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387화 (387/609)

00387  움직임  =========================================================================

욕심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은근히 생기려고 한다.

별 것 아닌 듯한 말이다. 그러나 그 대상이 화폐발행권이고, 그 발언자가 한서진이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전 세상을 뒤흔들어놓을 수도 있는 말이다.

그러나 구프게니는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았다.

“기축통화의 운용권이 다른 이에게 넘어가는 것도 질서 재편에 괜찮겠지요. 우리와 마찬가지로 근원을 탐구하는 박사님이라면 더욱 좋겠군요.”

“미국이 휘청거릴 텐데요.”

“박사님 역시 미국 아닙니까?”

구프게니의 눈빛은 차분했다.

통찰안의 힘을 통해 꿰뚫어본 그의 마음은 잔잔했다. 거짓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이 사람들…….’

한서진은 조금 전 그가 Table A를 소개했던 말을 떠올렸다.

오로지 영원한 진리를 탐구하는 자들. 그를 위해서는 어떤 방해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방침.

그들에게 미국이란 나라는 그런 목표 달성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이 수십 년 넘게 미국을 살찌운 것도 도구를 좀 더 튼튼하게 가다듬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화폐발행권이니 기축통화니 하는 것은, 그들의 목적에 조금도 삽입돼 있지 않다.

“박사님이 원하신다면 저희가 물심양면으로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이래봬도 저희는 미국 내 구석구석까지 힘이 닿아 있습니다.”

“화폐 자본가들처럼 대통령도 교체할 수 있습니까?”

“시도해본 적은 없으나,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

“대신 박사님이 저희의 도움을 바라신다면, 조건이 있습니다.”

구프게니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짓궂은 장난을 앞둔 악동 같은 느낌이다.

“뭡니까?”

“머지않아 말씀드릴 때가 올 겁니다. 어려운 부탁은 아니고, 박사님께도 이익이 되는 조건입니다.”

어스름한 저녁.

얇은 가디건을 걸친 한지혜는 캔맥주를 홀짝이며 정원으로 나서다가 멈칫했다.

야외 테이블에 한서진이 혼자 앉아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요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 중이었다.

그녀는 거리를 좁혔다. 적당히 인기척을 냈는데도 한서진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해?”

“어, 한지혜.”

“고민이 가득한 얼굴이네. 별일이다. 오빠보다 사는 게 신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딨다고.”

한지혜는 맞은편에 앉으며 다리를 꼬았다. 한서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팔짱을 끼었다.

“내가 그리 신나 보이냐?”

“신나 보이지, 그럼. 돈 많아, 똑똑해, 유명해, 권력자들 설설 기어, 약혼녀는 절세미인에, 나 같으면 안 먹어도 배가 터질 것 같아.”

“세상에 고민 없는 사람이 어딨냐.”

“그럼 그 고민은 뭔데?”

“…….”

“혹시 오빠 질투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래?”

한서진이 대답을 않자 한지혜는 그렇다고 오해했는지 작은 위로를 건넸다.

“걱정하지 마. 그래도 오빠 욕해서 블랙리스트에 올린 건 아직 10만 명 정도 밖에 안 돼.”

“10만 명이나 돼?”

그쪽으로 별 관심이 없었던 한서진은 뜻밖에 높은 수치에 깜짝 놀랐다. 한지혜는 태연히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응, 오빠가 준 검색 시스템이 낸 통계이긴 하지만. 근데 오빠, 몰랐어?”

“…….”

TF팀에 타르타로스 2의 탐색 기능을 일부 주긴 했지만, 그쪽 자료를 직접 열람한 적은 거의 없었다. 말 그대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뭘 했다고 그렇게 싫어하는 사람이 많냐.”

“원래 못난 것들한텐 잘난 것도 죄야. 나도 예전에 직장 다닐 때 얼마나 시기 많이 받았는데.”

“네가 뭐 때문에?”

“아, 당연히 이 잘난 미모 덕분이었지.”

“…….”

“그래도 오빠 공식 팬클럽 인원만 해도 1억 명이 넘잖아. 겨우 10만 명 가지고 너무 충격 받지는 말고.”

“말은 고마운데, 그런 거 때문은 아니야.”

“그럼 뭐 때문에 그렇게 청승을 떨고 있어? 세상에 부러울 게 없는 남자가?”

