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76 새 집권세력 =========================================================================
놀라운 선거 결과에 한국 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다.
마치 클레튼 대통령이 재임에 실패하고, 비중 없던 크리스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미국 사회가 겪은 파동과 비슷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여당 후보 도원패는 야당 후보에 비해 언제나 15% 이상 여론 조사 결과에 뒤쳐져 있었으며, 단 한 번도 앞지르기는커녕 15% 안으로 그 차이를 좁히지도 못했다.
야당 후보는 이미 자신이 당선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만만하게 대통령으로서의 포부를 밝히고 다녔다. 여당은 김두박이 끼얹은 흙탕물을 어떻게든 한 방울이라도 씻어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다.
그렇게 명암이 확연했는데, 막상 개표를 해보니 놀라운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얼떨떨한 승리에 여당은 잔칫집 분위기였고, 야당은 줄초상을 맞이한 집안 같았다.
득표차가 겨우 9만 정도 밖에 안 되는, 정말 미세한 차이였기 때문에 그 안타까움은 더욱 컸다. 반대로 여당에게는 미세한 우위로 이뤄낸 극적인 승리였고.
전국 득표율이 50%가 되지 않을 만큼 저조했고, 사회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크게 가라앉았다.
선거 결과의 유효성, 정당성을 놓고 여러 목소리가 나오긴 했으나, 그마저도 목청이 크진 못했다.
사회 전체에 걸쳐 자리 잡은 것은, 선거 결과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국민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결과에 몹시 실망하고 있었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TV에서는 취임식 장면이 한창 나오고 있었다.
무척 저조했던 투표율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취임식 현장에는 많은 참관객들로 바글거렸다.
혹시 모를 폭동을 대비하기 위해서인지 국회에는 평소보다 더 많은 전경과 경호원들이 배치돼 있었다. 다행히 취임식은 전체적으로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이뤄졌다.
국민 초청석 쪽 분위기는 대체로 조용했다. 간혹 시끄러운 함성을 지르는 열성 지지자들이 보였으나, 수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다.
“정말 오빠 예측대로 도원패 후보가 대통령이 됐네요.”
다리를 꼬고 앉은 송하나가 조용히 돌아보며 말했다. 한서진은 팔짱을 낀 채로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간단한 빅 데이터 활용일 뿐이지.”
“그래도 너무 신기해요. 혹시 몇 %로 당선된다는 것까지 다 맞추셨어요?”
“그건 예측이 아니라 예언이나 다름없지. 사람들 개개인의 마음을 읽거나 투표 당일 심리 상태나 개인 사정까지 예측하는 것은 아니야.”
한서진은 그녀의 손등 위에 손을 얹으며 말을 건넸다.
“H그룹, 이번 대선에 별로 안 나섰더라?”
“네, 그랬어요.”
“왜?”
한서진은 그 점이 궁금했다. 전에 말한 걸 보면 H그룹은 이번 대선에 총력을 기울여서 나설 줄 알았다. 그런데 맥 빠지게도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H그룹이 가만히 있으니 눈치를 보고 있던 다른 대기업들도 비슷한 노선을 탔다. 아마 이번 대선은 재계의 정치 비자금이 가장 적게 투입된 깨끗한 선거일지도 모른다.
“나서봤자 바뀌는 게 없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고민하다가 그냥 포기했어요.”
“이거, 내가 시작하기 전부터 김빠지게 만들었나?”
“아니에요. 어차피 누가 대통령이 되든 후보 자질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김두박 전 대통령 때문에 여당 혐오 의식이 두드러지긴 했지만, 야당도 거기서 거기거든요.”
“……뭐, 정치판이 다 그렇지.”
“그래도 도원패 후보가 쬐금 더 타락한 쪽이라서 고민을 했는데, 굳이 그 사람의 당선을 막으려고 수고해야 할 만큼 야당 후보가 깨끗한 것도 아니어서요. 그냥 깔끔하게 아무것도 안 하기로 했어요.”
그녀는 고개를 비스듬하게 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그룹 차원에서도 불법적으로 개입할 계획은 없었어요. 이제는 바뀌어야죠.”
“어쩐지, 진성그룹도 정치 자금 한 푼도 안 건넸더라. 덕분에 선거캠프들 많이 쪼들린 것 같았어.”
“진성그룹도, 라고요?”
