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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389화 (389/609)

00389  회유  =========================================================================

끼이익, 하며 육중한 문이 옆으로 열렸다.

차가운 대리석으로 된 복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끝없이 뻗은 어둠을 주시할 무렵, 갑자기 천장에서 일제히 불이 켜지며 대낮처럼 환해졌다.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된 흰 드레스를 입은 왕비 스칼린은 신기한 듯이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여긴 어디인가요?”

“왕실 기록서요. 레노지안의 역사를 포함해서 모든 기록을 보존하고 있는 곳이라오.”

“어머, 정말요?”

“당연히 왕비도 기록되어 있소.”

“와, 진짜요? 보고 싶어요.”

왕은 미소를 지으며 안에 들어섰다. 차가운 대리석에 굽이 닿는 소리가 멀리까지 울렸다.

입구에는 직사각형 돌이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었다. 그 중심에는 직경 50cm 정도 되는 붉은 원이 그려져 있었다.

왕이 붉은 원에 손바닥을 대자, 원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스칼린이 신기해서 바라보고 있을 때, 허공에 반듯한 사각형의 화면이 떠올랐다.

“왕비.”

왕이 돌을 보고 입을 열자 허공의 화면이 여러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빛은 서로 뭉치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다가 곧 복잡한 글자를 만들어냈다.

「스칼린 제다 이온 카르쉬라이.

현 레노지안 왕가의 왕비, 대륙 최강의 여기사.

국왕의 초룡 탐사 여정 도중에 만나 인연을 맺음.

……중략…….」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던 스칼린의 얼굴이 처음에는 흥미롭다가 이내 놀라움으로 물들어갔다. 왕은 재미있다는 미소를 띠고 바라보았다.

그녀는 사색이 돼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어떻게 제가 오늘 아침에 검을 부러뜨린 것까지 기록되어 있는 거예요?”

왕실 기록서에는 그야말로 일거수일투족이 기록되어 있었다. 잠자리 등 은밀한 사생활을 제외하고, 거의 사관이 24시간 따라다니면서 하나도 빠짐없이 작성한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말했잖소. 왕실 기록서는 레노지안의 모든 기록을 보존하는 곳이라고.”

“대체 어떻게…….”

“대마법의 힘이라오. 이 안에 담긴 고대의 보물, ‘진리의 수정’이 24시간 빠뜨리지 않고 대륙 전체를 관찰하며, 실시간으로 모든 기록을 담고 있소.”

“진리의 수정?”

“몇 안 되는 신좌의 유품이오. 카드리안 왕가가 신좌에 앉아 있었다는 증거 중 하나지.”

“…….”

스칼린은 어느 정도 놀라움이 가라앉은 눈으로 진리의 수정을 살피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모든 것을 기록한다면, 초룡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그 점이 이상했다. 초룡이 어디 있는지는 진리의 수정을 통해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을 텐데, 왕은 왜 그렇게 헤맸을까.

왕의 표정이 씁쓸하게 변했다.

“진리의 수정은 대륙의 모든 것을 기록하지만, 그 전부를 열람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오.”

“어째서죠?”

“신좌의 힘을 잃었기 때문이라오.”

“……아.”

“열람 불가능한 지식은 자격이 안 돼서 그러는 것이니, 어쩔 도리가 있겠소?”

스칼린의 얼굴도 안타까움으로 물들었다.

괜히 아픈 상처를 건드린 것 같아 미안해진 그녀는 손가락을 틱틱거렸다. 그러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왕가는 어떻게 신좌를 잃었나요? 혹시 자세한 기록을 볼 수 있을까요?”

“물론이오. 그 정도는 열람할 수 있소.”

왕은 다시 진리의 수정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고 느낀 순간, 그가 입이 열렸다.

“할케냐 전투.”

바로 그 순간, 진리의 수정에서 눈부신 섬광이 뿜어져 나와 사방을 감쌌다. 주변의 모든 풍경이 변했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은 태산, 황금색으로 빛나는 정상을 두고 무수한 군세가 서로 다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초룡이 이끄는 용의 군단, 검과 마법을 휘두르는 전사들이 한데 얽혀 목숨을 던지면서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

마치 전장의 한복판에 뛰어든 듯한 생동감. 스칼린은 고대의 전사들이 내뿜는 투혼의 열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효진씨? 무슨 생각해요?”

