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390화 (390/609)

00390  회유  =========================================================================

―일본 이베이 총리의 신사 참배 문제가 또 한 번 한일 외교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우리 외교부는 총리의 거듭된 신사 참배에 난색을 표하고 있으며, 적극적인 항의의 뜻을 관철할 것이라 밝혔습니다. 한편…….

―새롭게 편성된 일본 교육 교과서에 과거 일제 식민지배에 관해 철저히 왜곡된 관점이 담겨…….

일본의 신사 참배 및 역사 교과서로 인한 외교적 갈등이 불거지며, 도원패 정부는 난처한 지경에 빠졌다. 일본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이 심화되고, 무역 등에서 일본이 진지하게 제재를 검토하고 있음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일본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건가? 그동안은 조용했잖아.”

“일본 정계에 닿은 선을 이용해 알아보려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다만 중진 의원들이 접선을 회피하거나 부담스러워하는 기색이 있었습니다.”

“뭘 원하는 거지?”

“…….”

도원패 대통령이 답답한 듯 말했으나 측근들은 뾰족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과거 일본은 역사와 영토 문제를 가지고 수없이 많은 도발을 해왔다가, 최근에는 비교적 잠잠했다. 한서진의 존재를 의식했기 때문이다.

HAMC가 우주 희토류 금속을 판매하면서부터는 태도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일본의 첨단 제조 산업에는 희토류 금속이 필수였고, HAMC는 독점적으로 희토류를 공급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려야 할 입장이 뒤바뀐 것이다.

그랬는데 갑자기 일본의 입장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예전처럼 원상 복귀하니, 도원패 대통령은 답답해서 가슴을 쳤다.

‘왜 하필 내가 집권 시작할 때 이러는 거지?’

그의 속마음은 딱 그런 심정이었다.

“일단 최선을 다해 알아내. 그놈들이 대체 이제 와서 갑자기 왜 그러는지. 미친 짓을 할 때에는 뭔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대통령은 갑갑함이 가득 쌓인 으름장을 마지막으로 회의의 끝을 맺었다.

국내 1위의 재벌기업 H그룹은 본래의 사업에도 충실하지만, 한서진의 친위군으로 기업의 정체성이 변한 지 오래였다.

사업을 확장하고 이익을 내는데 열심이지만, 한서진을 보필하는데 지장이 된다면 아무리 큰 이익도 과감히 포기한다. 그를 보조하는 것 이상의 이익이란 있을 수 없기에.

근래 일본의 태세 변환은 H그룹 경영진에도 긴장감을 주었다.

“이베이 내각이 대체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이것들이 단체로 약을 먹었나?”

한서진이 미국 명예시민이 된 이후, 일본은 꾸준히 해오던 역사, 외교적 도발을 잠시 중지했었다. 미국을 중시하는 일본으로서는 당연한 숨고르기였다.

역사 및 영토 문제로 한국, 아니 한서진의 심기를 자극했다가 미국을 포함한 삼파전이 되면 골치 아프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기간 숨고르기를 하던 중 한서진이 HAMC를 통해 인공 운석 사업을 터트리자, 그 상태는 완전히 고착화 되었다. 미국의 눈치가 문제가 아니라, 희토류 공급이 영원히 중단될 수도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눈치만 보던 극우 언론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예전처럼 활발히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박사님 눈치를 더는 보지 않겠다는 것 같은데요. 박사님이 국내 정치 사회 문제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것 같습니다.”

“한국이 일본의 숨통을 조일만 한 카드는 영일그룹과 HAMC 정도입니다. 그런데 HAMC는 어차피 러시아에 있어서 한국 정부가 행사하기 불가능하고, 영일그룹도 비슷하죠.”

“극단적으로 영일그룹과 단절관계가 된다 해도 H시리즈야 의약품이니 일본의 경제와 정치에는 별 상관이 없으니까요. 환자들만 고생하는 겁니다.”

쏟아지는 의견을 듣던 박지훈 전략기획실장이 의문을 제시했다.

“다들 이유가 그럴듯하긴 한데, 결국 일본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건 설명은 안 되잖아. 안 그래?”

“…….”

“지금 어쨌든 간에 걔들은 박사님 앞에서 몸을 사려야 할 판이라고. 아니, 지금 세상에서 안 그런 사람 있나?”

다른 이가 조심스럽게 동조를 나타냈다.

“박사님이 국내 정치 사회 문제에 관심이 없다 해도 엄연히 우리나라 사람이니, 일본으로서는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게 백 번 낫지요. 어쨌든 희토류라는 목줄이 잡혀 있으니까요.”

“목줄만 잡혔나, 언제든 일본을 때려눕힐 수 있는 큰형님을 도베르만처럼 다루고 있지.”

“…….”

“그런데도 저리 나오는 건 뭔가 확실한 이유가 있다는 거 아니야? 그게 믿는 구석이 있든, 노리는 게 있어서든.”

