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74 대통령 사임 =========================================================================
비공개 파티지만, 참석객의 신분을 보면 실로 호화찬란했다.
하나같이 미국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이는 주요 인사들로, 이들이 힘을 합친다면 미국을 움직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만큼 명망 있는 인사들뿐이었다.
미국 최고의 투자 재벌, 크렘 회장이 샴페인 잔을 들고 다가왔다. 그는 정원을 둘러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오늘 이 자리를 보니 한 박사님의 덕망이 실로 얼마나 높은지 잘 알 것 같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와주셔서 영광입니다.”
“저야말로 초대해주신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뜻 깊은 자리에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이 자리는 한서진이 자신의 친구들을 모아놓고 세를 과시하는 첫 번째 파티였다.
크렘 회장은 이런 자리를 좀 더 빨리 마련했으면 하는 아쉬움, 이제라도 정식 결집시켰으니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함께 교차했다.
‘백악관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겠군.’
가뜩이나 정권 초기부터 불안정한 백악관으로서는 당황스러울 것이다. 대통령 측근들은 단 한 명도 초대받지 못했으니.
오늘 이 파티 자리를 백악관은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까.
한서진이 자신을 견제하는 이들에게 대놓고 칼을 빼들은 것으로 해석하지 않을까.
“할 일 없는 야인을 이런 귀중한 자리에 불러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한 박사.”
클레튼 전 대통령 부부가 미소 띤 얼굴로 다가왔다.
허망하게 정권을 빼앗겼지만 그의 눈빛은 아직도 생기를 잃지 않았다. 미국의 중심에서 전 세계를 호령하던 시절 그대로의 단단함을 품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하하, 그렇군요. 제가 퇴임 전 마지막으로 방한했던 이후로 처음인가요?”
한서진은 클레튼 전 대통령과 꽤 오랫동안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에 의미심장한 기운이 깃든 게 느껴진다.
두 사람의 담소를 놓고, 주변에서는 나름대로 다양한 해석을 내놓고 있을 것이다.
“편안히 파티를 즐겨 주십시오, 대통령.”
“이제는 대통령이 아닙니다만, 기꺼이 즐기겠습니다. 음식이 정말 맛있군요.”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아쉬움을 뒤로 하고 헤어졌다. 아직 한서진과 말 한 마디 못 나눠본 이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이었다.
“박사, 워치는 잘 쓰고 있소. 귀하에게 이런 예술적 감성이 있다니, 신은 정말 불공평한가 보오.”
터번을 두른 남자, UAE의 안슐 왕자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의 손목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20억 달러에 달하는 에테르 워치가 눈에 띈다.
“세상의 모든 예술품을 접했지만, 이보다 더 아름다운 걸작은 본 적이 없소. 자연의 근원을 이런 아름다움으로 빚어내다니, 귀하는 가히 천재적인 예술가요.”
“……가, 감사합니다.”
낯 뜨거운 칭찬에 한서진은 얼굴이 화끈해졌다.
천재적인 예술 감성이라니, 이런 칭찬은 난생 처음이었다. 이 사람이 세상을 보는 시선은 다른 이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고결한 인물…….’
악수를 나누며 그의 미소를 유심히 살폈다.
태양처럼 환히 빛나는 웃음은 모든 감정의 찌꺼기를 녹여버릴 듯이 찬란하다.
“나는 귀하의 친구요.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시오.”
“고맙습니다.”
재산이나 세계에 대한 영향력만 놓고 보자면, 자신이 그보다 못할 것은 없으리라.
그러나 그에게는 오랜 정통과 고결한 품위가 있었다. 그것만큼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닮기 힘들 것 같았다.
천 명에 조금 못 미치는 초대객들과 간단하게나마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 나니, 온몸이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오빠, 많이 힘드세요?”
“이것도 두 번은 못할 짓이네. 장인어른도 참 대단하시지, 어떻게 이런 짓을 매년, 그것도 여러 번씩…….”
“장사가 결국 사람 많이 만나는 일인데, 이 정도는 거뜬하게 해내야죠.”
“하나 넌 하나도 안 피곤해 보인다?”