“네?”

송하나의 목소리에 신효진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붉은색 악어가죽 핸드백을 살피던 송하나가 피식거렸다.

“불러도 말이 없길래 조는 줄 알았어요.”

“……아. 제가 좀 정신이 없었네요. 요즘 피곤해서.”

“요즘 오빠가 많이 힘들게 하던가요?”

“아이,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어제 잠을 좀 설쳐서…….”

신효진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초고가 명품 핸드백들을 앞에 두고 잠깐 딴생각을 했다니.

“마음에 드는 게 없어요?”

“저한텐 다들 너무 과해요.”

“그래도 몇 개 골라 봐요. 선물이니까 맘 편하게.”

“어떻게 이런 걸 맘 편히 골라요…….”

“괜찮아요. 어차피 오빠 카드로 긁을 거니까.”

송하나는 검은 광택으로 반짝거리는 카드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방긋 웃어보였다.

신효진은 여전히 망설였지만, 송하나가 자꾸만 재촉하자 할 수 없이 몇 개를 집어 들고 만지작거렸다. 가격표가 붙어 있지 않는 게 더 무서웠다.

‘이건 몇 백이나 할까? 아니, 몇 천이 넘을까?’

가격을 물어보고 싶어서 송하나를 슬쩍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이내 알아차렸는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슬쩍 저었다.

“잊었어요? 우리의 규칙?”

“아…… 그건 아니에요. 하지만…….”

“규칙대로 해요.”

규칙. 바로 선물을 받을 때는 가격을 확인하지 말라는 것.

‘스칼린’이라면 태연히 선물을 챙겼겠지만, 신효진에게는 아직 버거운 일이었다.

그렇게 얼마일까 하고 속으로 덜덜 떨고 있을 때였다.

“하나야.”

“오빠? 여긴 어떻게?”

“너 여깄다는 말 듣고 왔어. 아, 효진 씨도 같이 있었네?”

“박사님.”

신효진은 얼른 백을 내려놓고 한서진에게 꾸벅 머리를 숙였다. 그는 눈웃음으로 인사를 건네며 자연스럽게 송하나의 팔을 두드리듯이 매만졌다.

“오실 거면 말씀 좀 해주시지, 이렇게 놀래키는 게 어딨어요? 나 화장도 많이 흐트러졌는데.”

“에이, 넌 화장 안 한 게 제일 이뻐. 그나저나 효진 씨하고 같이 쇼핑 중이었어?”

“네, 효진 씨 선물 좀 해주려고요.”

“잘 됐네. 내 카드로 해.”

“그렇지 않아도 들고 왔어요.”

“잘했어.”

한서진까지 합류하자 쇼핑에 더욱 활기가 띠었다. 내친 김에 백뿐만 아니라 넥타이, 구두, 의류, 시계 등까지 꼼꼼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오빠, 효진 씨 시계 몇 개 해줘도 되죠? 오빠 최측근 비서인데 예쁘게 꾸미고 다니면 더 좋잖아요.”

“응, 그럼. 얼마든지 되지.”

“오빠가 해주면 모양새가 이상하니까 제가 하는 거예요.”

둘은 머리를 맞대고 신이 나서 이것저것 고르고 있었다.

신효진은 몇 발짝 떨어진 채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봤다. 자기들 것도 아니고, 자신의 선물을 고르는데 흥이 난 모습을 보니 왠지 가슴이 뭉클해졌다.

‘잃어버린 신좌…….’

문득 어젯밤 꿈의 기억이 머릿속에 고였다.

진리의 수정이 보여준 오래 전의 기록.

신으로서 레노지안의 세상을 지배했으나 적에게 그 자리를 빼앗기고, 인간의 왕좌로 격하된 카드리안 가문.

그들이 얼마나 치열한 전투와 패배 끝에 신좌를 잃었는지, 그 생생한 과거가 빚어낸 흥분이 여전히 가슴을 채우고 있었다.

‘잘 어울린다, 두 사람.’

신효진은 밝은 미소를 머금은 채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눈이 부실 만큼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그의 옆에 있는 여자가 자신이 아니라는 아쉬움보다는, 꿈의 저편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또 다른 그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도, 이전보다 마음이 훨씬 여유로워졌다는 증거였다.

“효진 씨도 와서 봐봐요. 오빠랑 내가 고른 것 중에 어느 게 더 나아요?”

