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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391화 (391/609)

00391  침략 예고  =========================================================================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한국에 잠시 들어오십시오.

전용기에 탄 채 태평양 상공을 날고 있던 정지원은 차분했던 한서진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부탁을 띠고 있으나 분명한 ‘지시’, 그러나 거북하기는커녕 오히려 흥분이 되었다.

한서진이 지시를 내린 적은 손에 꼽을 만큼 적다. 캘리포니아 대지진 때를 제외하면, 오롯한 자기 의지에서 발현한 지시는 사실상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항상 정지원이 기획을 세우고 보고하면, 한서진은 별 말 없이 그것을 승인했다. 지금까지는 그런 식이었다.

―연방은행 주주들과 달러의 기축화폐 관련 문제입니다.

가슴이 두근거리며,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다리를 바꿔 꼬며, 정지원은 흥분한 심장을 달랬다. 머리와 가슴을 메운 뜨거운 기대감은 좀처럼 식을 줄을 몰랐다.

“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고.”

일본은 거침없이 움직였다.

자기들 입맛에 맞게 편찬한 역사 교과서를 한국 외교부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정식으로 발간했으며, 독도 영토권 문제를 국제재판소에 또다시 상정했다. 위안부 문제를 자극하고, 유명 인사들의 신사 참배가 줄줄이 뒤를 이었다.

거리에는 일장기를 이마에 두른 채 반한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청년들이 득실거렸고, 한인이 운영하는 상가에 원인 모를 불이 나기도 했다.

일본의 지속적인 자극에 국민들은 극도로 화를 내며 반일 운동에 나섰다. 주한 일본 대사관 앞은 항의하는 시민들로 바글거렸고, 인터넷에서는 일본을 향한 온갖 조롱이 터져 나왔다.

양극 간에 갈등이 심화되었고, 일본 정부는 한일 무역 제재를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일본 정부와 국민, 그리고 자국민들한테 둘러싸인 채 얻어맞기만 하던 한국 정부는 화들짝 놀랐다.

“무역 제재?”

“네, 그렇습니다. 일본 내각에서 흘러나온 정보인데…… 아무래도 단순한 으름장식이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 이베이 내각은 매우 심각하게 이 사태에 임하고 있습니다.”

“아니, 무역 제재에 들어가면 일본이 더 손해 아닌가?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도원패 대통령은 이베이 총리의 생각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핫라인을 요청해도 받아주지 않고, 물밑에서 사전 교섭을 이루는 것도 불가능했다.

지금 일본 정부는 철저히 한국 정부와 친일 기득권을 외면한 채, 단독 플레이를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전술을 들고.

“일본 기업들이 수입하는 희토류 양이 얼마인데, 무역 관계를 건드리겠다고?”

이해할 수 없는 일본의 행동, 하지만 대통령은 어느 정도 자신하고 있었다.

‘희토류 카드는 우리가 쥐고 있어.’

과거 중국이 희토류를 자원무기로 활용하여, 결정적인 순간마다 일본을 굴복시켰던 것을 상기했다. 한국도 그러지 못하리란 법은 없다.

“한서진 박사…… 아니, H그룹에 연락해서 미리 대비해. 여차하면 HAMC를 움직일 수 있게끔.”

“알겠습니다.”

“이놈들이 단단히 미쳐 가지고. 어디 누가 이기나 보자.”

꽤 오랫동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이웃나라. 그렇기에 얻어맞은 뒤통수가 더 아프고, 배신감은 피처럼 찐득했다.

HAMC는 비록 러시아 기업이지만 한서진의 소유나 다름없다. H그룹을 통하면 충분히 이쪽의 의도를 관철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한서진은 몰라도 백철중 회장은 뼛속까지 이 나라 국민, 정부의 협조 요청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아직도 못 알아냈나? 이베이 내각이 대체 왜 저러는지 말이야.”

“죄송합니다. 정보 수집이 쉽지 않습니다. 다만…….”

대통령은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쳤다.

“다만 뭐? 뜸들이지 말고 어서 말하게!”

