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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386화 (386/609)

00386  움직임  =========================================================================

“한국을 최종적으로 달러통화국으로 만드는 겁니다.”

덤덤한 한 마디였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까지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만약 이 대화가 외부에 알려졌다가는 감당 못할 충격이 한국 사회를 잠식할 것이다.

구프게니는 한서진의 안색을 차분히 살폈다.

그는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 약간의 반응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흔들리지 않았다.

“별로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아니오, 놀랐습니다. 그것도 아주 상당히요.”

“예견하신 것 같진 않습니다만.”

“예견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군요. 솔직히 상상도 못했습니다.”

말에 담긴 내용과 말투가 전혀 다르다.

표정과 음색을 보면 조금도 놀란 것 같지 않다. 마치 그게 어때서, 라고 반문하는 듯하다.

구프게니는 뚫어져라 주시하다가 팔짱을 끼었다.

“놀라신 것도 아니고, 예견한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제 말을 불신하는 것도 아니군요. 솔직히 저야말로 놀랐습니다.”

“왜죠?”

“박사님이 이런 반응을 보이실 거라고는 예상을 못했거든요.”

구프게니는 피식거리며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잔이 접시에 부딪치는 소리가 맑게 울렸다.

한서진은 덤덤히 말했다.

“일단 자세한 설명을 부탁합니다. 한국을 달러통화국으로 만들려 한다는 게 무슨 말인지요.”

“좋습니다.”

구프게니는 표정에 품고 있던 의아함을 깔끔히 털어냈다. 몸을 조금 앞으로 내민 그는 누가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조약의 핵심은 한국을 마치 미국의 주와 다름없이 동등한 무역, 경제적 보호를 해주겠다는 겁니다. 물론 한국 역시 미국에 똑같은 혜택을 베풀어야 하지만, 체급 차이를 고려하면 한국이 일방적인 수혜를 입게 되는 모양새가 됩니다.”

“…….”

“풍성한 먹이를 베풀어 오랫동안 길을 들이는 거죠. 미국의 우산이 만든 그늘에 오랫동안 만족하면 할수록, 한국은 경제 독립성을 잃게 됩니다. 최종적으로는 미국 경제에 완전히 귀속될 수밖에 없겠죠.”

“그때 가서 한국을 압박하여 달러통화국으로 사회를 뜯어고친다는 겁니까?”

“아니요, 그때가 되면 오히려 한국이 간절히 원하게 될 겁니다. 달러통화국으로 변신하기를.”

“…….”

“미국은 한국의 간절한 애원을 못 이긴 척 받아들여서 큰 수혜를 베푸는 거지요. 국민들이 보기에는 참 아름답고 끈끈한 모습이 되겠군요.”

“미국으로서는 손해 볼 것 없는 장사군요.”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적어도 경제적인 측면 하나만 고려했을 때, 말입니다.”

“그런데 왜 훼방을 놓으시려는 겁니까?”

미국에 해가 될 게 없는 계획, 그런데 왜 미국인인 그가 반대를 한다는 것일까.

―제 소개를 하기 전, 먼저 제가 박사님을 뵙자고 한 용건부터 말씀드려도 될까요?

한서진은 아까 구프게니가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이미 그는 자기소개를 했었다. 그런데 굳이 ‘소개를 하기 전’이라고 말을 했다.

말의 중복실수라고 넘어가면 되지만, 무언가가 거슬렸다.

‘이 사람, 뭐지?’

한서진은 잠시 두 눈을 감았다 뜨며, 정신을 집중했다. 주의력을 깊이 끌어올려 두 눈에 담았다.

보이지 않는 빛이 번져 나가며, 풍경이 다르게 보인다.

나날이 숙달되어가는 통찰안은 비록 사람의 마음까지 읽지는 못하지만, 사람의 본질이 품은 색깔은 분명히 구별할 수 있었다.

구프게니 키신, 그의 마음이 띤 색채가 선명히 보였다.

그것은 순수한 탐욕이었다. 탐욕이라는 감정이 이렇게 깨끗하게 보일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만큼.