날고 기는 H그룹이라 해도 일본 내각의 정치적인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기란 불가능했다. 심지어 뚜렷한 정보 소스도 없는 상황 아닌가.

“일단 일본 쪽 라인 더 파헤쳐 보고. 캐낼 수 있는 건 뭐든지 다 캐내. 회장님께서 허가하신 일이다.”

“예, 알겠습니다.”

“박사님이 어찌 나오실지 모르지만…… 일단 회장님은 참지 않으실 작정이다. 회장님 일본 기업에 감정 안 좋은 거 알지?”

맨손에서 H그룹을 쌓아올리는 과정에서 백철중은 일본 기업과 수도 없이 부딪치며 경쟁 또는 협력을 해야 했다. 수십 년 동안 자존심을 굽혀야 했던 것 때문에 적지 않은 앙금이 있었다.

“지금 와서 저놈들이 저런다는 건 박사님을 안중에 두지 않는단 소리다. 이걸 봐줄 수가 있나? 안 그래?”

H그룹은 다가올 전투를 준비하며 칼을 갈기 시작했다.

일본, 스토미 그룹.

일본에서 첨단 제조업으로 1, 2위를 다투는 굴지의 대기업으로, 어느덧 창사 75년째에 달하는 장수 기업으로 유명하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군부의 선택을 받아 전투기 부품을 납품하는 일을 시작했는데, 전후에도 꾸준히 제조업에 노력을 기울여온 덕에 지금의 규모를 갖출 수 있었다.

창시자는 오래 전에 사망했다. 하지만 3대째를 이어온 가업은 이제 완성 단계에 이르러, 일본 정재계에서 총리도 함부로 무시하지 못하는 거물로 거듭났다.

또한 스토미 그룹은 일본 최대의 신문사인 Y신문의 가장 큰 스폰서이기도 했다.

최근 한국을 중심으로 세계 질서가 개편되는 분위기라 스토미 그룹도 납작 엎드린 채 태풍의 방향을 가늠하는 중이었다.

태풍의 눈인 한서진이 어떤 행보를 취하느냐에 따라 그룹, 크게는 국가 전체가 방침을 수정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 날도 스토미 그룹 회장 유츠키 회장은 출근 전에 Y신문을 읽으며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이베이 내각, 영토 문제 더 이상 좌시해서는 안 돼.

―지금이야말로 센카쿠 문제를 공고히 할 때.

―크리스 정권, 백악관 비공개 만찬에서 일본 지지 의사 밝혀.

신문에는 현 내각이 좋아할 만한 입맛의 기사들이 가득했다. 기사를 읽어 내려가며 유츠키 회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지금 상황에서 한국을 자극하는 게 과연 잘하는 짓일까? 유츠키 회장은 여간 탐탁지 않았다.

주변의 시선을 고려하지 않고 혼자 움직일 수 있었다면,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 친구들’의 압박에 어쩔 수 없이 그도 참여해야 했을 뿐.

“회장님, 카이고르 컴퍼니의 구프게니 고문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고문님이?”

비서의 보고에 유츠키 회장은 벌떡 놀라서 찻잔을 내려놓았다.

구프게니 키신, 인연을 맺은 지도 벌써 수십 년이 넘은 인물이었다. 마지막으로 연락이 닿았던 것도 무려 삼 년 전이었다.

전혀 생각지 못한 만남, 하지만 유츠키 회장은 얼굴 가득 반가움을 띠고 달려 나갔다.

“고문님! 정말 반갑습니다! 일본에는 언제 오셨습니까?”

“이제 막 들어왔네. 자네 얼굴을 좀 보려고.”

“연락이라도 주시고 오셨으면 제가 신경 써서 맞이했을 텐데요. 그래도 정말 잘 오셨습니다.”

유츠키 회장의 얼굴에는 진심 어린 기쁨이 가득했다.

그는 약 20년 전, 구프게니를 통해 카이고르 컴퍼니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첨단 기술 제휴는 물론 각종 공동 프로젝트 연구를 통해 스토미 그룹을 거듭 발전시켰고, 지금의 규모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카이고르 컴퍼니는 지금도 미국 내에서 알아주는 첨단 화학 기업이며, 구프게니는 현직에서는 은퇴했지만 회사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고문이었다.

“스토미 그룹은 요즘 어떤가?”

“세계적인 불황 아닙니까. 꾸려나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엄살은. 자네 같은 사람이 그리 말하면 평범한 월급쟁이들은 어떻게 살라고.”

“저도 출근 도장만 찍어도 누가 따박따박 월급 줬으면 좋겠습니다. 장사 해먹기가 여간 쉬운 게 아닙니다.”

50이 넘은 유츠키 회장은 마치 청년처럼 활발한 표정을 띤 채 농담을 섞어가며 이야기를 나눴다.

