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88 회유 =========================================================================
“100억 톤짜리 황금 소행성이라고요…….”
크리스 대통령은 더 이상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수십 년의 정치 관록은 아무 소용없었다. 금 100억 톤, 그 질량이 가지는 경제적인 파괴력에 누르고 있던 사교 미소가 터져 나가고 말았다.
차라리 한서진이 메가톤급 전략 핵미사일 100기쯤 실린 핵잠수함 서너 개를 몰래 보유 및 운용 중이라 해도, 이보다 살 떨리지는 않을 것이다.
금 100억 톤. 그것이 현대 사회에 보여줄 파괴력의 가공함은 핵잠수함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한서진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주시했다.
“왜 놀라시죠? 이미 HAMC는 소행성 파편에서 희토류 금속을 긁어모으는 사업을 시행 중입니다. 당연히 금도 긁어모을 수 있다고 생각하셨을 텐데요. 우주에 금처럼 흔한 게 어디 있습니까?”
“100억 톤을 무슨 재주로 지구로 가져온단 말입니까? 그만한 질량의 운석을 떨어뜨리면 지구는 멸망을…….”
“당연히 희토류 금속처럼 부스러기로 나눠서 떨어뜨려야지요.”
“…….”
크리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각 선진국에서는 HAMC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에테르 파동 중계장치(EWR : Ether Wave Repeater)의 우주 무기 활용 가능성 때문이었다.
HAMC는 EWR의 최대 출력이 2kg이 넘지 않음을 들어, 무기로 활용할 가능성은 낮다고 극구 부인해왔다. EWR을 쓸 바에는 대륙간탄도를 쓰는 게 만 배 이상 효율적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100억 톤짜리 소행성을 잘게 쪼개는 것은, 1, 2kg 미만의 희토류 금속 파편을 지표면에 떨어뜨리는 것과 차원이 다른 큰 물리력이 필요하다.
그런 힘을 우주 먼 공간에 행사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전략병기나 마찬가지 아닌가?
“EWR은 이미 무기화 가능성이 잡힌 겁니까?”
“그건 적절한 예시가 아닙니다. 사실 세상 그 어떤 도구든 무기로 쓸 수 있죠. 당장 제가 쥐고 있는 이 볼펜만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얼마만큼 효율이 있고, 살상력이 있느냐의 문제일 뿐이죠.”
“…….”
“EWR은 천천히 오랜 시간 동안 소행성에 파동을 전달해 그 결합 상태나 궤도를 변경하는 장치입니다. 무기로 이용하기에는 효율이 너무 떨어지죠.”
한서진은 피식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는 지금 100억 톤짜리 운석을 지구에 떨어뜨리겠다고 위협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파괴 병기로서의 가능성은 완전히 부인되었다. 크리스도 그딴 것에 신경을 쏟을 때가 아님을 또렷이 자각했다.
‘경제 무기’로서의 파괴력, 그것에 주목을 해야 할 때였다.
“실물 금본위제를 다시 부활시키겠다는 겁니까?”
“굳이 연방은행을 탐낼 필요는 없겠더군요.”
“100억 톤의 금이 시장에 유통되면 그 가치가 폭락할 겁니다. 종잇조각이나 다름없어지게 됩니다. 그럼 세계 경제는 한순간에 무너집니다.”
크리스가 두려워한 점이 그것이었다.
경제에 문외한이라서 저러는가? 100억 톤의 금이 쏟아져 나왔을 때 시장이 받을 충격은, 대륙간탄도가 전 세계에 쏟아지는 것 이상으로 어마어마할 텐데.
“화폐 제도가 본래 금본위제에서 출발했던가요? 100달러짜리 화폐를 가져오면 그만큼의 금으로 바꿔주겠다는. 금을 기반으로 해서 신용화폐에 대한 신뢰가 구축되었다고 들었습니다.”
한서진이 조그만 전자기기를 책상에 올려두자, 허공에 빛이 쏘아지며 홀로그램 영상을 만들었다. 놀란 반응을 보이던 크리스는 영상에 떠오른 거대한 금색 운석을 보고 신음했다.
