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73 대통령 사임 =========================================================================
“진짜 대단한 걸 만드셨네요.”
멈칫했던 것도 잠시, 송하나는 이내 환하게 웃으며 감탄했다. 거부 반응 같은 것은 일절 보이지 않는다.
“에이, 조금은 무서워할 줄 알았는데.”
“뭐가 무서워요. 빅 데이터에서 의미 있는 예측 시뮬레이션 모델을 만드는 건 이미 있잖아요. 오빠는 그걸 압도적으로 발전시킨 거 아닌가요.”
“그렇게 말하니 별 거 없어 보인다.”
“예언을 하는 건 아니잖아요. 있는 데이터를 가지고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측하는 건데요, 뭐.”
“맞는 말이네.”
어디까지나 예언이 아닌 예측이다.
다만 그 예측이 예언에 필적할 만큼 놀라운 적중률을 보일 뿐. 만약 세계 각국이 이 성능을 안다면 군침을 흘리며 탐낼 것이다.
빅 데이터를 통해 의미 있는 예측을 산출하는 시뮬레이션은 기존에도 여럿 존재했다. 다만 타르타로스 2의 예측 모델이 가지는 차이점은, 비교 불가능할 만큼 압도적인 정보 수집량과 놀라운 계산 능력에 있었다.
그 두 가지 차이가 이런 압도적인 격차를 만든 것이다.
이전에 존재하던 시뮬레이션 모델이 증기기관이라면, 이것은 핵융합로에 비할 수 있으리라. 현대의 기술로는 그 비슷한 수준조차 감히 흉내 낼 수 없다.
“타국이 내 주변을 감시하는 것도 들여다볼 수 있어. 사실 타르타로스 2의 최우선 처리 순위가 바로 그거야.”
군중 해산 사건 같은 대형 이벤트가 있었음에도, 타국은 통상적인 수준에서 한서진을 경계 및 감시하는 수준이었다. 그가 지닌 힘, 그리고 그의 뒤에 있는 미국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미국 역시 마찬가지다.
크리스를 위시하여 자신을 꺼려하는 세력도 ‘국내의 경쟁자 내지 위협 세력’ 정도의 수준에서 경계한다. 같은 울타리 안의 구성원으로 여기기에, 치명적인 위협은 닥치지 않는다.
그가 자신 있게 왕명을 과시한 것도 바로 그런 환경을 파악한 것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무조건 감추기만 하는 것보다, 적당히 과시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될 때도 있으니.
“그걸 활용하면 못할 게 전혀 없겠어요.”
“글쎄. 오히려 아무 마음도 안 생기더라. 너무 많은 것을 들여다봤나 봐.”
진심이었다.
타르타로스 2를 통해 이 나라 사회 시스템 및 구조를 구석구석 스캔했을 때, 그는 제법 큰 실망에 빠졌다.
윗물, 중간물, 아랫물을 가리지 않고 비합리와 비상식이 범람해 있었고, 그것을 지적하면 이 정도면 얼마나 살기 좋은 나라냐, 아프리카 전쟁국에 태어나면 어땠을 거냐, 라는 식의 무논리로 무장한 윽박지름이 호통을 쳤다.
아서라면 모든 것을 하나하나 뜯어고쳐 제2의 레노지안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곤 했지만, 그는 사회에 손을 댈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오빠가 많이 실망하신 건 알겠어요. 전 그래도 오빠가 좀 더 큰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기반이 필요하고요.”
“미국에서도 기반은 충분해.”
“기반은 많을수록 좋죠. 한국도 잘만 개선하면 좋은 직할령이 돼줄 거라 생각해요.”
송하나는 가볍게 웃으며 덧붙였다.
“걱정 마세요. 그런 번거로운 일은 오빠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테니까요.”
그녀가 무엇을 바라는지 그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바로 좀 더 큰 것에 대한 욕심이다.
자신에게야 이 나라가 미련 없을 뿐, 다른 이가 지금 자신의 자리에 있었다면, 그 어떤 불결한 짓도 서슴지 않고 이 나라를 잠식했으리라.
“오빠가 조금만 더 욕심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전 지금 모습도 좋아요. 그거야 제가 채워주면 되니까요.”
“하나 너, 욕심 많았니?”
“네, 저 원래 욕심 엄청 많아요. 오빠하고 사귀는 거 보면 아시잖아요.”