“그냥 세상 일이 내 마음대로 안 돼서 고민이다. 머리가 터질 것 같구나, 동생아.”

“어우, 재수 없어. 오빠가 그런 말을 하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라고.”

한지혜가 야유를 보내자 한서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멀리 담장 근처에 세워진 초소에서 잠시 반짝거리는 빛이 보였다가 사라졌다. 아마도 저격수의 라이플 스코프에서 반사된 빛일 것이다.

세연동 저택은 언뜻 보기에 무척 평화로워 보인다.

그러나 그 평온함과 달리 섬뜩한 살벌함이 곳곳에 숨어 있다. 저택 내부에만 15명, 외곽에는 40명의 저격수가 24시간 철통같이 교대 근무를 선다.

담장 외곽 건물 곳곳에 미군이 대기 중인 초소가 있으며, 다수의 차량이 저택 외곽 도로를 상시 순찰한다.

청와대보다 더 철통같은 경비, 그것은 농담이 아니었다.

―박사님께서 달러발행권을 가지시는 것도 괜찮을 겁니다.

구프게니의 말이 계속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건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Table A는 진심으로 자신이 그래도 상관없다고 수긍하는 것이다.

그에게 욕심이 난다고 말했을 때 등줄기가 서늘해진 것은, 자신에게 그런 욕망이 숨어 있다는 것을 그 순간에 처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만족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만족한 척 한 것뿐이었다.’

가진 부에 비하면 사치랄 것도 없는 수준의 부귀영화를 누리며, 연구에 미친 듯이 함몰되어 살았다.

그러나 그것은 욕심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욕심은 일반인이 가늠하기 어려운 수준에 도달했기 때문에 검소해 보일 뿐이었다.

에테르의 지배를 통한 자아실현 충족, 기축화폐를 통한 세계 질서 흐름 통제.

그 정도의 자극이 아니고는 만족할 수 없게 되어, 다른 영역에서는 검소해 보였던 것이다.

“맞다, 그러고 보니 모레 크리스 대통령 만나기로 했지? 설마 그거 때문에 고민인 거야?”

“아, 그게 벌써 모레였던가.”

“뭐야, 그것도 아니었어? 그럼 대체 뭐야.”

한지혜가 실망한 듯이 툴툴거리자 한서진은 난처한 웃음만 조용히 지어 보였다.

“그냥 남들 다 하는 그런 흔한 고민이지, 뭐.”

“대체 뭔데?”

“돈 더 많이 벌고 싶다? 뭐 비슷하네.”

“뭐야. 시시하게.”

여동생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한서진은 기지개를 켰다.

“잘 어울려요.”

반걸음 뒤로 물러선 송하나가 손뼉을 짝 치며 감탄했다.

한서진은 대형 거울 속의 자신을 말없이 주시했다.

사향소 모직과 비큐나의 털을 이용해 짠 원단에 다이아몬드와 사파이어를 아낌없이 사용해서 수작업으로 만든 수트. 한 벌에 3억에 육박한 옷을 걸치고 있지만, 어느덧 그런 것이 당연한 지위가 되었다.

그는 송하나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 원피스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허벅지를 살짝 드러내는 정도의 적은 노출이지만, 다리가 워낙 늘씬해서인지 그마저도 야하게 느껴질 정도다.

반투명한 와인색 시스루 숄을 어깨부터 팔꿈치까지 걸친 모습은 영화 속의 귀부인이 그대로 현실로 걸어 나온 듯했다.

“너도 잘 어울려. 되게 예뻐.”

“정말요?”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다가와서 팔짱을 끼었다.

“갈까요?”

“그래.”

대기실에서 간단히 매무새 검토를 마친 둘은 홀로 들어섰다.

둘이 모습을 드러내자 연회를 채우고 있던 소음이 삽시간에 멎으며, 쥐 죽은 듯한 정적이 이쪽을 주목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시선의 집중, 한서진은 송하나와 팔짱을 낀 채 태연히 걸었다.

고요함의 중심에는 미합중국의 통수권자, 크리스 대통령이 미소를 띤 채 서 있었다.

“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대통령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사님.”

둘이 악수를 나누는 순간, 초청객들의 시선이 한데 쏠렸다. 크리스가 대통령으로서 한서진과 대면하는 첫 공식행사, 매우 의미가 깊은 순간이었다.

“상호보호무역 협정은 잘 보았습니다. 경제와 무역은 잘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인상 깊은 내용이었습니다.”