‘대체 뭐지?’

한서진은 눈을 조금 가늘게 떴다.

이해되지 않는 색의 혼합에 당황스러웠다. 이렇게 깨끗한 농도를 지닌 마음의 정체가 탐욕이라고?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그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구프게니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미합중국 독립행정기관 Table A의 부팀장 구프게니 키신, 그게 저의 또 다른 신분입니다.”

“Table A?”

한서진은 놀라는 척하면서, 슬그머니 손을 아래로 뻗었다. 그가 보이지 않도록 태블릿에 Table A라고 검색 키워드를 넣었다.

구프게니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2차 세계 대전 이전에 설립된, 극도의 재량권을 지닌 독립행정기관이지요. TA의 존재는 미합중국 최고의 기밀이며, 기관 스스로가 원하지 않으면 대통령에게도 그 존재를 밝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대통령도 모르는 그런 기관이 존재하는 걸 미국이라는 나라가 허용할 수 있습니까? 이미 대통령을 넘어선 권력인데요?”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TA는 권력을 가진 게 아니니까요. TA는 오로지 지식을 추구합니다.”

“…….”

지식을 추구한다. 그 말에서 한서진은 멈칫했다.

순수함과 탐욕, 그 이질적인 색채가 공존하고 있었던 이유를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자연의 진리를 추구하고, 그 힘을 널리 퍼트리고 보존하는 것. 그것이 TA의 존재 가치이자 목적입니다.”

간단히 설명이 끝났고, 둘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경직된 침묵 속에서 한서진이 먼저 정적을 깨뜨렸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자연스럽게 태블릿을 들고 창가로 이동했다. 생각에 잠긴 척하면서 태블릿에 떠오른 검색 결과를 확인했다. 타르타로스 2가 Table A라는 키워드로 추출한 검색 자료들이었다.

타르타로스 2는 지구상에서 온라인 연결이나 전원이 켜져 있음에 상관없이, 전자적 형태로 존재하는 모든 데이터를 흔적 없이 수집할 수 있다.

또한 그 방대한 빅 데이터 안에 존재하는 논리 알고리즘을 스스로 해석해, 체계적인 데이터 정리를 해낸다.

‘없다?’

한서진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타르타로스는 조사 결과가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Table A와 유사한 이름을 지닌 다른 단체, 기관, 혹은 대학 클럽 같은 것은 무수히 존재했지만, 그것들은 의미가 없기에 쳐낸 것이다.

그렇다면 결과는 하나다.

‘Table A라는 기관이 거짓이거나…….’

그만큼 철저히 은폐했거나.

타르타로스 2는 전자적 형태로 존재하는 모든 자료를 자유자재로 취급할 수 있지만, 그것은 달리 말하면 자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타르타로스 2의 탐색 기능을 피할 방어시스템을 구축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심경이 복잡하신 모양이군요.”

“Table A……. 어떤 기관인지는 대충 이해했습니다. 그런 영화 속 같은 일이 현실이라는 것도 놀랍고요. 그런데, 그래서 뭡니까? 제게 무엇을 원하시는 거죠?”

“그전에 박사님의 목표를 묻고 싶습니다.”

“제 목표요?”

“화폐 자본가들은 클레튼 대통령을 내쫓고 크리스를 대통령으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미국을 움직여 박사님을 압박하고 있지요. 박사님이 행여나 연방은행에 손을 뻗치지 않을까 벌써부터 겁을 먹고 말입니다.”

“저는 연방은행 따위에 별 관심 없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지요. 그들은 다른 자본가들이 박사님과 결탁해서 장차 자신들을 몰아내는 건 아닌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달러 발행권이라는 보물은 매혹적이니까요.”

“그게 왜 크리스 대통령을 훼방 놓으러 왔다는 이유가 되죠? Table A의 목적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듯합니다만?”

“충분한 이유가 되고도 남죠. 그런 속세의 하찮은 다툼이 박사님의 에테르 연구에 해를 끼치고 있으니까요.”