“우리 알던 초기 시절 생각하면 별로 욕심 많다고는 생각 못 해봤는데.”
“그거야 환경에 적응한 거구요. 지금은 제가 욕심 조금 부려도 아무도 비난하지 않을 상황이잖아요?”
“네 욕심은 어디까지인데?”
“당연히 오빠가 잘 되는 거요.”
말은 참 쉽다. 하지만 그 ‘잘 되는 것’의 영역이 어디까지 닿아 있을지 가늠하자 한서진은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고 있을지도 몰라서.
그녀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러니까 북한 에테르 스톰 문제도 어서 해결해주세요. 언제쯤 사람이 살 만한 땅이 돼요?”
“……어, 그건 아직 기약이 없어. 연구하고는 있는데 좀처럼 진전이 없네.”
“하고 계시기는 한 거죠? 예측 모델 퀄리티 보면 북한에는 관심 없고 거기에만 정성을 쏟으신 것 같은데.”
“그건 만들기 안 어려운 거거든?”
“못 믿어요. 오빠 게으르다는 거 다 소문났어요. 재능 낭비.”
그녀가 안 믿어주자 한서진은 억울했다.
진짠데.
어수선한 나라 분위기와 달리, 세연동 저택은 큰 파티를 앞두고 분주했다. 집사 최수한은 저택 안팎을 바쁘게 돌아다니며 손수 식재료와 인테리어를 준비하는 등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한서진은 정지원으로부터 초대받고 싶어 하는 ‘친구들’의 명단을 받았다. 메일을 열어본 그는 잠시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을 맛봐야 했다.
“정말 이 많은 사람들이 온다는 말입니까?”
「정확히는 초대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지. 참고로 내가 일단 추려낸 거야. 미국 내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만 간추려서.」
“이건 너무 많잖아요?”
「그래봐야 900명 조금 넘네. 천 명도 안 되는데 뭐가 어때서.」
자그마치 9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초대 명단에 올라 있었다.
쓸데없는 사람들까지 다 집어넣은 건가 의심돼서 자세히 훑어보면 그것도 아니다. 정치인, 할리우드 톱스타, 언론 종사자, 고위 관료, 전현직 군인, 기업인, 시민단체장, 덕망 있는 과학자 등 다양한 인사들이 파티에 오고 싶어 했다.
작년 미국을 움직이는 100인이라고 선별된 이들 중에서도 무려 30명이 넘는 숫자가 명단에 올라 있었다.
“이게 추려낸 거면, 원래는 몇 명이었는데요?”
「만 명 조금 넘었지 아마?」
“…….”
「물론 관련 사람들까지 알고 요청한 건 아니고, ‘친구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 중에서 참가하고 싶다고 요청한 것만 그래. 마음 같아서는 다 부르고 싶지만, 그 인원을 수용할 순 없으니 그래도 상대적으로 크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만 일단 내가 추려낸 거야. 거기서 네가 더 추려내야지.」
“……됐습니다. 그냥 다 부르죠.”
「오, 역시. 우리 한 박사님은 통이 크다니까. 알겠어. 하긴 고작 만 명 초과해봤자 세연동 대저택이라면 충분히 수용하고도 남을…….」
“지금 정 사장님이 추려내신 인원만 다 부른다는 말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쳇.」
뭔가 심히 많은 아쉬움이 남은 듯한 목소리다. 아니, 대체 왜?
그렇게 초청 인원은 천 명이 조금 못 미치는 수로 정해졌고, 초대객 명단을 받은 최수한은 의외로 덤덤했다.
“생각보다는 적군요. 박사님 위신을 생각하면 1, 2만 명 정도는 오실 줄 알았습니다만.”
“원래 만 명이 넘었는데 거기서 다시 추려낸 겁니다. 너무 많아서요.”
“이 대저택이라면 1, 2만 명의 초청객 정도는 충분히 수용하고도 남습니다.”
“……제가 정신이 없어서 안 되겠습니다. 그냥 이대로 가지요.”
구백대도 이미 충분히 많은 숫자다.
충분한 연회 준비 기간을 가진 뒤, 정식으로 초대장을 돌렸다.
초청일이 가까워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초청객들이 비행기를 타고 입국했다. 전세기나 일반 항공을 이용한 이도 있지만, 전용기를 타고 온 사람도 절반에 가까웠다.
세연동 파티는 언론과 대중으로부터 지대한 관심을 샀다.
