까?”
“소행성 아닌가요?”
“저게 채권 담보와 무슨 상관입니까?”
김범석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짙어졌다. 큰 장난을 앞둔 개구쟁이와 흡사한 표정이었다.
‘너희들, 모두 깜짝 놀랄 거다.’
그는 사전에 발표를 준비하면서 전율에 몸을 떨었다. 한서진이 준비한 카드가 대단했기 때문이다.
우주에서 금 소행성을 가져온다니! 이건 말이 채권의 형태를 띠고 있을 뿐, 금본위제 화폐가 부활하는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 폭탄의 스위치를 누르도록 선택받았다.
김범석은 떨리는 가슴이 티가 나지 않도록 억눌러야 했다.
“보시는 것은 현재 한서진 박사님이 에테르 동력을 이용해 궤도를 비튼 소행성입니다. 이 소행성은 현재 지구 궤도를 향해 날아오고 있으며, 순도 99.99% 이상의 금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기자들은 일제히 입을 떡 벌린 채 굳어버렸다. 충격적인 발표에 몸이 경직된 것이다.
김범석은 이 순간이 너무 즐거웠다. 그는 흥분이 드러나지 않게 노력하며, 발표문을 다음 장으로 넘겼다.
“이 소행성을 구성하고 있는 금으로 발행 채권의 가치를 담보하게 될 예정이며, 소행성의 총 무게는…….”
말을 잇다 말고 김범석은 눈을 부릅떴다. 순간 자신이 글자를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그는 눈을 비비고 다시 발표문의 글자를 확인했다. 그러나 아무리 다시 확인해도 글자는 변하지 않았다.
“뭐야, 무슨 일이야?”
“왜 말을 하다가 말지? 문제라도 생겼나?”
웅성거림이 커졌다. 김범석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참으며, 그는 굳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약 100억 톤에 달합니다.”
핵폭탄이 떨어졌다.
―우리 미국의 영웅 한서진 박사가 놀라운 사실을 발표했습니다. 바로 금을 기반으로 한 사채를 발행해서 금융 시장을 안정시키겠다는 것인데요. 이와 같은 일이 법적으로 가능합니까?
―네, 가능합니다. 채권은 사실 적법 요건만 갖추면 누구나 발행할 수 있습니다. 전혀 문제될 게 없죠.
―언제든지 채권을 가져오면 증서에 기재된 만큼의 금과 교환해주겠다는 것인데요, 그럼 사실상 화폐나 다름없지 않을까요? 개인이 이런 화폐를 발행해도 문제 없는 겁니까?
―전혀 문제 없습니다. 사실상 화폐처럼 쓰일 가능성은 있으나, 법적으로는 양도성 무기명 채권증서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이 화폐처럼 쓴다고 해서 화폐 관련 법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요.
―100억 톤의 금이면 대체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을까요?
―50경 달러가 조금 넘는 액수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환산하자면 니미츠급 항공모함을 약 6,000만 척을 건조할 수 있는 비용입니다. 지구 전체를 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어마어마한 황금이 풀리면 금의 가치가 폭락하는 게 아닌가요?
―아닙니다. 금은 채권 증서의 가치를 담보하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실제로 한서진 박사는 금을 직접 시중에 풀 계획은 없다고 밝혔습니다. 금의 가치가 어느 정도 하락할 순 있겠지만 사람들이 상상하는 그런 끔찍한 파국은 없을 겁니다. 시장에서는 사람들이 채권증서로 거래하게 되겠죠.
―그럼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요?
―현재 세계적으로 각종 악재가 겹치며 달러의 가치가 불안정한 변동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연방은행이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다는 비난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채권은 그런 혼란을 해결하기 위핸 훌륭한 대안이 되어줄 겁니다.
―경제 혼란으로 미국 시민들이 고통받고 있는데, 정작 월가는 수익을 내기 위해서 일부러 혼란을 더욱 부추겼다는 음모론도 있습니다.
―음모론일 뿐이지만, 중요한 건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음모론을 믿고 있다는 것이겠죠. 하지만 한서진 박사가 금을 담보로 발행하는 양도성 무기명 채권은 그런 혼란을 잠재울 수 있으리라 봅니다.
―채권이 대량으로 시중에 풀리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위조 증서가 나돈다던가.
―정식 화폐 못지않은 충분한 위조 방지 기술을 적용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위조는 어느 시대 어느 때든 늘 있어왔습니다. 냉정히 말해서, 지금 이 순간에도 제3국에서 달러 위조지폐가 계속 생산되고 있을 겁니다.
―채권으로 달러나 기타 화폐들을 마구잡이로 사들이면 정작 한서진 박사는 손해를 보지 않을까요?
―어마어마한 손해를 보겠죠. 하지만 그 손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한서진 박사는 손해를 보는 것 이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보유하게 될 겁니다.
인터뷰에 초청받은 전문가는 확신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기축화폐를 찍어내는 연방은행을 뛰어넘을 정도의 영향력을 갖게 될 지도 모릅니다.
