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384화 (384/609)

00384  남자의 선물  =========================================================================

뉴욕, 카이고르 컴퍼니.

실리콘밸리에 연구소를 두고 있는 첨단 소재 개발의 숨은 강자로, 일반 대중에 이름이 크게 알려지진 않았으나 해당 분야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기업이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설립되어 70년 넘게 이어진 전통과 축적된 기술력은 자타가 공인하는 수준이다.

미국의 산업 소재 부문에서 당당히 1위에 빛나는 기업으로, 작게는 운동화의 원단 소재부터 크게는 우주선 선체 소재까지 총망라한다.

투자기관이 추정하는 기업 가치는 최소 200억 달러 이상, 그러나 카이고르 컴퍼니는 기이하게도 상장이 되지 않은 회사였다.

본사가 뉴욕에 위치해 있지만 그 규모는 회사 규모에 비해서 놀랄 만큼 작다. 대지 면적이 실리콘밸리 사옥의 1/10도 채 되지 않는다.

얼핏 보면 본사라기보다는 사무행정만을 전담하기 위한 지부처럼 느껴질 정도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 오후, 말끔한 정장의 한 백인 중년 남성이 카이고르 본사를 방문했다.

금발과 푸른 눈의 젊은 여비서가 익숙한 듯이 미소로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구프게니 씨.”

“반가워, 제인. 사장님은 안에 계신가?”

“그럼요. 구프게니 씨가 오기만 기다리고 계셨어요.”

“허허, 그 친구가 날 반길 리가 없는데.”

“에이, 그렇지 않아요. 얼마나 손꼽아 기다리셨는데요.”

중년 남성, 구프게니 키신은 쓴웃음을 지으며 사장실에 노크를 하고 기다렸다. 잠시 후 안에서 대답이 돌아왔고, 그는 문을 열었다.

기업가치 200억 불 이상 가는 기업의 사장실이라 믿어지기 힘들 정도로 내부는 검소했다. 공간도 그리 넓지 않았다.

깔끔하게 정리 된 인테리어와 좁은 사장실을 가득 채우듯이 차지하고 있는 전문 공학 서적 등이 회사의 중심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구프게니 씨! 오랜만입니다! 정말 잘 오셨습니다!”

구프게니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백인 남성이 환히 웃으며 일어났다. 두 팔을 크게 벌린 제스처가 어지간히 반가운 듯이 보였다.

“그리 과장할 것 없네. 어색하기만 해.”

“과장이라니요? 전 진심입니다.”

“내 방문이 자네에게 반가울 리가 없잖은가, 코펜 2국장.”

코펜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구프게니는 자신의 집에 온 것처럼 편안하게 쇼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코펜은 기계적인 몸짓으로 맞은편에 앉은 채 두 손에 깍지를 꼈다.

“TA의 업무입니까?”

“그렇다네. 카이고르 컴퍼니의 이사가 아닌, TA의 부팀장으로서 찾아온 걸세.”

Table A의 위장 기업, 그것이 카이고르 컴퍼니의 진짜 정체이자, 그 거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상장을 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코펜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렇지 않아도 시티즌이 하루가 멀다 하고 내놓는 대발견 때문에 회사 업무가 마비 상태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또 일거리를 가져오시다니요.”

“하루가 멀다는 건 너무 심한 과장이지. 지금까지 내놓은 성과가 열 손가락은 넘지 않을 텐데?”

“그 열 손가락을 못 넘는 대발견 하나하나가 십 년치 노벨상을 합쳐도 대응될 수 없는 수준입니다만.”

“그건 인정하네.”

“시티즌은 TA가 몇 십 년 동안 제자리걸음질만 하고 있던 영역을 몇 년 안 걸려서 혼자서 개척해버렸지요. 그것도 밑바닥부터 모든 걸 맨손으로. 가끔 지금까지 TA는 뭘 했던가 하는 회의감이 들기도 합니다.”

“얼굴은 전혀 그리 안 보이는데?”

구프게니의 말대로, 코펜의 표정에는 생동감이 넘쳤다.

한서진의 존재는 Table A의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는데 합치하기 때문이다. 몸이 힘들어 비명을 지를지언정 기꺼이 즐길 수 있는 고난이었다.

구프게니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2급 결의사항이 있네.”

“회의 개최를 알려주시려고 몸소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바쁘신 분이?”

“아닐세. 지금 바로 결의를 하기 위해서야.”

“3급 이상은 7인 회의를 거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여기는 우리 둘뿐입니다만?”

