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80 남자의 선물 =========================================================================
한서진은 일주일이 넘게 연구실 외출을 않은 채, 신효진이 갖다 준 단서만을 분석하고 있었다.
―미모를 유지하는 비법 중 가장 뛰어난 거래요. 왕족만 사용할 수 있다는군요.
그런 설명을 덧붙이며 수줍어하던 그녀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리고 귀여운 청탁도.
―이거 저도 해주실 거죠?
신효진도 욕심이 나나 보다.
H-3, ‘피부미용제’는 원래 송하나만을 위한 선물이었지만, 한서진은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신효진이 아니었으면 처음부터 불가능했을 연구였으니까.
―근데 이상했어요. 피부미용제라고 제가 말하니까 아버지께서 엄청 화내셨어요. 아, 꿈속에서 저, 아니 스칼린의 아버지는 대륙 최고의 대마도사예요. 이것도 그 분한테 얻어온 거예요.
신효진의 말을 떠올리며 한서진은 가벼운 신음을 흘렸다. 며칠째 면도도 제대로 안 했더니 얼굴이 까끌까끌했다.
‘대마도사가 알려준 비법이라. 왕족만 사용할 수 있는…….’
연구에 몰두한지 어언 일주일. 아직 한 발자국도 진전이 없지만, 한서진은 충분히 그 이유를 절감하고 있었다.
“너무 어렵다.”
눈이 빠질 만큼 통찰안의 잠재력을 최대로 끌어내도 이해가 어려운 난해한 공식. 그리고…….
“……너무 비싸잖아.”
해당 마법을 발현하는데 소모될 미스릴과 오리할콘, 에테르의 양이 어마어마했다.
상용화가 불가능할 만큼.
북한 개발을 놓고 온 나라가 용광로처럼 들끓어 있는 와중, 행정부 실무진은 새로운 골칫거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다름 아닌 평양 지대에 만들어진 오리할콘 광석이었다.
“이게 대체 뭐란 말인가?”
“뭔지 모르겠지만 기존에 없던 새로운 광물인 건 확실합니다.”
“어쩌면 신원소가 아닐까요?”
“자세히 조사를 해봐야…….”
오리할콘은 단 0.1g의 유출도 허락하지 않을 만큼 엄격한 통제를 받고 있었다. 한국 정부, 미군, 그리고 H그룹, 이렇게 셋으로 구성된 감시의 눈길이 유출을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엄밀히 따지면 오리할콘의 소유권은 1차적으로 한국 정부에 있다. 평양 지대는 국유지이므로.
그러나 실질적으로 그 소유자는 한서진이라는 어마어마한 담보 채권자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 한서진이 빚 대신 그거라도 내놓으라고 하면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아니, 정부 입장에서는 오히려 빚의 일부라도 탕감할 수 있으면 좋았다.
“일단 H그룹과 한서진 박사측에서 이 물질을 원하는 건 확실합니다.”
“에테르 스톰 제거 현상 과정에서 만들어진 물질이니, 미스릴처럼 특별한 에테르 감응 성질이 있는 물질이 아닐까요? 그래서 한서진 박사가 원하는 게 틀림없습니다.”
실무진의 추측은 어느 정도 진실에 근접했다. 내부회의에서 큰 공감대도 형성했다.
이제 남은 건 어떻게 대처하느냐였다.
북한은 국유지지만, NK1이 형성된 것은 한서진의 에테르 스톰 안정화 연구 기여 덕분이었다. 소유권을 놓고 시시비비를 가리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골치 아파진다.
실무진의 의견은 청와대까지 보고되었고, 대통령은 큰 고민 없이 결론을 내렸다.
“그냥 넘겨 줘. 달라는데 줘야지.”
“대통령님, 그런데 몹시 희귀한 물질일 수도 있습니다.”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우리는 그게 뭔지 알지도 못하는데. 한서진이는 건드리면 피곤해지니까 우리도 피해 가자고. 국가한테 뭘 줄 수 있는지 물어보고 어지간하면 그냥 들어 줘.”
결국 그렇게 결론이 났고, 처음 보고를 올린 실무진에서 H그룹 관계자와 협상에 나섰다. 한서진을 대신해서 H그룹이 협상 테이블에 올라왔다.
“NK1은 에테르 연구를 위한 귀중한 샘플입니다.”
NK1. 한국에서 오리할콘에 붙인 임시 명칭이었다.
협상을 시작하자마자 H그룹 관계자가 시원스럽게 내뱉은 말에 정부 실무진은 불안해졌다.
