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375화 (375/609)

00375  새 집권세력  =========================================================================

전직 미 대통령, 그리고 신분을 숨긴 현직 러시아 대통령이 한 자리에 모였다. 그것을 아는 것은 한서진과 당사자 둘을 포함해서 이제 세 명 뿐, 구백 명이 넘는 다른 파티 참가자들은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사레가 들린 듯이 기침을 해대던 클레튼 전 대통령은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고, 대사로 위장한 포티 대통령은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미스터 포티,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당당하게 본래 신분으로 참석하면 될 것을, 외교관으로 위장까지 해가면서 이 자리에 온 이유가 뭡니까?”

“한 박사가 초청한 것은 주한러시아 대사이지 러시아 대통령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럼 원래 참석해야 할 주한러시아 대사는 설마…….”

“오해 마시길. 방사능 물질 꽤 비쌉니다.”

일순 찾아온 침묵, 포티 대통령은 어처구니없다는 웃음을 짓고는 말을 이었다.

“그냥 공관에서 한가하게 노닥거리고 있습니다.”

그제야 한서진은 심호흡을 뱉었다. 클레튼 대통령이 필요 이상으로 긴장한 모습에서 저도 모르게 불길한 상상을 했다.

상식적으로 러시아 대통령이 파티 한 번 참석하자고 자국 대사를 해하고 그 신분을 위장할 필요가 전혀 없지만. 그저 명령 하나면 되는 것 아닌가.

포티 대통령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미스터 프레지던트, 한때 긴장 관계 속에서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펼친 사이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만큼은 지난 과거를 잠시 묻어도 좋지 않을까요?”

“…….”

클레튼의 표정이 미묘했다.

아마 속으로 많은 상념이 교차하고 있을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현 러시아 대통령, 그리고 자신은 재임에 실패하고 쓸쓸히 야인으로 물러난 전직 미 대통령.

길지 않은 고민 끝에 그는 악수에 응했다.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포티 대통령의 분장은 완벽했다.

파티장에서 그의 진짜 신분을 눈치 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그를 단순히 러시아 대사인 줄 알고 있었다.

포티 대통령이 클레튼 대통령과 진지한 분위기를 교환할 때는 몇 몇 이들이 관심 있게 주시하기도 했다. 한서진을 놓고 미러 간에 가벼운 갈등 전초전이 벌어지는 게 아닌가 해서다.

정작 그 둘은 한서진도 내팽개친 채 자기들끼리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서진은 다른 이들을 접대하면서도, 틈틈이 그들을 힐끔거리며 분위기를 살폈다.

현 러시아 대통령 입장에서, 전직 미 대통령과 크게 논의할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포티 대통령은 클레튼 대통령과 제법 긴 시간을 보냈다.

마침내 합의를 마쳤는지, 포티 대통령이 먼저 돌아왔다. 순번까지 정한 듯했다.

“두 분이서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진지하게 하셨습니까?”

“박사님에 대한 점유권 합의라고 해두면 될까요?”

“…….”

“하하, 농담 반 진담 반입니다. 저는 우리 러시아가 향후 박사님과 어떤 관계를 쌓고자 하는지 그 계획과 의지를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클레튼 대통령님은 이미 전직 대통령으로 물러나셨는데요. 두 분의 협의가 효용이 있을지…….”

그런 건 크리스와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게 아니냐는 걸 돌려 물은 것이었다. 포티는 예상했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꼭두각시 대통령과 나눌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 꼭두각시를 조종하는 돈의 노예들과는 더더욱.”

“……그런가요.”

“클레튼 대통령이 야인이긴 합니다만, 그에게는 힘 있는 친구들이 많이 있죠. 미국의 의사란 결국 그런 깨어 있는 사람들에 의해 정해지는 법, 저는 러시아의 의사표시가 올바르게 전달되고자 했을 뿐입니다.”

클레튼 대통령을 교섭 창구로 이용했다는 말이다. 그의 뒤에 있는, 미국을 움직이는 자들이 오해할 일이 없도록. 더군다나 그 친구들 중 상당수가 지금 이 파티장에 와 있다.

“그럼 저는 이만.”

포티 대통령이 물러가고, 클레튼 대통령이 다가왔다. 그는 조금 어색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러시아가 박사님께 갖는 욕심이 상상 이상으로 거대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이 파티에 참석한 보람이 있군요.”