의미심장한 뉘앙스에 송하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한서진은 피식거리며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H그룹하고 진성그룹 빼고는 다 조금씩이라도 정치 자금 건넸더라고.”
“……진짜 모르는 게 없네요.”
“재정 감시 프로그램이잖아. 돈에 얽힌 흐름은 절대 놓치지 않고 포착해.”
어디 돈뿐만일까. 마음만 먹으면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하늘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것을.
천리안이나 다름없는 기술, 그러나 오히려 그 주인인 한서진은 그 활용을 게을리 하고 있었다. 돈의 흐름에 얽힌 부정부패만 찾아내는데 그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모두를 위한 국가 영웅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 영웅의 무게를 회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시선을 돌리는 것이다.
송하나는 배시시 웃으며 머리를 기댔다.
“김시형 검사님만 신나시겠어요.”
“일이 늘어났다고 비명을 지르지 않을까.”
“그나저나 국민 여론이 이상하리만치 가라앉았어요.”
“오랫동안 열심히 공부한 자녀가 시험에서 떨어졌어. 근데 알고 보니 공부하는 척만 했던 거야. 탈락한 게 슬프기보다는 어이가 없겠지.”
“그거 비유 좋네요. 그리 생각하면 지금 반응이 이해가 되긴 해요.”
김두박 대통령과 그를 배출한 여당에 대한 혐오. 팽배했던 정권심판론. 새 희망이 될 줄 알았던 야당 후보.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투표율은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저조했고, 야당 후보는 정말 아슬아슬한 차이로 참패했다.
때문에 국민들은 선거 결과에 분노하기보다는 실망했다.
송하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아직도 납득이 안 돼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적응하고 살아야지요.”
그녀의 고민은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사회의식 수준이 이 정도라면 TF팀에서 짜둔 육성 계획으로는 안 되겠는데요. 눈높이를 다시 맞춰야겠어요.”
“아참, 조만간 큰 실험 하나를 할 거야. 알고 있어.”
“어떤 실험인데요?”
“에테르 스톰 안정화 실험.”
짧은 대답이었지만 송하나는 바로 이해했다. 그녀의 표정에 화색이 돌았다.
“북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으신 거예요?”
“감은 조금 잡았어. 그래서 차근차근 실험해보려고. 아직은 어떻게 될지 몰라.”
“그래도 다행이에요. 그나저나 이러면 주가가 또 널뛰기를 할 텐데.”
“그러다가 내부자 거래라고 김 검사가 영장 들고 쫓아 올라.”
“주식 매입은 원래 꾸준히 했거든요? 그리고 그 분, 지금 업무량이 넘쳐나서 다른 사건 맡을 수나 있겠어요?”
송하나는 토라진 듯이 손가락으로 그의 뺨을 쿡 찔렀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게 있는지 안색을 굳혔다.
“근데 북한을 안정화시키면 도원패 정권만 도와주는 셈이 되는 거 아니에요?”
“나는 내 할 일만 할 뿐이야. 정권 입장 같은 거 신경 안 써. 북한 땅을 안정화하면 전체적으로 다 좋은 거지.”
자신의 연구 활동으로 정권이 이익을 보든 손해를 보든, 고려하지 않는다. 그저 연구를 실행할 환경이나 시기가 갖춰졌는지만을 볼 뿐이다.
그런 걸 따져가면서 연구를 할 거였다면, 애초에 국내 사회에 적극 개입을 했을 것이다. 그런 것은 그가 추구하는 철저한 ‘정치적 무관심’과는 거리가 멀다.
“도원패 대통령이 잘못한 게 있다면 검찰에서 알아서 물어뜯고 견제하겠지.”
검찰은 이미 한 번 현직 대통령을 물어뜯은 적이 있다. 어디 두 번인들 못할까.
여당은 경사 분위기였다.
취임식을 마치고 대통령 직무를 시작한 도원패는 세상을 전부 가진 듯한 기분이었다. 비록 어떤 몰상식한 ‘젊은 졸부’ 앞에서 체면을 구긴 적은 있지만, 아무렴 어떤가.
그는 결국 청와대에 입성했다. 누가 뭐라든 간에 어엿한 이 나라 최고통치권자다.
“축하드립니다, 대통령님.”
“정말 축하드립니다.”
조촐한 비공개 만찬이 열렸다.
