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371화 (371/609)

00371  대통령 사임  =========================================================================

정지원이 전용기를 타고 입국했다.

SJ인더스트리 최고경영자의 입국은 메이저 언론에서 호들갑을 떨어도 좋을 만큼 빅 이벤트다. 하지만 그는 기자들의 눈을 피해 VIP 전용 게이트를 통과 후, 곧바로 세연동 저택으로 향했다.

“사장님은 대형사건 하나 터질 때마다 꼭 빼먹지 않고 오시네요.”

“출장 핑계 생겨서 좋긴 해. 다 바쁘다고 난리인데 사장이 함부로 빠지기 곤란하거든.”

오랜만에 보는 정지원의 얼굴은 늘 그렇듯이 밝고 자신감이 넘쳤다.

“혹시 워싱턴에서 뭐 들으신 게 있나요?”

“특별히 전달해야 할 메시지 같은 건 없다. 내 고용주는 미국이 아니니까. 그래야 할 이유도 없지.”

정지원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도 그쪽 친구들을 통해 이것저것 들리는 말은 있어. 최근에 백악관의 근심이 꽤 깊어진 것 같더라.”

“근심 없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겠어요.”

“그래, 근심 없는 사람은 없지.”

정지원의 표정은 무언가를 간절히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의 것이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한서진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얼마 전 이곳에서 있었던 군중 해산 사건……. 한때 그거 때문에 미국도 많이 시끄러웠는데, 지금은 언론들이 최대한 보도를 억제하고 있다. 대중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지.”

“그런가요.”

“미국 저널리즘을 보면 좀처럼 일어나기 힘든 일이야. 그만큼 백악관이 이 사태를 주의 깊게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이기도 해. 아, 크리스 대통령을 편드는 건 아니야.”

“미국을 편드는 거다, 이거죠?”

“그렇지.”

대통령이 아닌 미국을 편드는 것이다. 그 말에 담긴 의미심장함을 이제는 헤아릴 수 있다.

100만 군중을 향해 왕명을 시전한 이후, 그에 관련된 온갖 음모론이 여론을 뒤덮었다. 그러나 음모론은 한국과 미국에서만 강한 힘을 얻고 있을 뿐, 그 외 국가의 시민들은 먼 나라에서 일어난 기묘한 해프닝으로만 인식했다.

미국 내의 여론을 억제하는 것만으로 상당한 불길을 진압할 수 있게 된다. 머지않아 인터넷상의 음모론이나 괴담으로만 남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 사건을 믿는, 혹은 믿지 않는 저널리스트 모두 하나의 사실에는 동의하고 있어. 이 사건이 커져봤자 미국에 좋을 것은 없다는 거야.”

“미국 저널리스트들은 진실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는데요.”

“무엇을 위한 진실이냐, 그런 문제지. 미국이라고 결국 별다를 건 없어.”

정지원의 입가에 맺힌 건 냉소가 아니었다. 자랑스러운 마음이 듬뿍 담긴 미소, 이렇게 보니 그는 어엿한 미국인이었다.

“누가 보면 사장님이 뼛속까지 미국인인 줄 알겠어요.”

“아, 따지고 보면 나 원래 미국 출생이야.”

“어? 정말요?”

전혀 의외의 말에 한서진은 황당했다. 그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단 말인가?

“중학교 때 한국에 들어와서 진학했지. 이중국적 걸려서 미국 국적 포기하고 나중에 군대까지 다녀왔는데.”

“몰랐습니다. 그런 사정이 있었을 줄은.”

“중요한 건 아니었으니까.”

잠시 말이 끊어지고, 침묵이 찾아왔다.

정지원이 무슨 용무로 찾아왔는지 이해하는 한서진은 차분히 그가 먼저 말을 꺼내기만을 기다렸다.

한참 입을 달싹이던 그가 가벼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굳이 그래야만 했는지 묻고 싶었다. 한국으로 오는 내내.”

“…….”

“그 자리를 잠시 회피하는 것만으로 충분했을 텐데. 무기는 결정적인 순간에 사용하는 게 좋은 거지, 쓰지도 않을 거면서 보여줄 필요는 없어.”

정지원이 꺼낸 말은 조금 의외였다.

어떻게 된 거냐, 왜 자신에게 말을 안 했느냐, 그게 도대체 어떤 것이냐. 그런 호기심하고는 일절 거리가 멀었다.