미소를 띤 채로 가벼운 일상 이야기를 나눈 뒤, 구프게니가 조용히 화제를 돌렸다.

“요즘 미국 쪽 친구들 때문에 꽤 골치가 아프다지?”

“……아시는군요.”

유츠키 회장의 얼굴색이 변하며, 동시에 긴장감이 서렸다. 그것은 의심보다는 경계심에 가까웠다.

“알다마다. 그 친구들 때문에 요즘 워싱턴이 꽤 시끄럽거든.”

“그렇습니까. 그쪽에도 관심이 많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내 친구들 사이에서도 말이 많다네. 달러쟁이들이 조폐권을 지키기 위해서 국제 정세를 흔들고 있는 것 때문에 걱정이 많지.”

유츠키의 표정이 좀 더 신중해졌다.

그가 지난 수십 년 간 알기로, 구프게니는 공학자 출신의 기업가였다. 지금도 카이고르 컴퍼니에 상당한 지분을 갖고 있으며, 첨단 과학 연구를 선도하는 데 관심을 쏟고 있었다.

“처음 듣습니다. 고문님께서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건.”

“자네와 친구들, 그리고 이베이 내각도 화폐 자본가들의 부탁을 받았을 걸세. 한국을 적당히 흔드는 시늉을 해달라는 거겠지.”

“…….”

“왜 그리 놀라나?”

구프게니는 미소를 지었지만, 유츠키 회장은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그가 정확한 사실 관계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Y신문 등 일본 주요 언론이 그동안의 잠잠함을 떨치고 반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도, 이베이 총리의 신사 참배 등 외교적 자극이 빚어지기 시작한 것도, 전부 미국 최대 자본가들의 부탁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유츠키 회장은 충격을 겨우 가라앉히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고문님도 그쪽에 지분이 있으십니까?”

“아니, 그렇지는 않네.”

“그럼, 어떻게 그렇게…….”

“카이고르 컴퍼니는 세계 전역에 많은 눈과 귀를 두고 있거든. 금융 경제에는 관심이 없지만 항상 작은 변화도 놓치지 않고 체크한다네.”

이 순간 유츠키 회장의 마음속에 자리자고 있던, 순수한 첨단 화학 기업이었던 카이고르 컴퍼니의 이미지가 완전히 변했다.

“왜 그들이 한국을 흔들어 달라고 했는지 이해하나?”

“외교적인 갈등을 일부러 조장하고 중재를 통한 회유가 아닐지…….”

“현상만 이해하고 있군. 근본적인 이유는 지분율 다툼일세.”

“……?”

“한서진 박사는 연방은행의 지분을 원하고 있고, 그들은 최대한 적은 양을 양보하려 하지. 그 과정에서 서로 간에 힘겨루기가 벌어진 걸세. 더 주거나 더 받거나, 기싸움이 시작된 거지. 일본은 화폐 자본가들의 총알받이가 된 거고.”

유츠키 회장은 시야가 한순간에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왜 한일 외교 갈등을 조장하라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구프게니의 설명을 들으니 막힌 귀가 뚫리는 느낌이었다.

“그럼 우리 스토미 그룹은 어떡해야 합니까?”

“양측은 끝까지 가지 않네. 중간에 타협하게 될 걸 서로 인지하고 있지. 당연히 양측의 눈밖에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겠나? 철저히 미국의 뜻을 따라서 한국의 신경을 외교적으로 자극하게. 역사 왜곡이든 영토든 경제든, 뭐든지 빠뜨리지 말고 걸고넘어지란 말일세.”

“그럼 한서진 박사가 불쾌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양쪽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을 때, 시원하게 나서서 일본을 징계한다면?”

유츠키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 되면 한서진은 진짜 한국의 영웅이 된다. 미국의 영웅이라서 존경받는 게 아닌, 진짜 한국을 위한 영웅이.

“이게 한서진 박사가 그리는 큰 그림일세. 알겠나?”

유츠키는 왜 몇 년 만에 구프게니가 자신을 찾아왔는지, 그 이유를 이해했다.

일본이 청군의 선봉이듯, 그는 백군의 선봉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오랜 인연인데…… 미안하게 됐군.’

구프게니는 차안에서 유츠키 회장 사택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가 회장에게 한 말은 대부분 거짓이었다. 한서진의 지령 따위를 받은 적은 없었다.

물론 작은 부탁을 하나 받긴 했다.

‘화폐권자들을 막거나 견제하지 말아 주십시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해주십시오.’

그 부탁을 듣는 순간 구프게니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짜릿함을 느꼈다. 자신이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다는 희열도 함께.

“큰 전쟁을 위해서는…… 큰 명분이 있어야겠지.”

하물며 상대의 모든 것을 빼앗으려는 대전쟁이라면.

============================ 작품 후기 ============================

큰 힘에는 큰돈이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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