세를 과시하는 일이 없는 한서진이 마치 보란 듯이 대대적으로 미국 유지들을 초청해 파티를 벌였으니, 대선으로 혼잡한 와중에도 큰 흥밋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기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저택에 침투해서 취재거리를 따내려 했으나, 철통같은 경비와 신원 확인은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입구 길목에 진을 친 채, 저택에 들어서는 고급 세단들을 찍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한편 천 명 가까운 손님들을 맞이한 한서진은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야 했다.
파티 경험이 몇 번 있지만, 그것은 다른 파티 자리에 귀빈으로 초청을 받은 것이고, 오늘처럼 자신이 파티 주최자가 된 경험은 처음이었다.
“초청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드디어 박사님 저택에 들어와 보는군요.”
악수를 나눈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감격한 얼굴로 그리 말하며 저택 풍경을 둘러보았다.
“참 아름다운 저택입니다. 박사님의 품격과도 몹시 잘 어울립니다.”
“감사합니다.”
“허허, 정말 즐거운 파티로군요. 미국을 움직이는 유력자들을 이렇게 한데 모아 놓고 볼 수 있다니. 박사님의 고망한 위명을 잘 알겠습니다.”
과분하다 싶을 만큼 칭찬을 건네면서,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왼손을 슥 들어서 어깨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그 바람에 손목에 찬 시계가 반짝반짝 빛을 냈다.
한서진은 시계를 보고 조금 반가운 마음에 얼른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혹시 지금 손목에…….”
“부끄럽습니다. 고급형을 사기에는 제 재력이 허락하지 않아서요. 허허, 이것도 나름 큰마음을 먹고 구매했습니다. 주지사나 된 사람이 사치품에 마음을 쏟으면 안 되는데, 이 영롱함은 도저히 눈에서 떨쳐낼 수가 없어서…….”
그의 손목에서 에테르 워치가 반짝거리며 빛났다.
수없이 많고, 작은 부품들이 에테르의 힘에 의지해 서로 맞물려 정교하게 돌아가는 모습은, 보는 이들의 시선을 빼앗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한서진이 직접 제조한 고급형이 아니라 에테르워치 브랜드에서 일하는 시계 명인들이 제조한 보급형이지만, 그 미적 아름다움만큼은 눈이 부시게 빼어났다.
캘리포니아 주지사라 하나, 그의 재력으로 10억 달러를 호가하는 고급형 모델을 구매하기란 불가능했으리라. 가격이 10만 불대부터 시작하는 보급형 모델을 구매한 것만 해도 무척 크게 마음을 먹은 것이다.
구매가 가능하다 해도, 그와 같은 지위에 있는 정치인이 그런 사치품을 차고 다닌다는 것은 유권자나 정적으로부터 지탄받을 일이니까.
“이런 자리가 아니면 제가 이런 고가품을 당당하게 차볼 일도 없습니다. 허허.”
한서진은 피식거리며 인사를 마치고는, 차례를 기다리는 다음 손님과도 인사를 나눴다. 그는 할리우드 엔터테인먼트 그룹을 물려받을 황태자였다.
악수를 나눈 그는 자연스럽게 왼손을 들어 올려 안경테를 살짝 밀어 올렸다. 그 덕분에 왼손에 차고 있는 에테르워치의 영롱한 모습이 드러났다.
“어, 그것은…….”
“맞습니다. 박사님께서 22번째로 제조하신 고급형 모델이죠. 한국에서는 22가 행운의 숫자라고 들었습니다. 특별한 신의 가호가 붙는다고 하더군요.”
“…….”
이런 건 모른 체 해주는 게 매너겠지?
파티는 흥겨웠고, 한서진은 천 명 가까운 참석자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느라 힘에 부쳤다. 송하나가 함께 해주었기에 그나마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었다.
아랍 왕족에서부터 공룡 기업 이사까지 가리지 않고, 그의 앞에서 자신의 왼손목을 드러내기 바빴다.
고급형과 보급형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파티에 참석한 전원이 에테르워치를 차고 있었다.
“이거 왠지, 에테르워치 고급형 다음 라인업이라도 발표해야 될 분위기인데.”
“그러면 참석객들이 더 좋아할 거예요.”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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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손님들은 워치를 착용했으며, 그중에는 양손을 닦아주는 이도 있었다.
나의 두 손을 조심해라, 더블 워치 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