마치 한서진에게 그런 힘이 있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비효율적인 활용’에 관해서만 타박했을 뿐이다.

한서진은 피식 웃었다.

“사장님이라면 그런 식으로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무턱대고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이나 해명부터 요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놀랍긴 했어. 하지만 그때만큼은 아니었다.”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때 말인가요?”

“그래, 그때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당시, 고작 반도체 칩셋을 던져 넣은 것만으로 그런 대지진에서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 지진파 에너지의 대부분이 지표면을 투과해 우주로 흩어져 버린 덕분이다.

이미 정지원은 한 번 기적을 경험했다. 두 번의 기적은 좀 더 면역력을 갖고 대처할 수 있었다. 어차피 기적의 본질이란, 이해의 한도를 넘어설 만큼 발달한 과학 아닌가.

“저도 자세한 설명은 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특정한 사람이 원하지 않는 행동을 강제하진 못해요. 예를 들어서 지금 제 눈앞에 있는 정 사장님을 강제해서 전용기를 저한테 넘기게 하는 짓은 못하죠.”

“그런 건 말 한 마디면 그냥 끝나는 건데.”

“……아무튼 그렇다는 겁니다. 그저.”

한서진은 신중하게 고른 단어를 입에 담았다.

“대중의 마음에 호소할 뿐이죠.”

“…….”

“들리지 않는 확성기라고 생각하시면 이해가 되실 듯하네요.”

한서진이 왕명의 효력을 직접 인정한 것은 처음이었다. 아마 정지원도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 역시 미국 정계에 적지 않은 정보통이 있을 테니.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도 눈동자가 빛나는 걸 보면, 앞으로에 대한 걱정과 한서진이 보여준 신뢰에 대한 설렘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었다.

“들리지 않는 확성기라.”

“호소력을 갖추고 있다면 설득할 수 있겠죠. 하지만 사람을 강제하지는 못합니다.”

한서진은 왕명을 그렇게 포장했다. 페이 차일드가 말한, 미국 전문가들이 의심하는 부분을 교묘하게 짜깁기 한 것이다.

정지원을 굳건히 믿는다 하나, 레노지안에 얽힌 비밀은 누구와도 공유하기 어렵다. 그래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만 포장을 벗겨서 보여 주었다.

“굳이 그래야만 할 필요가 있었냐고 물으셨죠.”

“…….”

“정 사장님 말이 맞습니다. 헬기를 타고 그 자리를 벗어나거나,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겠죠. 하지만 전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우둔한 집단에게 제 소중한 저택이 짓밟히는 걸 보고 싶지 않더군요. 그걸 막을 힘이 없는 것도 아닌데.”

세연동 저택은 그만의 궁전.

소중한 성이 책임도 모르는 100만 명의 군중에게 짓밟히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누구라도 비슷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정지원은 어렵게 말을 꺼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많은 이들이 너를 견제하려고 할 거야.”

“얼마든지 견제하라고 하세요. 저도 그 정도 계산 없이 행한 건 아니니까요.”

“…….”

“보시죠. 절 싫어하는 크리스 대통령조차 이런 상황에서도 끝까지 저를 보호하려고 합니다. 미국에는 정 사장님과 크렘 회장님을 포함한 많은 친구들이 있죠. 명망을 떨치는 과학자들도 저를 지지하고 있고요. 아무런 문제도 없지 않습니까?”

그 말대로, 미국은 이 사건이 한서진에게 불리하지 않은 방향으로 종결되도록 안간힘을 쓰고 있다. 오히려 러시아 등 경쟁국이 혹시 모를 공작을 시도할 것을 두려워하며, 첩보전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힘의 과시라는 거구나.”

“이 정도는 해도 되죠. 지금의 저라면.”

“그 이상을 해도 되지. 지금의 너라면.”

정지원은 두 손으로 뺨을 감쌌다. 마치 얼굴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듯이 가볍게 두드렸다. 손을 뗀 그의 눈빛은 조금 전과는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알았다. 우리가 무엇을 하면 될지 확실해졌군.”

지금 그는 ‘나’가 아닌 ‘우리’라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친구들이 조금 걱정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네가 확실히 방향을 잡아주니 고맙다.”

“저도 모르는 제 친구들이 많은가 보군요.”

