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83 남자의 선물 =========================================================================
H건설은 ‘H팰리스’ 착공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먼저 공사규모 관계상 H건설만의 힘으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했기에, 다른 건설사들을 사업자로 끌어들였다.
진성건설, CS건설, 지금건설 등 내로라하는 국내 대형 건설사들이 모조리 H건설 이름 아래 모였다.
평소 어깨를 나란히 하던 동종 업계 경쟁자 밑으로 들어가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그러나 자존심을 따지기에 H건설이 쥐고 있는 건설 주문량은 어마어마했다.
서울 면적의 7배가 넘는 대도시를 허허벌판부터 새로 짓는 대공사다. 그 총괄권을 H건설이 혼자 쥐고 있으니, 다른 건설사들은 동급 경쟁자였던 H건설의 발가락이라도 핥으며 애교를 부려야 했던 것이다.
신도시 H팰리스는 향후 매년 최소 300조 원 이상의 공사비를 투입할 예정이었다. 도시 전체가 완전히 완공될 때까지 몇 년이 걸릴지, 얼마의 자금이 들지는 현재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이런 초대형 호재를 H건설이 좌지우지하고 있으니, 이른바 건설계의 수퍼갑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이게 끝이 아니다. 한서진이 북한 지역에 간접적으로 가진 권리와 넘쳐나는 재력을 고려하면, 북한 개발은 앞으로도 H건설이 지금처럼 주도할 게 뻔했다.
H팰리스를 시작으로 향후 20년 동안은 건설 일자리가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기대감에 사회 전체가 부풀어 올랐고, 주가지수가 상승했다.
약간의 찬물이 끼얹어지기는 했지만.
“모든 건설 현장에 이 지침을 적용하라고요?”
H건설 임원회의에서 사장이 주섬주섬 꺼낸 공문을 확인한 임원들은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사장도 난처한 듯했으나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어쩌겠나. 저 하늘 높은 곳에서 툭 떨어진 지침인데.”
하늘 높은 곳. 그리고 사장이 위를 향해 가리킨 손가락.
임원들은 대번에 말뜻을 알아들었다.
어느 임원이 푸념처럼 말했다.
“단돈 일원도 해처먹지 말라는 것도 과연 현장에서 지켜질까 의심스러운데, 이런 빡빡한 세부조항까지…….”
“다른 건설사들 반발이 장난 아닐 겁니다. 업계 관행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건설업계는 원래 불합리한 관행으로 얼룩진 곳이다. 그리고 그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세계였다.
횡령과 배임, 자재 빼돌리기, 날림공사, 설계와 맞지 않는 시공, 보호받지 못하는 현장 노동자 권리 등 셀 수 없는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수십 년에 걸쳐 형성된 ‘관행’이기에, 지금 와서는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태다.
이미 업계종사자들은 직위의 고위를 가리지 않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긴 지 오래였다. 거기에 순응하지 못한 이들은 진즉에 업계를 떠났고.
그러나 TF팀이 발족한 이후, 대놓고 돈을 속이는 비리만큼은 상당히 위축된 상태다. TF팀이 건설사의 규모를 가리지 않고 발각되는 대로 고발 조치를 했기 때문이다.
이번 신도시 H팰리스 공사에 참여하는 건설사들 중에서 한 번이라도 고발을 당하지 않은 회사는 없을 정도다. 대형 건설사 중 일부는 벌써 큼지막한 벌금형을 얻어맞고 재무 상황이 흔들리기도 했다.
H건설은 가장 먼저 체질 개선을 꾀했고, 지금에서는 건설 비리 관행을 척결한 1등 공신 소리를 들을 만큼 깨끗한 회사 문화를 이룩했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형성된 관행이 어디 하루 아침만에 해결되겠는가. 타회사들의 반발을 생각하니, 임원들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자금회계 문제를 확실히 투명하게 하라는 건 다른 건설사들도 납득할 겁니다. 이미 TF팀 때문에 크게 얻어맞은 회사가 한둘이 아니니까요.”
“확실한 감리 관리를 통한다면 어느 정도 시공의 공정성과 투명성도 확보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세부조항까지 다 지켜가면서 일하라면 현장에서 반발이 엄청날 겁니다. 자기들은 원래 이런 식으로 일하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사장의 난처한 시선이 옆에 선 인물에게 향했다.