“미국은 실질적으로 금 본위제를 폐지했지만, 달러는 여전히 굳건한 신뢰 속에서 기축화폐의 지위를 지키고 있습니다. 금에 대한 신뢰가 미국이라는 국가의 가치로 옮겨간 거죠.”
미국이라는 담보가 망하거나, 그 가치를 상실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국제적인 신뢰가 달러의 가치를 지켜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건 하이스쿨 학생들도 알 만한 이야기지요.”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기축화폐의 지위는 본질적으로 사람들의 신용과 신뢰로 형성됩니다. 그렇다면 굳이 100억 톤의 물량을 시장에 풀어놓을 이유가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설마?”
크리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의 머릿속에 어떤 그림이 구체적으로 그려질 무렵, 한서진이 빠르게 다음 말을 낚아챘다.
“100억 톤을 실제로 보유하고 있고, 언제든지 교환해줄 수 있다는 신뢰만 부여하면, 굳이 100억 톤을 시장에 풀어놓을 이유가 없겠지요. 시장 경제는 붕괴하지 않습니다.”
“박사!”
“50경 달러의 가치에 달하는 새로운 화폐를 찍어낼 수 있는 금의 보유량, 그리고 제 명성이 결합하면 어떻게 될까요?”
“미국은, 결단코 그런 일을 용납……!”
“저 역시 미국인입니다, 크리스 대통령님.”
“……!”
크리스는 머릿속이 아득해진 채 말문이 막혔다. 폭죽이 뇌를 곤죽으로 만들어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의 말대로다.
굳이 100억 톤을 지구에 모두 가져올 필요가 없다. 언제든지 얼마든지 가져올 수 있다는 확실성만 사람들에게 담보해준다면, 100억 톤을 개인 금고에 소유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본래 신용이란 게 그런 것 아닌가.
세계는 더 이상 달러를 신용하지 않을 것이다. 100% 금 교환을 담보하는 새로운 화폐에 신뢰를 부여할 것이다.
연방은행을 굳이 빼앗지 않아도, 기축화폐를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게 된다.
“세상은 미국과 제가 손잡고 화폐의 새로운 질서를 구축했다며 칭찬하지 않을까요? 금리와 화폐 물량 조절로 극소수의 기득권층이 발권이익을 독점하는 지금보다는 나을 테니까요.”
“당신은, 대체 언제부터…….”
“서클이 저의 신경을 자극할 때부터였다고 해두지요.”
온화한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배부른 맹수였다.
크리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어떻게 이 상황을 대처해야 좋을지 몰랐다.
서클이 애지중지 아끼는 달러 발행권 따위는, 금 100억 톤에 비하면 태양 앞의 반딧불이나 마찬가지였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기회는 아직 있습니다.”
“……!”
부드러운 목소리에 크리스는 찬물을 끼얹은 듯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출마 배경, 당선 과정이 어떻든 간에 귀하는 현재 세계 최강대국의 대통령이십니다. 그리고 저는 그 나라에서 과분한 명예를 가진 시민이고요.”
“……박사. 그 말씀은…….”
“썩은 동앗줄을 계속 붙들고 있다가 친구들과 함께 절벽으로 떨어지시겠습니까? 아니면 대통령으로서 영예로운 업적이나마 남기시겠습니까?”
“…….”
크리스는 충격을 받은 얼굴로 멍하니 바라보다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지금 나를…… 회유하는 겁니까?”
“기회는 드릴 수 있습니다.”
“…….”
크리스는 얼이 빠진 채 비틀거리다가 테이블을 짚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등줄기가 어느새 축축해졌다.
이런 순간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서클, 화폐 자본가들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서 그들의 뜻에 따라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최대 걸림돌이 될 한서진과 친분을 맺기 위해 이렇게 한국까지 날아왔다.
그러나 이런 역제안을 받을 줄이야.
“나는 클레튼 대통령을 끌어낸 정적입니다.”
“진정한 정의를 위해서라면, 클레튼 전 대통령도 이해해줄 거라 믿습니다. 그 사람은 저의 절친이니까요.”
“당신의 욕심은…… 대체 어디까지입니까?”
몰랐다. 이렇게 아득한 욕심을 지닌 사람인 줄.