“이 정도야 괜찮아요. 전 아직 어리잖아요.”
배시시 웃으며 자신의 젊음을 강조한다. 7살 차이를 의식한 한서진은 괜히 뜨끔해졌다. 그녀는 장난이었을 텐데.
아직 창창한 나이에 어려서부터 운동으로 다져진 경험까지, 한서진은 그녀의 체력이 납득되었다.
파티 분위기는 차분하게 이어졌다.
술에 많이 취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대체로 샴페인으로 가볍게 목을 축이는 정도였다. 그들은 인맥을 다지며, 앞으로 미국이 맞이할 변화를 이야기하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다양한 영역에서 저마다 미국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는 이들이 천 명 가까이 모였다. 그 많은 인원이 물과 기름처럼 겉돌지 않고 자연스럽게 융합되며, 미래를 구상하고 의논한다.
한서진은 그 광경을 보며 가슴이 벅찼다.
저렇게 대단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중심으로 모여 결집되고 있음에 형언하기 어려운 벅찬 감정이 피어올랐던 것이다.
막연히 자신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아는 것과, 그것을 눈앞에서 실제로 체감하는 것은 그 생생함이 전혀 달랐다.
“오늘 이 자리는 크리스 정권에 대한 경고입니까?”
문득 중후한 목소리가 옆에서 말을 걸었다. 흘끗 돌아보니 아까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던 러시아 대사였다.
원래 몇 번 봤던 러시아 대사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어서 의아했던 기억이 난다. 건강 문제로 잠시 직위를 대리하고 있는 거라 했던가.
“경고라니요, 그건 너무 과한 표현입니다.”
“크리스 정권과 박사님의 관계가 썩 좋지 않다고 이미 소문이 파다합니다. 박사님은 어떻습니까?”
“저는 말을 아끼겠습니다.”
“편안히 털어놓으셔도 됩니다. 이미 우리 러시아와 박사님은 굳건하게 손을 잡은 사이가 아닙니까. 전 세계 희토류 시장이 HAMC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고 있습니다. 미국 역시 HAMC의 영향 아래 놓여 있고요.”
한서진은 나직하게 쓴웃음을 흘렸다.
러시아 대사의 말대로다. HAMC는 폭발적인 사업 확장을 통해 희토류 시장을 집어삼켰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한서진의 미국 계좌에는 희토류 금속 매매 대금이 천문학적인 숫자로 쌓이고 있었다.
예상되는 미국의 반발 역시, 미국 기업만을 위한 파격적인 특별 할인가와 우대 정책으로 잠재운 지 오래였다.
HAMC를 중심으로 한서진, 러시아, 미국, 이렇게 셋이 똘똘 뭉친 구조가 돼가고 있는 것이었다.
다른 희토류 제조기업은 이미 손을 놓았다. 고순도의 희토류 원석을 우주에서 떨어뜨리는 걸, 무슨 재주로 이긴단 말인가.
“시간이 더 지날수록 그런 결집성은 고착화될 겁니다. 미국은 우리 러시아에 불만이 있어도 섣불리 토로할 수 없지요. 무역 관계라는 게 원래 그렇죠.”
만약 미국이 러시아를 제지하려 한다면, 오히려 미국 첨단 기업들이 두 발 벗고 나서서 백악관을 제지하려 할 것이다.
“박사님이 우리 러시아와 공동개발을 몇 개쯤 더 늘려도 미국은 뭐라 할 말이 없는 상황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지금 당장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계획은 없습니다.”
“그래도 그런 때가 온다면, 우리 러시아를 고려해주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귀국이 운석 사업에서 전폭적인 양보를 해주신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노골적인 사랑의 덫이지요.”
러시아 대사는 조용한 웃음을 흘렸다.
한서진은 그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며,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위화감을 느꼈다.
‘뭐지? 뭐라고 해야 하지?’
러시아 대사가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틈을 타서, 다른 이가 임시로 직위를 대리하는 거라 들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그의 태도에서 커다란 여유가 묻어난다.
일개 러시아 대사 대리 따위가 가지기에는 힘든, 웬만한 사람은 범접하기 힘든 그런 카리스마가…….