“이베이 내각이 먼저 시작한 게 아닌, 일본 재계에서 최초로 촉발되었다는 정황이 있습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닙니다.”

“일본 재계에서?”

대통령은 의아했다.

무역 제재까지로도 번질 수 있는 심한 외교적 갈등, 이는 장사로 벌어먹고 사는 기업들에게 좋은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일본 재계에서부터 시작된 일이라고? 대통령은 이해가 안 갔다.

“의심되는 기업이라도 있나?”

“네, 현재로서는 스토미 그룹이 이베이 내각을 움직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궁금해서 죽을 뻔했다. 전용기가 느리다고 느껴진 것도 참 오랜만이었어.”

정지원의 얼굴에는 미열을 띤 흥분이 가득했다.

한서진은 차분히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왜 정 사장님을 호출했는지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계시겠지요?”

“화폐자본가들한테 한 방 먹여주려는 건 알겠어. 그런데 그 방법이 짐작이 가지 않아.”

“그새 상상력에 녹이 슬었군요. SJ인더스트리 사장 자리가 편하긴 편하셨나 봐요?”

“그런 게 아니라, 한 방 먹일 방법이 너무 무궁무진해서야. 뭘 해도 그들에게는 뼈아픈 한 방일 테니, 네가 어느 걸 고를지 짐작도 못하겠다.”

“사실 전제부터 틀리셨습니다.”

“……?”

“그들에게 한 방 먹여주려는 게 아니라, 치명타를 안겨줄 생각입니다. 치사율 100%짜리로 말이죠.”

여유가 넘치던 정지원의 얼굴이 조금 경직되었다.

한국으로 오는 동안, 전용기 안에서 그는 다방면에 걸쳐 상상력과 직관력을 발휘했다. 한서진이 어느 방법을 구사할진 모르지만, 그 행동 목적만큼은 크게 좁힐 수 있었다.

연방은행을 손에 넣거나, 혹은 살점을 빼앗거나.

전자는 아무리 한서진이 미국의 구국영웅이라 해도 ‘당장에는’ 불가능하다고 봤다. 그러나 후자는 충분한 승산이 있었다.

한서진이 ‘지분 참여’에 나서겠다면, 화폐자본가들은 받아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오히려 기꺼워할지도 모른다.

그를 울타리 안으로 편입시키고 친분을 쌓는다면, 기축화폐의 지분을 약간 넘겨주는 것 정도는 합리적인 지출일 테니.

그러나 지금 한서진의 말은 자신의 짐작이 전혀 틀렸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연방은행을 아예 빼앗을 셈이냐? 하지만 그건 아무리 너라도 불가능해.”

“과연 그럴까요?”

“모든 것을 빼앗겠다면 저들도 작정하고 끝까지 발버둥칠거야. 아무리 강한 제국의 황제라도 모든 왕국을 복속시키진 못해. 차라리 적당한 선에서 기선제압을 하고, 일부 지분을 뜯어내는 게 나아. 저들도 오히려 환영할 거다.”

정지원은 숨을 고르고, 강한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크렘 회장과 친구들도 최종적으로는 그게 이상적인 강화 조약으로 여기고 있어.”

한서진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저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군요?”

“……그게 무슨?”

“제가 노리는 건 그들이 가진 거위떼 중에서 몇 마리를 얻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정지원의 안색이 더욱 딱딱해졌다. 한서진의 어조는 단조로웠지만, 목소리에서는 범상치 않은 기세가 묻어나왔다.

섬뜩한 직감이 정지원의 뇌리에 스며들었다.

거위떼 중 몇 마리를 얻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거위떼 전부를 빼앗으려는 것 같지도 않다.

일부를 얻거나, 전부를 뺏는 것. 그 어느 쪽도 아니라면?

“전 그들이 가진 거위떼를 몽땅 없애버리고 그 땅을 빼앗을 생각입니다.”

“땅을 빼앗아서 뭘 하려고?”

“당연히 소떼를 키워야지요. 최상급 육질을 가진 종으로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미소, 정지원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거위를 쳐왔어. 그 땅은 끝이 없을 만큼 넓다. 그만한 땅을 채울 머릿수가 되냐?”