“다른 위원들은 자네와 나에게 표결 대리를 맡겼네.”

코펜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또 대리를요? 하여간 학자들이란!”

Table A의 중추기관은 팀장과 부팀장을 포함한, 7인의 위원으로 되어 있다. 구프게니 키신이 부팀장으로서 기관의 실무 전권을 행사하고 있으며, 중대한 결정 사항이 발생시에는 7인 회의를 거쳐 표결로 정한다.

2차 대전 시절 비밀리에 설립된 독자행정기관으로, 미국의 기초과학을 비롯한 전반적인 과학영역에 은밀히 발을 걸치고 지식을 전파하는 기관.

그 기관의 의사결정을 내리는 핵심 인사가 겨우 7명이라는 것도, 그런 기관이 존재한다는 것도 세간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

“시티즌을 견제하기 위해서 유대 자본이 움직이고 있네.”

유대 자본. 그 말에 코펜의 얼굴이 대번에 험악해졌다.

그는 잔뜩 냉소 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추잡한 돈벌레들은 여전히 지놈들이 미국을 주무르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사나 보군요. TA가 지놈들을 건드리지 않는 건 그럴 실익이 없어서라는 것도 모른 채.”

“그들은 TA의 존재조차 모르지 않나.”

Table A는 정부기관과 민간조직의 양면성을 동시에 지닌 채 미국의 과학을 선도하는, 조혈세포 같은 기관이다.

보이지 않는 어둠의 영역에서 미국을 떠받들지만, 그 존재는 극비다. 대통령조차 Table A가 원하지 않으면 그 존재를 알 수 없다.

하물며 금융과 자본, 정보를 쥐고 있는 금융 자본가들이 Table A의 존재를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크리스 대통령은 저들과 자신의 이익에 충실한 인물일세. 적어도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와 뜻이 합치되진 않을 거야. 우리도 견제를 할 필요가 있네.”

“그래서 2급 결의사항이라는 겁니까.”

“자네가 3인, 내가 2인을 대리하고 있네. 자네의 결정에 모든 게 달렸지.”

“내용이 뭡니까?”

“유로화의 지위 강화.”

짧고 간결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내용은 결코 작은 게 아니었다.

코펜은 구프게니의 의중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저들의 정신을 빼놓을 셈이시군요. 한서진 박사한테 신경을 쓰지 못하게끔.”

“적당히 다른 쪽으로 어그로를 몰아줘야지.”

“그러다가 유로화가 만에 하나라도 달러화를 정말 위협하기라도 하면 어쩌시렵니까?”

“그런 게 우리 TA에 상관이 있나?”

구프게니는 덤덤하게 반문했고, 코펜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씩 웃었다. 그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저, 그리고 다른 3인을 대리하여 찬성하겠습니다.”

“그럼 7인 만장일치로 결정이 났군.”

구프게니 키신은 용건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서 돌아가 버렸다.

혼자 남은 코펜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가에 서서 대도시의 풍경을 내려다보던 그는 조용히 주먹을 불끈 쥐었다.

‘미국은 어차피 도구일 뿐이다.’

Table A는 대대로 그 존재나 업적, 업무 등을 대통령에게조차 발설하지 않는다.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만 오픈할 뿐이다.

TA의 역할은 기초과학 선도를 통해 미국을 떠받드는 것, 즉 그늘에 몸을 숨긴 어둠의 수호 기사. 역대 대통령들은 그렇게 ‘오해’해왔다.

그러나 TA는 연방은행과 달러발행권을 쥐고 있는 유대 자본가들 이상으로 탐욕스러운 조직이다.

그 탐욕의 방향이 돈이 아닌, 세상의 진리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에테르……. 그 위대한 지식을 탐구하기 위해서라면.’

미국은 진리를 탐구하기에 지구에서 가장 좋은 환경이었다. 그래서 TA는 미국에 오랫동안 둥지를 틀었다. 금융 자본가들이 돈을 벌기에 가장 좋은 국가라는 이유로 자리를 잡은 것처럼.

H팰리스 건설을 위한 첫 삽이 올랐다.

H건설의 깃발 아래 모인 국내 중대형 건설사들은 일제히 옛 평양으로 향했다. 엄청난 공사량에 건설 관련 주는 매일같이 상한가를 쳤다.

건설계에는 적어도 20년 간은 일거리가 없어서 죽치는 일은 없을 거라는 호언장담이 나돌았다. 경기도 면적의 절반에 가까운 H팰리스만 따져도 10년은 족히 걸릴 대공사였으니.