“세계 제일의 거부께서 경제와 무역은 잘 모르신다니요. 이미 경제 그 자체이신 분 아닙니까.”

“당치도 않습니다. 저는 그저 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크리스 대통령이 주관하는 이 파티는 본래 한국에 체류 중인 미군 사령관 및 기업인, 그리고 주요 미국 인사들을 위무하기 위한 자리였다. 그래서 한국인은 몇 명을 제외하면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즉 미국인들을 위한 미국 대통령의 연회. 한서진은 그런 자리에 귀빈으로서 초대받은 것이었다.

“박사님은 미국 명예시민이지만 한편으로는 한국을 모국으로 두고 있습니다. 상호보호무역 협정은 미국의 영웅이 태어난 나라를 대우해주기 위한 선물이니, 너무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이미 한국 정부와 국민들도 크게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저를 배려하신 건가요.”

“물론이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미국에 불리한 조약을 체결할 리가 있겠습니까.”

크리스 대통령은 한껏 온화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영웅을 위한 선물로, 이 정도는 대단치도 않지요.”

한서진은 웃음을 가장한 채 그를 주시했다.

크리스, 화폐자본가들의 후원을 받는 중국계 대통령.

구프게니는 그가 연방은행을 수호하고, 동시에 그들의 리그에 편입되는 게 목적이라고 했다.

이빨을 보여줄까, 아니면 끝까지 감출까.

짧은 순간이지만 한서진은 고뇌했다. 이미 오기 전에 결정을 내렸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다시 망설임이 들었던 것이다.

“대통령님,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습니까?”

“시간이야 얼마든지 내드려야지요.”

“이런 자리는 곤란해서요. 둘이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미국과 세계의 미래에 관해서 말이죠.”

“…….”

말뜻을 이해했는지 크리스의 안색이 조금 변했다.

나쁘게 여기는 쪽은 아니었다. 한서진이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자는데 싫어할 리는 없다. 더군다나 아직 어떤 내용인지 듣지도 못했다.

“좋습니다.”

크리스는 어느 룸으로 손수 한서진을 안내했다. 경호원들이 따라붙었으나 문 앞에서 그들마저 물렸다. 룸 안에는 한서진과 크리스만 남게 되었다.

“대통령으로서 박사님과 대면하는 건 처음이군요.”

크리스가 샴페인 잔을 내밀며 건배를 청하자 한서진도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

“이렇게 기꺼이 시간을 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저야말로 다시 한 번 감사할 뿐입니다.”

일상적인 대화를 가볍게 나누면서도, 둘은 서로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것은 대화라는 연막 속에 감춘 신경전이자, 칼부림이었다.

먼저 칼을 뽑아든 것은 한서진이었다.

“대통령님과 연방준비위원회의 관계를 알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그들을 소유한 자들과의 관계겠지요.”

“그렇습니까.”

“전혀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박사님도 미국에 많은 친구들이 있는 분이니까요.”

“제가 그들, 그리고 대통령님께 걸림돌이 됩니까?”

“그럴 리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미국 내 어느 인사든 박사님과 두터운 친분을 쌓기 위해 안달이 나 있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이 불필요한 경계심을 품고 있는 것 같아서 꺼림칙합니다. 정작 저는 연방은행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인데 말이죠.”

“힘을 가졌다는 것은 그 자체로 주변의 두려움을 불러 모으는 법입니다. 해결 방법은 간단합니다. 친구가 되는 거지요.”

크리스의 의도는 안전하게 손을 잡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한서진은 마치 그에 응하듯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미 정부의 양해와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어서 이렇게 둘이서 뵙자고 청했습니다. 다름이 아닌 HAMC에 관련 된 일입니다.”

“어떤……?”

“에테르 탐색을 통해 금으로 된 작은 소행성 조각을 추적 중입니다. 지금부터 궤도 수정 작업에 착수하면 2년 안에 지구 궤도에 끌어올 수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금……? 소행성 조각이요?”

“100억 톤 정도 됩니다. 우주에 비하면 미미한 양이지요.”

하얗게 질린 얼굴을 가까스로 감추는 모습에, 입안에 고이는 술이 무척 달게 느껴졌다.

============================ 작품 후기 ============================

“화폐발행권에 욕심이 나더라고요.”

우주에서 기축화폐를 찍어 보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