“어마어마하지. 언제 한 번 자리를 만들어볼까? 아마 다들 좋아할 거야.”

“저야 좋죠. 새로운 친구는 언제든 환영입니다.”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한서진이 품은 의지의 단단함을 확인한 정지원은 이번 한국행이 한껏 만족스러웠다.

“너는 경영에는 별 관심이 없다고 했지.”

“지금도 그래요.”

“하지만 내가 보기엔 한국의 어떤 재벌 총수보다도 네가 훨씬 낫다.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

선배의 프레임을 깨뜨리지 않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정지원은 그의 최측근 가신이다. 그런 입장에서 품을 수 있는 뿌듯함이 그의 얼굴에 가득 드러났다.

“한 가지 더 궁금한 게 있어. 별 건 아닌데, 지금의 넌 한국을 어떻게 생각해?”

정지원이 주기적으로 묻곤 하는 질문, 그러나 이런 타이밍에서는 조금 더 의미심장한 뜻을 담고 있었다.

그전까지 한서진에게 한국은 살기 편한 동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단지 생활하기 편안해서 거주지로 삼고 있을 뿐, 모든 사업 기반은 미국에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 관여하지 않으려는 그의 의지와는 별개로, 그는 어느덧 한국 사회에 깊숙이 관여하게 되었다. 에테르의 선구자라는 존재감은, 굳이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아도 그런 지위를 그에게 선사한 것이다.

“타르타로스 2를 만들고 나서, 잠깐 엉뚱한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이 사회의 진짜 모습이 어떤지 궁금해졌죠. 그래서 잠깐 높이 올라가 내려다본 적이 있습니다.”

높이 올라가 내려다보다. 그게 상징적인 비유임을, 정지원은 이해하고 있었다.

“60엑사플롭스가 넘는 연산 능력을 가진 타르타로스 2를 이용하면 이 나라 전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훤히 들여다볼 수 있더군요. 웃긴 착각이지만, 제가 잠시 신이라도 된 줄 알았습니다. 이 나라의 모든 정보가 버튼 하나 누르는 것만으로 제 손에 들어왔거든요.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단지 연산 속도가 빠르다고 그런 광범위한 정보 수집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타르타로스 2는 에테르를 이용해 전원이 꺼진 디바이스에도 무제한적으로 접근이 가능하고,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 정보를 긁어모을 수 있다.

한국이라는 신체를 상대로 장기와 조직은 물론이고, 세포핵의 반응까지 낱낱이 스캔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모든 게 엉망이었어요.”

“…….”

“생활이 안정되고 여유가 생겼을 때, 나름 사회를 위해서 뭔가를 해볼까 하는 생각도 잠깐 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위에서 내려다본 이 사회는 엉망 그 자체였어요.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엄두도 안 나는, 아니 잘못 손을 댔다가는 오히려 더 큰일이 날 것 같았죠.”

“그 경험이 어떤 심경 변화를 준 거니?”

“줬죠. 저와 제 가족, 친구들을 잘 간수하는 것만으로도 과분한 일이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제가 잘못 건드리면 치료 부작용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도 나름 잘 굴러가는 나라인데. 경제규모도 10위권 근처에 걸쳐 있고.”

“당장은 멀쩡해 보인다고 암 병종이 작아지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지금 이 순간에도 점점 커지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 사회를 위해 뭔가 하고 싶은 계획은 있어?”

“여기서 뭔가를 더 해야 하나요?”

한서진의 냉소, 그것은 그가 굳힌 인생론의 단편이었다.

철저한 수신제가, 그리고 개인적 행복의 추구. 하지만 타인을 해하지 않는 선에서 이뤄진다.

아마 그런 명확한 기준 덕분에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미국과의 사이가 틀어지지 않고 굳건한 것이리라. 정지원은 가신으로서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조만간 친구들을 데리고 놀러올게.”

“잔치 준비 해두겠습니다.”

“아주 큰 파티장을 꾸며야 될 거야.”

============================ 작품 후기 ============================

―왜 이틀이나 휴재했습니까?

“늙고 병든 몸뚱이를 끌고 이만큼이나 열심히 1했습니다. 이 정도는 쉬어도 되죠. 지금의 저라면.”

―그 이상을 써야 할 텐데요. 지금의 너라면.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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