연방은행을 손에 넣는 것을 넘어서, 아예 새 질서를 만들어 무력화시키겠다니. 그 질서를 손에 쥔 후에는 대체 무엇을 하려고 할 것인가.
“적어도 화폐 질서 교란으로 사익을 취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보다는 제 손에서 탄생한 질서가 사람들의 신뢰 속에서 단단히 자리 잡는 세상을 보고 싶군요. 그게 욕심이라면 욕심이랄까요?”
“당신은…….”
“사실 에테르를 연구하는 것도 동일한 이유에서입니다.”
한서진은 그 말을 하면서 불현듯 Table A를 떠올렸다.
질서와 진리의 추구, 어쩌면 그런 점에서 그들과 자신은 닮아 있지 않았나.
몇 백억 불의 돈 방석에 앉아 헤벌쭉 웃는 것보다는, 직접 빚어낸 세계관이 사람들 사이에 자리 잡는 것을 보는 것. 그것이 에테르든, 기축화폐든 간에.
레노지안이나 아서 왕의 질서가 아닌, 자신의 질서를 이 세상에 공고히 뿌리내리는 것이야말로, 그의 욕심이자 꿈이었다.
“왜, 왜 나에게 이러는 겁니까? 대체 왜……!”
“귀하가 어떤 생각으로 살아왔고, 어떤 일을 해왔던 간에, 지금 미합중국 신임대통령이라는 직위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습니다.”
한서진은 천천히 등을 돌리며, 마지막 한 마디를 남겼다.
“무엇이 정말 중요한 건지 생각해 보시지요.”
크리스 대통령을 혼자 남겨두고 홀에 먼저 들어왔을 때,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쏠렸다. 다들 대통령과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궁금해 하는 표정이었다.
중년의 백인 부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있던 송하나가 발견하고 사뿐히 다가왔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길게 나누셨어요?”
“별 거 아냐.”
“설마 다툰 건 아니죠?”
“내가 왜 다퉈. 그래도 명색이 미국 대통령인데.”
“안 그러셨으면 됐구요.”
송하나는 배시시 웃었고, 한서진은 미소 띤 얼굴로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봤다.
스물 한 살, 어린 나이지만 그녀는 다국적 기업가를 남편으로 둔 중년의 부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오히려 젊은 나이와 화사한 미모 덕분에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었다.
다른 남자들이 부러워하는 게 의식된다. 어깨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연방은행 따위야.’
연인인 송하나도 아직 금 100억 톤 소행성에 관해서는 모른다. 누구도 모르는 자신만의 비밀, 그러나 이제는 두 명으로 늘어났다.
‘과연 어떻게 나오려나.’
크리스 대통령은 정치적으로는 부족하지만, 성공한 대재벌이라는 특징이 있다. 화폐 자본가들이 신뢰하고, 공감대를 형성하기 좋은 인재였다.
그들의 뜻에 따라 대통령이 되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그들과 걸음을 맞추려고 할까?
“하나야.”
“네, 오빠.”
“이제 나도 돈 좀 벌어볼까?”
“네?”
송하나는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반응이 귀여워 한서진은 피식 웃어버렸다.
“무슨 말씀이세요? 그럼 지금 오빠 통장에 든 건 뭐구요?”
“그것도 돈은 맞지.”
“세상에서 제일 부자시면서 갑자기 그런 말씀은 왜 하시는 거예요? 잠깐.”
송하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표정을 훑었다.
“오빠, 뭔가 기획한 거 있으신 거네요? 그쵸?”
“뭐, 괜찮은 아이템이 하나 있긴 해.”
“뭔데요? 혹시 연금술이라도 되나요?”
“갑자기 웬 연금술?”
“새 반도체나 의약품 개발해서 파는 걸로 오빠가 ‘돈 좀 벌어볼까’ 이런 말씀을 하시진 않을 것 같아서요. 아예 돌을 돈으로 만드는 연금술 같은 게 아닐까 해서요. 에테르라면 왠지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은데요.”
“연금술이라…….”
한서진은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우주에 있는, 순금으로 된 작은 소행성을 떠올리며 피식거렸다.
“뭐, 비슷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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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야, 이래봬도 형 가슴 꽤 넓다?
너 하나 정도는 안아줄 수 있어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