“대관절 무슨 이야기들을 하신 겁니까?”

“박사님이 인공 운석 산업 외의 추가 산업을 러시아와 공동 발주하게 되면 미국 내 강경파들이 또 들고 일어설 겁니다. 그들을 반드시 말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한서진은 조금 헷갈렸다.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도 된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그래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박사님은 우리 미합중국의 영원한 명예시민이라는 것을……. 더 노골적인 부탁은 박사님께 심적 부담만 안겨 드릴 테니 그만두겠습니다.”

클레튼 대통령도 그렇게 물러갔다.

송하나가 천천히 다가와서 옆에 서며, 사람들 사이에 섞이는 클레튼의 뒷모습을 흘끔거렸다.

“무슨 이야기했어요? 러시아와 미국이 번갈아 오던데.”

“날 놓고 자기들끼리 순번 같은 걸 정했나 봐. 근데 정작 나한테는 말을 안 해주네.”

“오빠의 간택을 서로 얌전히 따르겠다는 합의 같은 걸 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니 오빠한테 더 할 말이 없는 거겠죠.”

“아, 그런가?”

미국은 그에게 제2의 조국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러시아는 친하게 지내면 좋은 파트너다.

미국을 중심으로 러시아와도 적당히 교류 관계를 유지하면 그에게는 최상의 결과가 아닐까.

그 두 국가도 마찬가지다.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이익을 볼 수 있어서 좋고, 미국 역시 러시아가 과욕에 사고를 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덜 수 있어서 맘 편할 것이다.

두 사람의 합의는 그런 게 아닐까?

“정 팀장님.”

“아, 좀 늦었어. 끝내야 할 업무가 쌓여 있어서.”

“오늘만큼은 편히 쉬다 가시죠.”

전용기에서까지 업무에 시달리고 있었는지 정지원의 안색에는 피곤함이 가득했다. 그는 송하나를 발견하고는 곧 밝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제수 씨. 여전히 아름다우시군요.”

송하나도 배시시 웃으며 악수에 응했다.

“정 대표님도 멋있으세요.”

“그런데 아까 전까지 러시아와 미국이 번갈아 붙어 있던데…… 무슨 이야기를 했어?”

“자기들끼리 순번 정한 것 같긴 한데,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인공 운석 산업은 러시아와 함께 했으니, 다음 에테르 산업은 우리 미국 차례요.”

“콜. 대신 우리가 미국 기업에 배려한 만큼 미국도 우리 러시아 기업을 배려해야 합니다.”

“다른 나라보다 우대해줄 수는 있으나, 우리가 받은 혜택만큼 돌려주긴 어렵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배려가 파격적이었다는 거군요. 하하하.”

사흘에 걸친 파티는 성대하게 끝마쳤다.

파티 기간 동안 집사 최수한은 인근 비즈니스호텔 세 개를 통째로 임대했다. 초대객들이 언제든 편안히 쉴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파티 기간 내내 한서진은 자리를 비우지 않았고, ‘친구들’과 친분을 쌓았다. 오전에는 간단하게 강연을 하거나, 혹은 세계 과학경제의 미래를 토의하기도 했다.

술만 먹고 하하 호호 한 게 아니라, 서로가 품은 야망과 구상을 함께 공유함으로써, 겨우 며칠 만에 사이가 돈독해졌다.

언론은 공개적으로 과시한 ‘범 한서진계’ 세력의 거대함에 크게 놀랐으며, 칭송하고 분석하느라 바빴다.

―개인 자산 700억 불이 넘는 투자 재벌 크렘 회장.

―아우다비의 고귀한 왕족, 안슐 왕자.

―전직 미 대통령과 러시아 대사 등 귀빈 대거 참석.

―세계적인 과학자들도 빠지지 않은 자리.

―……위 명단을 보면 알 수 있듯, 미국의 경제와 정치, 과학, 사회를 이끌어나가는 이들은 모두 참석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자리였다.

한서진이 돌린 초대장 한 장에 단숨에 태평양을 건너 날아온 이들의 화려한 면면은 한국을 숨죽이게 만들었다.