한서진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가느다란 전율이 느껴진다. Table A의 존재, 그리고 구프게니가 품은 순수한 탐욕의 본질.

그것이 말해주는 것은…….

“Table A는 지식 탐구에 미친 사람들만 모인 집단이군요.”

“맞습니다.”

다소 과격한 표현, 하지만 구프게니는 오히려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우리는 영원한 진리를 추구합니다. 그것을 방해하는 어떤 장해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

“그리고 박사님께서는 우리 Table A조차도 오랫동안 제자리걸음이었던 제5의 힘, 에테르의 존재를 밝혀내줄 유일한 메시아이시죠.”

“메시아…….”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온다.

구프게니가 계속 말했다.

“오래 전부터 꼭 뵙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를 섣불리 드러내면 박사님의 연구에 지장이 있을까 봐 그동안은 멀리서 흠모만 해왔습니다.”

“또 누가 있습니까?”

“Table A의 존재를 아는 이는 극소수입니다. 그러나 많은 과학자들이 Table A의 후원과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사실조차 알지 못하지요.”

“후원…….”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필요하니까요.”

구프게니는 목표가 뭔지 물었다. 그리고 한서진은 아직 그에 대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한서진은 한결 차분해진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만약 Table A의 근원을 방해한다면, 그게 미국이라 해도 용납하지 않을 겁니까?”

“물론입니다.”

“미국을 망하게 할 수도 있다는 뜻인가요?”

“감정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그래야 할 이유가 없죠. 그보다는 워싱턴을 교체하는 게 손해도 적고 탈도 없습니다.”

“묘하게 현실 타협적이군요.”

“때로는 타협을 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진리는 끈기 있는 자들에게만 모습을 보이니까요.”

한서진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등을 보였다. 얼굴을 보인 채로 대답을 꺼내기 싫어서였다.

“저는 에테르가 어떤 힘인지 완벽히 알아내겠다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

그 순간 구프게니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한서진은 그걸 보지 못했지만.

“하지만 그건 저의 안위를 위해서입니다.”

“박사님의 안위?”

“여러 뜻에서 한 말입니다. SJ인더스트리를 보시면 이해하실 겁니다만.”

구프게니의 얼굴에 알겠다는 탄성이 떠올랐다.

“지식을 탐구하고, 그 독점적 사용으로 인한 물질적 이익의 획득이라……. 그것 역시 타협의 하나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해합니다.”

“별로 당신들의 이해를 바라진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렸군요. 그럴 마음은 없었습니다.”

알고 있다. 상대는 친구가 되기 위해 찾아왔고,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한서진이 꺼려했던 것은, 에테르의 비밀은 결국 레노지안의 세상에 닿아있기 때문이었다.

허상인지 현실인지, 현실이라면 어느 차원 어느 시간축에 존재하는지조차 미지로만 남아 있는 환상의 세상. 그곳에 관한 비밀을 아는 이가 더 이상 늘어나선 안 되기에.

“크리스 대통령을 조심하십시오. 그 사람은 서클의 일원, 그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대통령이 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저에게 호의적이지는 않더군요.”

“그렇지는……. 아니,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 서클이라는 자들이 저를 적대할 수 있다면, 그 수위는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구프게니는 잠시 생각한 뒤, 신중히 대답을 골랐다.

“박사님께서 화폐발행권에 직접 욕심을 내지 않으시는 한…… 그러니까 박사님을 내세워서 움직이는 자들과 별개로 분명히 마음으로 선을 그으신다면…… 그들은 끝까지 가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아마 끝까지 가게 되겠군요.”

“그게 무슨……?”

구프게니가 의아해서 바라보자 한서진은 희미하게 웃었다.

“화폐 발행권, 원래 별 관심 없었는데 요즘 들어 은근히 욕심이 생기지 뭡니까.”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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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러니까 니들 왜 자꾸 가만히 있는 나를 건드리냐고! 빡쳐서 뺏어버릴까 보다!”

의심이 결국 귀신을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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