‘잠깐?’
한서진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무심코 발동한 통찰안을 통해, 러시아 대사의 얼굴 위로 불일치를 나타내는 잡음이 엉켜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퍼뜩 깨달았다.
이 사람은 러시아 대사가 아니다. 대사 같은 직위에 머무르기에는 너무나 큰 그릇을 가졌다.
그는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았다. 송하나는 충분히 떨어진 곳에서 중년의 부인들과 담화를 나누고 있었다.
둘의 대화를 엿들을 만한 사람은 근처에 아무도 없다. 한서진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대체 누굽니까?”
“…….”
“러시아 대사라는 건 거짓말이지요?”
러시아 대사, 아니 러시아 대사인 줄 알았던 남자는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그렇다고 어떤 위협이나 음험함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다.
그의 기도에서 흐르는 것은 커다란 여유와 자신감, 일개 대사의 그릇으로 품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대사도 아닌 이가 어떻게 삼엄한 신분 확인 과정을 뚫고 이곳에 들어왔을까.
그 의문에 대한 답을 떠올리기 전, 그가 여권을 슬쩍 꺼내서 보여 주었다. 오직 한서진만이 볼 수 있는 각도로.
여권에 박힌 사진과 이름, 생년월일을 확인한 한서진의 안색이 살짝 경직되었다.
“이 여권은……!”
“제 것입니다.”
그는 대사가 아니다. 하지만 당당하게 러시아의 보증을 얻어 저택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게 가능했던 이유, 그것은 대사는 아니지만 대사보다 더욱 대단한 러시아 관계자이기 때문이었다.
“포티 대통령님.”
“꼭 한 번 실제로 뵙고 싶었습니다, 한 박사님.”
얼굴을 감춘 대통령이 여유 있게 웃었다.
“크리스 대통령이 백악관 만찬을 연다 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닐 겁니다.”
평범한 대사로 위장한 포티 대통령은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떼었다.
“오늘 이 자리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박사님께서 미국에서 얼마만큼 큰 힘과 지지도를 가지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백악관 만찬, 아마 숫자만 따지면 이보다 더 많은 초대객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초대객 개개인의 명망은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저런 사람들을 한날 한 자리에 동시에 모은다는 것은, 미 대통령의 이름으로도 불가능하다.
놀라움을 가라앉힌 한서진이 물었다.
“어째서 이렇게 신분을 숨기시고…… 번거롭게 이러시지 않아도 됐을 텐데요.”
“초대장을 받은 것은 주한러시아 대사이지, 러시아 대통령이 아니니까요.”
“사적인 파티에 어찌 일국의 원수를 초대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 이유이니 너무 서운하게 생각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전혀 그리 생각 안 합니다. 박사님의 입장은 이해하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반드시 참석하고 싶어서, 이런 결례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러시아의 제왕이라 불리는 포티 대통령이 체면 불구하고 몰래 파티에 참석했다. 그 행동에 담긴 비장한 욕심에 한서진은 저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졌다.
“두 분,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십니까?”
그때 클레튼 전 대통령이 살짝 취한 채로 다가왔다. 볼이 조금 빨갛긴 하지만 걸음걸이나 목소리가 흐트러지지는 않았다.
순간 한서진과 포티 대통령의 눈빛이 마주쳤다. 그는 아직도 변장을 거두지 않은 상태였다. 그의 정체가 알려지면 파티장이 소란스러워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 대통령이 참석한 것은 비밀로 해야 한다. 미국에 알려졌다가는 골치 아픈 파란이 일어날 테니.
그런데 클레튼을 보니 왠지 짓궂은 생각이 든다. 포티 대통령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눈을 찡긋했다.
“대통령님, 실은 소개시켜드리고 싶은 분이 있습니다. 바로 이 분, 오늘 파티장을 찾아주신 유일한 현직 대통령입니다.”
“유일한 현직 대통…… 쿨럭! 쿨럭!”
클레튼은 입에 머금은 샴페인을 뿜었다.
========== 작품 후기 ==========
독수리와 불곰의 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