특히 얼마 전 있었던, 세연동 저택 난입 군중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군중 해산이 아닌, 군중 난입 자체가 중점적으로 다뤄진 것이다.

―대체 우리가 그때 감히 어떤 분을 건드린 거냐. 와, 초대객들 명단 보니 장난 아니더라. 덜덜 떨리던데.

―우리가 아니라 그때 멍청한 시위대가 건드린 거지. 함께 싸잡지는 말자.

―중요한 건 한서진 박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라는 거지. 어쨌든 100만 군중이 자기 집에 쳐들어온 거 아니냐.

―100만 군중이면 이 나라 여론을 대변한다고 봐도 무리가 아닌 숫자지.

―어떻게 고작 100만으로 5,000만의 의사를 대변할 수 있냐?

―한서진 박사 입장에선 그렇게 보일만 하다는 거지. 이제 우린 죽었다고 복창해야 한다.

미국 내에서는 이번 파티를 크리스 정권에 대한 대항으로 해석했다.

반면 한국에서는 군중 난입으로 인한 불쾌한 감정을 조국에 드러낸 것으로 받아들였다.

한서진의 성장 과정 및 근로 환경, 그리고 재산 형성 과정이 다시 한 번 부각되면서 그런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세기적인 천재가 시한부 인생을 극복하고, 젊은 나이에 과학계의 거장이 될 때까지 조국이 해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서진 박사의 재산은 전부 미국에서 벌어들인 것이다. 한국에서 거둔 소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나 매우 미미한 수준이고, 거기다가 특별 국채로 내놓은 돈을 생각하면 한국은 그에게 키워준 것 없이 뜯어가기만 하는 친정어머니가 아닐까?

―한서진 박사가 미국으로 떠나려 한다! 이번 파티는 바로 그 경고다!

―우리가 붙잡아야 해! 매달려야 해!

―그때 시위에 나온 100만 명 죄다 잡아서 세연동 저택 앞에 석고대죄 시키자!

여론이 묘하게 흘러갔다.

김두박 전 대통령과 측근들의 비리에 대해서는 어느덧 잊혀졌다. 오로지 검찰만 열심히 그들을 들쑤시고 수사할 따름이었다.

대권을 놓고 벌어지는 대선 주자 간의 치열한 다툼도 한 발짝 뒤로 물러난 듯이 보였다.

여론은 한서진의 노한 마음을 달래고, 그를 붙잡아야 한다는 것에 몰려 있었다. 전직 대통령 처벌이고 대선이고, 그런 게 중요한 상황이 아니었다.

“잠깐 제주도에 가있겠습니다.”

“왜 하필 제주도인가? 북유럽이나 근사한 외국 섬 휴양지나 다녀오지.”

“제주도도 나름 섬 휴양지입니다. 그리고 이 시국에 제가 해외로 나가면 여론이 더 악화될 것 같아서요.”

백철중은 의아한 듯이 갸웃거렸다.

“자네는 한국 사회 상황 주도에는 큰 관심이 없다고 들었는데.”

“관심은 없습니다만, 저 때문에 불필요한 파동이 치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군. 알겠네. 내가 별장지기한테 말해두지.”

“감사히 쓰겠습니다.”

한서진은 시끄러운 국내 여론을 피해, 제주도에 있는 백철중 개인 별장에 당분간 머무르기로 했다.

그의 전용기가 공항에서 이륙했을 때 많은 이들의 심장이 철렁했으나, SNS를 통해 제주도 여행임이 알려지자 다들 가슴을 쓸어내렸다.

투표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라 한서진은 투표 당일까지만이라도 여론의 눈을 피해 있으려 했다.

제주도는 도시 경기를 좌지우지하던 중국 관광객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후, 경제 침체기를 겪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전체적인 분위기도 조용했다.

각 대선 후보들은 여론이 한서진의 거취에 쏠려 있는 와중에도 나름대로 열심히 선거 운동에 임했다.

헌정사상 가장 고요한 대통령 선거였고, 마침내 선거 당일이 다가왔다.

개표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여론조사에서 15% 이상 뒤지고 있던 여당의 후보, 도원패가 대통령이 된 것이다.

김두박 전 대통령과 측근들의 비리로 여당의 이미지가 최악이었기에, 누구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 작품 후기 ============================

타2 : 응 난 예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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