“그냥 둘 다 해주시면 안 돼요?”

“당연히 둘 다 해줄 건데 어느 게 더 낫냐는 거죠. 어서 골라 봐요. 우리 내기했어요.”

재촉이 담긴 송하나의 얼굴에 피식 작게 웃음을 지은 신효진은 가까이 걸음을 내딛었다.

방한 일정을 어떻게 마무리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측근들은 연회 이후 대통령의 표정이 몹시 나빠졌다는 걸 눈치 챘다. 아니, 측근들뿐만이 아니었다. 그날 연회에 참석한 기업가와 귀빈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대통령의 불편한 심기를 알아차렸다.

‘크리스 대통령과 한서진 박사가 서로 다퉜나?’

‘의견 조율이 잘 안 된 걸까?’

‘혹시 상호보호무역 협정에 한서진 박사가 제동이라도 건 건 아닐까?’

물밑에서 여러 가지 추측이 쏟아져 나왔다.

이번 방한의 진짜 목적은 크리스 정권이 한서진과 돈독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클레튼 전 대통령과 친하게 지낸 한서진과, 새로 백악관을 차지한 주인 간에는 미묘한 불편함이 있으니.

하지만 둘의 관계가 돈독해지기는커녕 오히려 근심거리를 쌓은 듯이 보이자, 측근들은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소문은 순식간에 워싱턴과 월가에도 퍼져 나갔다.

―한서진 박사가 크리스 대통령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이런 식으로 와전돼서 말이다.

매스컴은 매우 조심스럽게 이 사건을 다루었고, 덕분에 대중들은 의례적이고 평범한 방한 일정으로 인식했다. 새 대통령이 동맹국을 순차 방문하는 것은 늘 있었던 일이니까.

그러나 크리스 대통령의 마음이 불편한 건, 그들이 상상하지도 못한 이유에서였다.

‘한서진 박사가 나를?’

미국으로 돌아오는 대통령 전용기 안에서, 크리스 대통령은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이미 워싱턴과 월가에 어떤 소문이 파다한지 들었지만, 그런 것이 눈과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아직도 그날 밤의 기억으로 꽉 차 있었다.

그때의 순간을 상기할 때마다 심장이 부서질 듯이 전율하며 덜컹거리곤 한다.

‘나에게?’

황금으로 구성된 100억 톤의 소행성.

그 존재가 알려지고, 그것을 언제든 지구로 가져올 수 있다는 가능성만 입증하면, 기축화폐의 틀은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한서진이 발행하는 ‘금권’, 즉 금의 교환권리증서가 곧 세계 기축화폐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미국이 한서진과 협의하여, 달러 대신 새롭고 믿을만하며, 안정적인 기축화폐를 내놓은 것으로 여길 것이다.

연방은행에 지분이 없는 다른 자본가와 재벌들도 그 흐름에 가세할 것이다. 결국 머지않아 연방은행은 껍데기만 남고, 화폐 자본가들은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기회는 아직 있습니다.

―출마 배경, 당선 과정이 어떻든 간에 귀하는 현재 세계 최강대국의 대통령이십니다. 그리고 저는 그 나라에서 과분한 명예를 가진 시민이고요.

―기회는 드릴 수 있습니다.

―귀하가 어떤 생각으로 살아왔고, 어떤 일을 해왔던 간에, 지금 미합중국 신임대통령이라는 직위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습니다.

당당한 눈빛으로 그렇게 말하던 한서진은 도저히 어찌해볼 수 없을 거인처럼 느껴졌다. 금 100억 톤이라니, 이건 도저히 계란으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티타늄 바위이지 않은가.

크리스는 주먹을 꾹 쥐었다.

자신을 백악관으로 보낸 ‘친구들’을 떠올렸다. 그들이 약속한 연방은행의 지분이 갑자기 보잘것없는 휴지 조각처럼 느껴졌다.

바로 그때, 한서진의 음성이 마치 곁에 있는 것처럼 귓가에 울렸다.

―무엇이 정말 중요한 건지 생각해 보시지요.

크리스의 표정이 단단해졌다. 이마를 가득 채우고 있던 근심이 어느새 사라졌다.

“그래…… 뭐가 중요한지 잘 생각해야겠지.”

============================ 작품 후기 ============================

뭣이 중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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