선거에서 그를 도와 열성으로 임한 측근들을 격려하고, 또 그 공과 상을 따지기 위해 필요한 자리였다. 정상적인 선거였다면 충분한 여유가 있었겠지만, 대통령직 궐위로 인한 선거였기 때문에 항상 시간이 빠듯했다.
그 자리에서 그는 비서실장, 수석 등 주요 청와대 자리를 측근들에게 배정했다. 급수 낮은 실무직 같은 것은 뭉뚱그려서 측근에게 추천권을 넘기기도 했다. 대통령이 된 이상 그런 자잘한 것을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비서실장직을 맡은, 오랫동안 그를 보필해온 박희재 3선 의원이 기뻐하던 것도 잠시, 조심스럽게 발언했다.
“대통령님, 비록 정권 쟁취에 성공하셨지만 우리는 아직 사방에 적이 많습니다. 특히 한서진 박사의 후광을 등에 업은 검찰의 견제를 조심해야 합니다.”
“김시형이가 지 패거리 데리고 아무리 날뛰어봤자 결국 평검사 아닌가. 검찰 전체를 대변하진 못하지. 인사권을 쥐고 있는 건 대통령이니까.”
도원패가 대수롭지 않은 듯이 말하자 비서실장 및 다른 측근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대통령이 뭔가 착오하는 게 아닌지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미 김두박 대통령이 김시형을 우습게보다가 모든 걸 잃고 나락으로 떨어진 걸 지켜봤다. 혹시 그들의 주인은 대통령이 되었다는 기쁨에 눈이 먼 것은 아닐까?
“아무 염려들 말게. 나는 한서진이를 적대하거나 건드릴 마음이 없으니까.”
시원한 장담에 측근들은 어느 정도 마음을 놓았다. 대통령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어차피 한서진이는 이 나라가 어찌 되든 간에 큰 관심이 없어. 그러니 먼저 건드리지만 않으면 그쪽에서 우리를 건드리지도 않을 거야. 이해하겠나?”
“예, 대통령님.”
“검찰에서 개혁인지 반역인지 묘한 태풍이 불고 있지만…… 어차피 검찰 전체가 김시형이를 따르는 건 아니야. 충분히 제어할 수 있지.”
무슨 묘안이라도 있는 듯 의미심장한 뉘앙스에 측근들의 얼굴에 궁금증이 어렸다.
술 한 잔을 비우고 난 대통령이 말을 이었다.
“난 말일세. 취임하자마자 전 정권에 가혹한 정치적 보복을 시행하는 냉혈한 대통령이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네. 무슨 말인지 알겠나?”
“…….”
처음에는 다들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김두박과 도원패는 같은 정당이다. 정권 보복이니 뭐니 하는 말이 나올 관계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치판에서 오랜 세월을 구른 이들, 이내 대통령의 말에 담긴 뜻을 알아차렸다.
“알겠습니다. 김두박 전 대통령 및 그 측근들의 부정부패 조사에 한 치의 불공정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없는 죄를 만들어내란 게 아니고, 있는 죄를 감추란 의미도 아니야. 딱 지은 죄만큼만 처벌받고, 잘한 것만큼만 감경 받을 수 있도록 공정한 법적 조치를 취하게끔 하란 말일세. 그래도 같은 여당 출신 대통령 아닌가.”
“예, 대통령님!”
본래부터 도원패는 말을 돌려서 하길 즐겨했다. 측근들도 그런 화법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다.
김두박 대통령 및 측근들과 그 가족, 지인들에 얽힌 부정부패의 규모는 엄청나다. 검찰 전체가 달려든다 해도 살인적인 업무량이 될 것이다.
그리고 김시형 검사 파벌은 전 대통령 비리 외에 추가로 기소 작업을 벌일 여력이 없다. 게다가 이런 사건은 그 특성상 최소 몇 년은 끈다.
대통령은 김두박을 지원하여 최대한 재판을 길게 끌라고 지시한 것이다. 청와대에 눈을 돌릴 여력이 없는 김시형은 대통령이 한서진을 건드리지 않는 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파먹을 것은 넘쳐나지.’
건드리기 무서운 한서진, 상종하기 껄끄러운 김시형, 그런 쪽을 굳이 자극할 이유가 없다.
대한민국은 넓고, 해먹을 곳은 무궁무진하며, 시간은 충분하다.
그들의 주인은 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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