“오히려 땅이 모자랄 것을 걱정해야 할 겁니다.”

“희토류는 화폐의 기준가치를 나타내지 못해. 다른 자원이라면 모를까…… 아, 설마?”

문득 깨달았다는 듯이 정지원이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한서진은 피식거리며, 비로소 벽면의 대형 스크린을 켜서 보여주었다.

우주 공간을 홀로 차지하고 있는 소행성을 본 순간 정지원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금 100억 톤입니다. 달러로 환산하면 50경 달러 정도 되겠군요. 이만하면 지구 전부를 커버하고도 남겠죠?”

홀린 듯이 시선을 떼지 못하던 정지원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부스러기만 가져와도 지구 경제는 끝장나겠다.”

“인류 경제를 파탄 낼 마음은 없습니다. 그저 거위 대신 맛있고 육질 좋은 소떼를 키우려는 거지요.”

정지원은 머리가 좋다. 단숨에 한서진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소행성을 전부 지구로 가져올 마음은 없구나?”

“외출할 때 전 재산을 몽땅 들고 다니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번거롭게. 그날그날 쓸 만큼만 들고 나가는 거지요.”

“하긴…… 금 100억 톤을 실제로 소유하고 있고, 언제든지 필요한 양을 조달할 수 있다는 신용만 구축하면, 네가 종이에 적는 숫자가 곧 금이나 마찬가지지.”

그가 휴지 조각에다가 ‘금 1톤’이라고 적으면, 그 휴지 조각은 곧 금 1톤과 동등한 가치를 가지게 된다. 상상만 해도 우스운 일이 아닌가.

비로소 정지원은 충격에서 벗어나, 재미있다는 웃음을 지었다.

“미국, 아니 달러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실체 없는 막연한 신용이란 지위만으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니.”

신용이란 허상으로 가치를 유지하는 달러와, 실제로 존재하는 금의 소유권을 대신하는 화폐. 어느 쪽에 더 탄탄한 신용이 실릴지는 뚜껑을 열지 않아도 뻔하다.

“이 정도 차이면 거위와 소가 아니라, 거위 고기와 용 고기라고 해야겠는데.”

“크렘 회장과 친구들에게는 비밀로 해주십시오.”

“안심해. 지금 그럼 이 계획을 아는 건 너와 나뿐인가?”

“크리스 대통령도 알고 있습니다.”

“크리스 대통령이?”

몹시 뜻밖이라는 듯 정지원은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납득한 듯이 끄덕거렸다.

“적군이 이만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면, 제아무리 충성스러운 선봉장이라 해도 백기 투항할 수밖에 없겠지. 하물며 충성심이 그리 깊지 않은 인물이면 말할 것도 없지.”

“의외로 말이 잘 통해서 좋더군요.”

“자수성가로 그만한 부와 직위를 쌓은 사람이다. 무엇이 진짜 중요한지는 충분히 간파할 수 있겠지.”

정지원은 대견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완전히 네 사람으로 만든 거냐?”

“글쎄요. 적어도 대세가 뭔지는 뼛속깊이 느끼고 있을 겁니다. 감히 역류를 시도하진 못하겠지요.”

“나라도 그럴 거다.”

정지원은 밝게 웃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이 설명해주고, 가르쳐주고, 이끌어주던 어수룩한 청년은 이제 더 이상 없다.

평소에는 없는 듯이 잔잔하다가도, 한 번 결정을 내리면 무시무시한 자연재해로 돌변하는 넓은 바다가 있을 뿐이다.

“모처럼 내가 할 일이 많아지겠어.”

“조만간 크리스 대통령이 정 사장님께 연락을 할 겁니다. 미리 대비해 주세요.”

“알겠다.”

정지원은 흥분을 가득 안은 채 돌아섰다.

연방은행을 뺏는 게 아니라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새로운 질서를 뿌리내린다.

창과 활로 전쟁을 대비하는 이들에게, 한서진은 미사일 소나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님, 그건 좀 반칙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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