그는 임철진 과장,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세를 자랑하는 그룹전략기획실에서 나온 인물이었다. 다행히 직급이 높지 않은 편이라 임원들도 어느 정도 편하게 자기 의견을 낼 수 있었다.
임 과장이 임원들을 둘러보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렇군요. 없던 규칙을 새로 만들어내서 강제하는 게 아니라 원래 법으로 있던 규칙만이라도 확실하게 지키라는 지침인데, 다른 건설사들의 반발 때문에 힘들겠군요. 제가 돌아가서 그렇게 보고하면 되겠습니까? 그럼 일어나지요.”
“아니, 임 과장.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회장님께서는 그간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되풀이 되어 온 건설계의 악습을 이참에 완전히 ‘조지려고’ 하십니다. 특히 H팰리스는 한서진 박사님을 위해 H건설이 처음으로 삽을 뜨는 기념비적인 공사고요. 여기에 타협은 있을 수 없다는 게 회장님의 강경한 의지이십니다.”
무뚝뚝하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엄청났다. 임원들은 마치 눈앞에서 회장을 호통을 치는 듯한 긴장감을 느꼈다.
H건설 사장이 난처한 듯이 한 마디 했다.
“자네 말은 알겠는데, 그래도 회장님의 뜻을 전달하는 건데 조진다는 표현은 좀 그렇지 않나?”
“회장님께서 직접 그렇게 강조하셨습니다. 조지는 게 당신의 참뜻이라며, 다른 표현으로 대체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임직원들의 불필요한 오해가 없도록 말입니다.”
조질 거다. 다른 표현으로 바꿔 말하지 말라. 오해가 생기면 안 되니까.
임 과장은 임원들을 둘러보며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별 거 없습니다. 재도급 주지 말고, 자금회계 확실히 하고, 설계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확실히 시공하고, 현장 안전관리 확실히 하고, 마무리 깔끔하게 하라는 겁니다.”
“여기 보면 설계와 시공이 틀렸을 시…….”
“고의적이거나 중대한 오차가 있으면 그 건물 아예 허물고 새로 짓습니다. 책임 건설사는 배상 책임 물고 퇴출입니다. 이게 뭐가 어렵습니까? 설계대로만 지으면 되는 일입니다.”
“그래도 다른 회사들의 반발이…….”
“그래서 자신 있는 회사만 받아주라는 거 아닙니까.”
“재도급 문제는 함부로 건드릴 게 아니에요. 재도급을 금지하면 결국 대형 건설사들이 중소형 건설사들을 일일이 끌고 다니면서 지시와 책임 감독을 해야 하는데, 그러면 비용과 부담이 너무 커집니다. 공사 기간도 길어지고…….”
“건축주가 돈 문제, 시간문제 신경 쓰지 말라는데 왜 수급 건설사들이 비용 타령이 나옵니까?”
“…….”
할 말이 없는 명분이었다.
임 과장이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수급 건설사들에게 이대로 공문 돌리시고 오해 없도록 분명히 회장님 뜻 전달하세요. 회장님, 이번 공사 엄청 강경하게 대응하실 겁니다.”
H건설은 한때 그룹의 성장 동력원이었던 주요 계열사였다. 지금도 H반도체를 제외하면, 그룹 내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상당하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건설계에 자리 잡고 있는 무수한 불법 관행에는 백철중의 책임도 적지 않게 있다는 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미 오래 전에 건설에서 손을 뗀 백철중이, H팰리스에서 그 관행들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원한다.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이를 갈며 혐오하는 수준이다.
‘귀한 사위 집이니만큼 엄격하게 짓고 싶으시다는 건가?’
언뜻 그런 생각이 들긴 했다. 그러나 근래에 꾸준히 일어난 그룹의 체질 변화를 보면 단순히 그런 이기심 때문은 아니었다.
전체적인 임금을 올려주고 근무 시간을 줄인다. 인력이 모자라면 기존 직원의 노동력을 갈취하는 게 아니라 추가로 사람을 고용해서 썼다.
그룹 비자금도 전부 정상화했고, 원청기업으로서 잘못된 관행도 타파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H그룹은 선진형 대기업으로 체질 개선을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다. 이번 신도시 건설 방침 역시 그러한 일환일 것이다.
‘회장님께서는 자신의 흑역사를 세상에서 완전히 지우고 싶어하십니다.’
회의가 끝나고 임 과장이 사석에서 조용히 귀띔한 말이 임원들 사이에 알음알음 퍼졌다.