상대방은 어떻게든 가치를 깎아내려야 협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 그런데 ‘귀중한 샘플’이라며 시작부터 대뜸 인정하다니?
“박사님께서는 NK1의 가치에 대한 대가로 일단 1억 달러를 생각하고 계십니다.”
1억 달러! 예상을 넘어서는 거액에 실무진은 더욱 큰 혼란에 빠졌다. 그 광물에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귀중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거 이대로 매각해도 정말 좋은 건가?
‘하지만 대통령 지시니까.’
아쉬운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실무진은 일단 협상에서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어쩌면 1억 달러의 가치에 못 미치는데, 한서진이 국가를 배려해준 것인지도 모른다. 이미 국가를 위해 1조 5,000억 달러에 달하는 거금을 내놓은 사람 아닌가.
“예, 그렇게 일단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그럼 대금 지불은 어떤 방식으로 하실 건지……?”
“아, 대금 지불 관련해서 말인데요. 박사님께서는 행정부의 대대적인 북한 개발 정책을 환영하시면서, 한편으로는 우려를 나타내고 계십니다. 개발 기금이 모자라지 않을까 해서 말이죠. 아시다시피 전대 대통령 때문에 우리나라 국고가 지금 텅 비어 있지 않습니까. 나라 전체가 빚더미지요.”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그래도 1억 달러면 상당히 큰 숨통을 틔워줄 겁니다.”
“그래도 그 넓은 땅을 개발하는데 1억 달러로는 터무니없이 모자라지요. 해서 박사님께서는 국가에 좀 더 건설적인 도움을 드리고 싶어 합니다.”
실무진은 다시금 불안한 눈으로 협상 책임자를 주시했다.
30대 초반의 나이에 H그룹을 대표하여 정부 협상에 나온 것도 놀랐지만, 실제로는 H그룹이 아닌 TF팀에 소속되어 있다고 한다.
얼마나 능력이 출중하면 저런 젊은 직원에게 이런 중요한 협상을 맡길까. 그리고 그런 인물이 저렇게 말을 길게 늘이는 이유는 뭘까.
“10년 상환 조건으로 추가 특별 국채를 1조 5,000억 달러만큼 구매하겠습니다. 물론 무이자입니다. 1조 5,000억 달러를 10년 간 무이자로 운용하고 상환한다면, 화폐 가치 하락과 물가 상승, 그리고 정부가 이득 보게 될 이자 이익까지 고려하면, 그 수익성은 1억 달러를 가뿐히 뛰어넘고도 남지요. 어떻습니까?”
조건만 놓고 보자면 정부에게 더 할 나위 없이 좋다. 그런 거액을 10년 간 무이자로 쓰고 상환하다니. 물가 상승과 화폐 하락을 고려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다.
문제는 기발행 국채도 이미 그런 방식이었다는 점, 그리고 정부가 불필요한 빚을 늘리게 된다는 점이었다.
실무 책임자는 창백해져서 반박했다.
“지금 정부에 필요한 건 대출금이 아니라 소득입니다. 기대출받은 1조 5,000억 달러는 아직 쓰일 곳을 찾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돈이 쓸 타이밍을 못 잡아서 못 쓰는 것뿐, 쓸 곳이 없어서 못 쓴다는 건 말도 안 됩니다. 그리고 그 넓은 땅을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개발하는데 1조 5,000억 달러 가지고 되겠습니까. 시원하게 3조 달러 정도 지갑에 채워놓고 시작하시지요. 어떻습니까?”
“그, 그래도 이건!”
“일단 상부에 전달해 주십시오. 어차피 차장님이 책임자는 아니지 않습니까?”
차장은 질리고 말았다. 이 남자, 풍성한 모발만큼이나 스케일도 풍성하다.
결국 차장은 H그룹 협상 책임자 김범석을 설득하지 못했고, 협상 내용을 고스란히 상부에 전달했다.
대통령은 당연히 뛸 듯이 좋아했다.
“그 이상한 광물이 무슨 1조 5,000억 달러나 할 리는 없을 테고, 이건 그냥 우리를 도와주는 거 아닌가?”
“대통령님, 광물을 1조 5,000억 불에 매입하겠다는 게 아니고 국채를 1조 5,000억 불 만큼 추가 매입하겠다는…….”
“그게 그거 아닌가? 어쨌든 훌륭한 조건이군. 협상 책임자를 칭찬해줘야겠어. 이대로 진행하게.”
결국 일사천리로 결론이 났고, 정부는 1조 5,000억 불의 특별채권을 추가로 발행했다.