“10년 걸릴 공사라면, 인력과 장비를 3배 더 투입하면 3년으로 줄일 수 있겠지! 부족하다면 더 투입하면 되고!”

한서진은 10년이면 충분히 짧은 거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TF팀의 김범석 부사장과 H건설 사장은 그 공사기간에 만족하지 못했다.

“적어도 박사님 사택만큼은 2년 안에 완공한다! 밤낮으로 교대 작업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일은 서두르지만, 안전을 서두르지는 않는다.

H건설은 안전과 확실한 품질을 항상 강조했다. 현장 인부들에게 무리한 혹사를 시키지 않았다. 엄격한 감사단을 상시 파견해서 언제나 꼼꼼하게 점검했다.

H팰리스를 시작으로, 북한 지역은 전격적인 개발을 맞이했다.

정부는 H팰리스 외에 타지역도 개발을 하고 싶어 했으나, 사업 신청서를 넣는 기업이 없었다. 국내 건설사들은 모두 H건설 아래로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이만큼 확실하고, 상징성이 있으며, 수익이 남는 건설 사업은 없었다. 각 건설사들은 계산기를 두드려본 결과 H건설에 올인하는 게 가장 큰 이익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대대적인 건설붐으로 북쪽 지역에는 일거리가 넘쳐났다. 높은 실업률과 경기침체로 신음하던 한국 사회에는 호소식이었다.

일자리를 찾아 나선 사람들이 H건설에 지원했다. 어마어마한 인력과 장비, 자본이 투입되는 대공사, 건설 현장의 육체노동 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인재들이 필요했다.

말 그대로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판이었으니까.

“내가 왜 떨어진 거야? 이해가 안 돼!”

“아니, 저런 놈도 붙었는데 대체 내가 왜?”

“정원이 다 찬 것도 아니잖아! 지금도 봐! 계속 사람을 모으고 있어!”

“내가 대체 왜!”

“어째서!”

H그룹은 대대적인 공채를 벌였다. 거의 두 달에 한 번씩 큰 규모로 정기 공채를 벌였고, 무지막지한 기세로 직원들을 채용했다. 거의 인력을 흡수하는 블랙홀 수준이었다.

물이 들어왔다고 모두가 노를 저을 수는 없는 법, 대대적인 공채에도 불구하고 많은 지원자들이 떨어졌다.

누가 봐도 납득할 만한 탈락자도 있었지만, 반대로 누가 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 탈락자들도 있었다. 학벌, 스펙 등의 조건이 나무랄 데가 없음에도 서류 접수 단계부터 떨어져 나간 이들 수가 만만치 않았다.

특별한 공통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학벌, 지역, 나이, 성별 등 눈에 띌 만한 공통점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둘 이었다면 모를까, 그런 탈락자들이 수천이 넘어가자 자연히 뭉치면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우리가 왜 떨어졌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대기업의 갑질이다! H그룹은 반성하라!”

“불공정한 채용 인사를 휘두르는 H그룹 경영진은 전원 사직해라!”

“왜 우리 같은 인재를 떨어뜨렸는지 해명해라!”

인터넷 카페 등을 통해 뭉친 그들은 급속히 세를 불렸고, 마침내는 시위대를 조직해서 본사 앞에 집결하는 등 본격적인 항의에 나섰다.

이에 맞서 H그룹은 경찰의 도움을 요청하는 등 강력한 법의 수단에 의존할 것이라며 강경히 맞섰다.

북한 대개발시대가 열린 지금, 한국은 또 다른 혼란을 몸에 묻히고 있었다.

“오빠 욕하고 루머 퍼뜨리고 다니던 놈들이 여기가 어디라도 밥숟가락을 들이대려고 해? 이 한지혜 성격에 그 꼴은 못 보지.”

“햄버거 매장에서 벌레 나왔다고 루머 퍼트리고 진상 짓하던 놈들이 매장에 취직시켜 달라는 꼴입니다.”

“블랙리스트 놈들, 오빠와 H그룹 쪽 파이에는 발도 못 붙이게 해요.”

============================ 작품 후기 ============================

활주로와 격납고가 딸린 작고 예쁜 집을 지어요~

ps : 금요일에 헌재 결정문 낭독을 생중계로 보다가 마지막에 터진 반전에 흥분해서 하루종일 글을 못 썼고, 저녁에는 기쁨을 나누기 위해 지인들과 치킨과 알콜 파티를 열기 시작해서 주말 내내 죽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면 괜찮아지겠지 하던 게 주말을 꼬박 쉬었네요.ㅠ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