그제야 임원들은 ‘조져버리겠다’라는 말이 얼마나 강경한 의지를 담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비리와 불합리함으로 얼룩진 건설업계의 관행, 그것은 지금에 와서 백철중 회장에게 있어 떨쳐내고 싶은 어두운 과거였던 것이다.
“이걸 전부 지키라고요?”
한국 역사상 다시없을 대형 건설 호재다.
큰 먹이감을 하사받게 된 CS건설은 그룹 부회장이 직접 나서서 사업을 챙겼다. 그만큼 CS그룹에서 이 공사를 얼마나 중요히 여기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공손히 브리핑을 듣고 있던 CS 부회장의 표정은 조금씩 썩어 들어갔다.
하나부터 열까지 말도 안 되는 요구사항이었다. 지금의 건설 관행에 완전히 어긋나는 내용들뿐이었던 것이다.
“예, 아시겠지만 규정들을 지키지 않았을 시 패널티가 상당히 큽니다. 특히 설계를 따르지 않은 시공에서 고의나 큰 과실이 발견될 경우에는 아예 허물고 새로 지을 겁니다. 해당 건설사는 배상금도 물어야 하고 사업에서 퇴출됩니다.”
“아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닙니까! 업계 관행이라는 게 있는데요!”
부회장은 저도 모르게 씩씩거리며 울분을 토했다.
“백철중 회장님도 이걸 아십니까? 아신다면 아마 저와 비슷한 마음이실 겁니다! 지금은 CS에 몸을 담고 있지만, 이래봬도 제가 소싯적 회장님을 따라다니며 현장을 구르다 일을 배운 놈입니다!”
“그 회장님께서 내리신 지침입니다만.”
“…….”
“자기 대에서 잘못된 건설 관행을 뿌리 뽑아서 다시 바로잡겠다는 의지를 갖고 계십니다.”
CS 부회장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백철중 회장과의 지난 인연은 사실이었다. 이십 여 년 전까지만 해도 공사현장에서 안전모를 쓰고 이슬비를 맞으며 파전과 막걸리를 나누기도 했었다.
그런 나름 끈끈한 과거가 있기에, 그리고 백철중이 건설계에 뼈가 굵다는 걸 알고 있기에, 이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뼈아프게 깨달은 것이다.
CS 부회장의 표정이 대번에 변했다.
“그럼 회장님께서는 정말로……?”
“예, 조금도 봐주시지 않을 겁니다. 회장님께서 뼛속까지 현장 출신이라는 건 부회장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알죠. 당연히.”
“회장님께서 설마 현장 사정 모르고 탁상공론식으로 이렇게 하시겠습니까. 아마 지금쯤 벼르고 계실 겁니다. 한두 개 정도 시범적으로 걸려서 퇴출되기를, 그래야 다들 바짝 긴장하고 따를 테니까요.”
“회장님의 높으신 뜻은 이해합니다. 그래도 다른 건설사들 불만이 엄청날 텐데, 그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공사 기간과 공사비용은 전혀 신경 쓸 것 없습니다. 우리 H건설도 대금 후려치기 안 하고 정상적으로 지급할 거고, 공사 기간 가지고 독촉 안 할 겁니다.”
시간과 돈, 가장 골치 아픈 그 두 가지만 확실하게 보장해준다면야 못 지킬 것은 없다. CS 부회장은 머릿속으로 재빨리 그림을 그렸다.
“재도급을 주지 말라는 조항은 그럼 2차, 3차 하청업체들한테 책임을 떠넘기지 말라는 뜻이군요.”
“맞습니다. 모든 책임 관리는 1차 수급자인 CS건설에서 수행해야 합니다. 재도급 주고 뒤로 물러나서 구경만 하고 책임 떠넘기기 식은 절대 안 됩니다. 다른 대형 건설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장님…… 많이 변하셨습니다.”
“H팰리스가 현대판 피눈물의 만리장성이 되는 것은 절대 바라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일꾼들의 착취와 피눈물로 지어진 게 아닌, 환희와 소금땀으로 쌓아올린 도시가 되길 바란다. 백철중은 예비 사위의 새 집에 좋은 기운만 깃들기를 원했다.
덤으로 흑역사도 처분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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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큭...오래 전 내 왼손이 세상에 풀어놓은 검은 불꽃 드래곤... 그것을 척결하는 것 또한 나의 사명... 크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