한서진은 깔끔하게 3조 달러의 채권자가 되었고, 불안정한 오리할콘의 소유권도 넘겨받았다.
이 거래가 알려지자 특별채권에 은근히 욕심을 내던 이들은 일제히 물러났다.
―이건 한서진 박사의 경고다.
―특별 채권 구입에 욕심냈다가는 박살내겠다는 뜻이 분명하다.
한서진의 뜻이든 그의 주변 사람 뜻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NK1이라는 미지의 광물을 구실로, 한서진은 총 3조 달러의 국채를 확보했다. 북한 지역에 더 크고 굵직한 깃발을 꽂은 것이다.
깃발은 펄럭이며 분명한 경고를 보냈다.
여기는 내 땅이니, 침 흘리는 자들은 어서 입을 닦으라고.
미국은 더 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SJ인더스트리, 그리고 새롭게 확장한 영원그룹의 생산공장 등으로 인한 한서진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여기에 러시아의 HAMC로부터 저렴하게 제공받는 희토류 금속까지.
인공 운석 사업을 러시아에 뺏긴 것은 아쉽지만, 그 손해는 한서진이 가져다주는 유무형적 이익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백악관의 분위기는 썩 좋지만은 않았다.
얼마 전 있었던 세연동 파티에서 크리스 대통령 주변 인물들은 단 한 명도 초대받지 못했다. 이는 한서진이 백악관을 향해 대놓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이다.
워싱턴에는 이미 신임 대통령과 한서진의 갈등으로 소문이 파다했다. 정치사회적으로 영향력 높은 인사들은 세연동 파티를 통해 이미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규합되었다.
한서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지만, 그 존재만으로 이미 미국의 중앙 정치에 깊은 관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총사령관은 바로 존 캐롤 상원의원이었다. 클레튼 전 대통령의 친우이자, 한서진에게 생명의 은혜를 입은 인물.
“우리가 대통령을 지원한 건 한서진 박사와 척을 지라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친밀히 지내야 할 인물이지요.”
크리스 대통령은 한 인물과 독대를 하고 있었다.
시원한 금발이 매력적인 장년의 백인 남성, 바로 그를 이 자리까지 끌어올려준 이들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이름은 카를로스 A 모건으로, 현재 직위는 JP모건 은행의 부사장이었다.
크리스 대통령은 알겠다는 듯이 끄덕였다.
“이해하고 있소. 나 역시 한서진 박사와 척을 질 생각이 있던 건 아니었소.”
“허면 왜 세연동 파티에 대통령측 인물은 단 한 명도 초청받지 못한 겁니까? 한 박사가 대통령께 뭔가 위기감을 느껴서가 아닙니까?”
“글쎄, 그보다는 오히려 클레튼 전 대통령이 뭔가 미리 수작을 부려놔서 그렇다는 생각이 드오만.”
“대통령께서 무리하게 한 박사의 거취 문제를 강제하려 해서 그가 화난 거 아닙니까?”
“정말 그렇게 단편적인 인과 때문이라 생각하시오?”
“…….”
“내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한 박사는 이미 알고 있는 거요. 본래 상원의원이 한계점이었을 내가 대통령직까지 올라온 건 ‘서클’의 지원 덕분이라는 것을.”
카를로스 모건은 잠시 이마를 누르고 옅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는 달래줘야 할 때, 대통령은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비록 정회원은 아니지만 나 역시 서클의 일원이오. 화폐발행권은 문제없이 지켜낼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알고 있겠지만 지금 달러의 위상 증진을 위해 여러 모로 준비하고 있는 게 많습니다.”
서클. 화폐발행권을 쥐고 있는 연방은행의 지분을 가진 자들이 주축으로 되어 있는 자본 그룹을 일컫는 말이다.
손꼽히는 중국계 혼혈 부자인 크리스 역시 서클의 일원이다.
그러나 혈통의 비순수함 덕분에 그는 ‘정회원’의 지위는 부여받지 못했다. 정회원과 일반회원은 연방은행의 지분을 소유했는지 여부로 나뉜다.
“여러 회장님들께서도 깊이 염려하고 계십니다. 그것을 잊지 마십시오.”
“물론이오. 그리고 서클도 잊지 말아야 할 거요. 모든 걸 무사히 완수하고 나면…….”
“서클은 약속을 지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카를로스는 사교적인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대통령께서도 당연히 정회원이 되실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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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는 그들만의 리그에 편입되기 위해 발버둥 중입니다.
재산이 몇 백억 달러 밖에 안 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