문이 부서질 듯 거칠게 열렸다.
가쁜 숨을 내쉬며 들어선 남자, 카를로스는 회의실에 먼저 도착한 이들이 앉아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창백한 안색을 하고 있었다.
카를로스는 재빨리 자리에 앉았다.
모건은행의 사장이자 전문경영자인 엘른이 회의를 주도했다. 그의 머리카락은 이미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
“설마 한서진 박사가 이런 일을 벌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개인이 화폐를 발행한다는 게 가당키나 합니까? 이건 정말 말도 안 됩니다! 연방정부가 나서서 제재해야 합니다!”
“화폐가 아니라 양도성 무기명 채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름만 교묘하게 바꾼 거지요. 개인 화폐를 발행해놓고 채권 증서라고 우기면 그만입니까? 아니잖아요.”
카를로스는 굳은 얼굴로 임원들의 입씨름을 관전했다.
금 100억 톤짜리 소행성을 지구로 가져오겠다니, 누가 이런 일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저으며 자책했다.
‘희토류를 우주에서 가져올 때부터 예상했어야 했다.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걸.’
땅을 치고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일은 벌어졌고,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기축화폐를 찍어내는 연방은행의 지위만큼은 절대적으로 사수해야 했다. 연방은행의 주주 일원으로서 묵과해서는 안 된다.
어느 임원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번에 통과된 화폐 관련 법안에 문제가 있습니다.”
“갑자기 그 이야기가 왜 나옵니까? 그리고 문제가 있다니요?”
‘금권’으로 인한 달러의 지위 약화 문제 해결을 위해 골몰해야 할 판에, 엉뚱하게 화폐발행 개정안 이야기라니?
임원들은 의아해서 발언자를 바라보다가 하나둘씩 안색이 굳어가기 시작했다. 그들도 뼈가 굵은 전문가, 발언자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개정안은 연방은행 주주들의 권한을 더욱 단단하게 보호하는 조항을 담고 있습니다만……. 이는 달러가 기축화폐일 때나 유의미한 조항입니다. 만약에라도 ‘금권’이 새로운 기축화폐로 등극하게 된다면, 연방은행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바보가 됩니다. 애물단지가 되고 마는 겁니다.”
“설마, 그렇게까지…….”
“동의합니다. 개정안에는 주주들을 위한 갖가지 특혜가 포함돼 있지만, 금권이 달러를 대체한다면 개정안은 전혀 의미가 없게 됩니다.”
카를로스는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그는 주저없이 말했다.
“백악관과 의회를 움직여야겠군요.”
그는 크리스가 대통령이라는 사실에 큰 안도감을 느꼈다.
만약 클레튼이 연임했다면, 기축화폐를 지배하는 자신들은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바보 신세로 전락했을지도 몰랐다.
황금 소행성이 지구에 도착하는 것은 약 5개월 뒤.
그 실체를 아직 접하지 못했음에도, 한서진이 발행한 채권증서는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시장은 가치 유지성이 불안정한 달러 대신 채권증서를 사는 것을 선택했다.
가장 발빠르게 움직인 나라는 일본이었는데, 일본 정부는 보유한 달러의 70% 이상을 주고 채권증서를 사들였다. 나머지 30%는 어디까지나 단기 유동성의 편의를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3조 5,000억 달러를 보유한 한국도 부랴부랴 나서서 모든 외화를 채권증서로 바꿨다. 양국의 기업들도 이런 흐름에 재빠르게 가세했다.
미국 대기업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쌓아두고 있던 달러를 전부 채권증서로 바꿨다.
H컨설턴트는 달러와 채권의 교환 비율을 매일 일정하게 정해 발표했다. 시중 달러 가치에 따라 교환 비율을 달리 책정한 것이다.
“널뛰기 하는 달러 대신 금으로 바꾸는 게 낫지. 채권증서는 결국 금이나 마찬가지잖아. 게다가 별다른 부가세가 들지도 않아서 좋다.”
“탐욕스러운 연준위를 믿느니 한서진 박사를 믿는 게 천 배는 낫다.”
미국 기업, 그리고 한국과 일본 두 나라 정부와 기업들이 정신없이 달러를 처분하기 시작하자, 다른 나라들도 이에 질세라 흐름에 가세했다.
채권은 종이 형태뿐만 아니라 전자 형태로도 팔고 있었기에, 어마어마한 주문이 쏟아져 들어왔음에도 물량이 밀리는 바 없이 즉각적인 거래가 이뤄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 일이 일어났다.
맥플이 SJ인더스트리로부터 구매한 5억 달러어치 반도체 대금을 골드 채권으로 지불했고, SJ인더스트리가 그것을 수락한 것이다.
최초로 벌어진, 골드 채권을 통한 민간 기업 간의 대금 거래였다.
============================ 작품 후기 ============================
달러를 흡수하고 흡수하고 또 흡수할 것이다.
세상에 달러가 모두 사라질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