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370화 (370/609)

00370  대통령 사임  =========================================================================

퇴원 후 자택에서 주치의의 감독 하에 요양하고 있을 때, CIA 화이트 요원 페이 차일드가 찾아왔다.

“박사님, 몸은 어떠십니까?”

“이제 좀 나아졌습니다.”

“걱정 많이 했습니다. 부디 몸을 아껴 주십시오. 박사님은 미국, 아니 전 인류의 보물입니다.”

“감사합니다.”

미국이 아닌 전 인류의 보물이라는 말. 과연 페이 차일드만의 본심일까.

인사를 나누고 조금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페이 차일드는 첩보부 화이트 요원, 친목을 다지러 한서진을 찾아오는 경우는 없다.

그는 주로 미 정부가 직접 전달하기 껄끄러운 의사표시나, 혹은 극비를 요하는 실무 정보를 전하기 위해서 찾곤 했다.

그 어느 쪽이든 간에, 이런 타이밍에 그가 찾아왔다는 것은 반길 일이 아니리라.

“워싱턴이 조금 시끄럽습니다.”

“그런가요.”

“다른 나라들도 엇비슷하고요. 일단 국제사회에서 힘깨나 쓰는 국가들은 모두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는 듯합니다.”

“러시아도 그렇습니까?”

“다르지 않지요.”

“그렇군요.”

한서진의 표정은 덤덤했다. 페이 차일드는 유심히 그의 안색을 살폈다. 미묘한 의문이 표정에 맺혔다.

“아무렇지 않으시군요.”

“호들갑을 떨어야 할 이유라도 있나요?”

“저는 적어도 박사님께서 먼저 어떤 설명이라도 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그래야 할까요? 설명이든 변명이든, 제가 무언가를 해명해야 할까요? 제가 그래야 할 사람인가요?”

페이 차일드는 속으로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이 순간 한서진을 향한 그의 판단은 확연하게 굳어졌다.

그만큼 대답도 시원스러웠다.

“당연히 아닙니다. 누가 감히 박사님께 그런 요구를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특별히 할 말이 없습니다.”

“박사님의 뜻, 잘 알겠습니다.”

페이 차일드는 정중히 목례했다. 그것은 비수를 감춘 예의가 아닌, 상대의 의지를 수용하겠다는 복종이었다.

‘무조건 노코멘트.’

한서진이 간접적으로 돌려 말한 내용이었다. 이 사태에 관해서 어떤 해명도 하지 않겠다는, 아니 이 해프닝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

한서진은 모든 것을 묻어줄 것을 요청했고, 이제 미국 정부는 결정을 해야 할 것이다.

‘따를 수밖에 없겠지.’

100만 군중 해산 사건을 놓고 워싱턴에서는 여러 전문가들이 심각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단순한 우연의 일치라는 주장에서부터, 치밀한 선동 공작이 가해졌다는 주장까지, 다양한 관점이 가득했다.

그 중 한서진이 집단 최면 기술 따위를 개발했다는 가설은 제법 비중 높은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은 공론화할 수 없다.’

그런 ‘음모론’은 미 정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파묻어버려야 한다. 특히 한서진이 이렇게까지 나온 상황에서는, 미 정부의 이름으로 비밀리에 떠보는 짓조차 부담스럽다.

미 정부의 권위가 약해서가 아니라, 현 미 정부의 수장이 한서진과 친하지 않기 때문이다. 페이 차일드는 클레튼 대통령이 계속 집권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특별히 큰 문제로 번지지는 않을 겁니다. 미국은 박사님의 뜻을 잘 이해할 테니까요.”

가만히 침묵하던 한서진은 페이 차일드를 똑바로 주시한 채 입을 열었다.

“요원님은 누구를 위해 일합니까?”

“저는 미합중국을 위해 일합니다.”

페이 차일드는 조금도 주저 없이 대답했다.

“클레튼 대통령을 위해서도, 크리스 대통령을 위해서도 아닙니다. 미합중국 전체의 이익을 위해 박사님께서 미국과 오해 없는 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중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저의 임무입니다.”

“그게 바로 CIA의 뜻인가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다소 애매한 대답에 한서진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페이 차일드는 덤덤히 설명을 보충했다.

“미국은 어떤 하나의 의견만으로 움직이는 국가가 아닙니다. 언제나 다양한 입장이 충돌하고 있죠. 당장 정치권이나 산업계만 봐도, 박사님을 중심에 놓고 여러 입장이 갈라지고 있습니다.”

“그게 미국이 강한 이유지요. 이제는 이해합니다.”

“금융계의 크렘 회장은 자본가 중에서, 클레튼 전 대통령은 정치권에서 꼽을 수 있는 대표적인 박사님의 열렬한 지지자였죠. 아쉽게도 현 정부 수장과 내각은 그렇지 못합니다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현 내각은 한서진을 배척하는 게 아니었다. 그와 같은 과학자를 배척한다는 것은 제정신으로 할 수 없는 짓이다.

단지 전폭적인 지지보다는 적당히 견제하는 방향으로 잡고 있을 뿐이다.

“CIA 내부에서도 입장이 여럿 갈립니다. 그리고 저는 클레튼 전 대통령의 입장에 속합니다.”

페이 차일드가 깊은 속내를 꺼내 보이는 건 아마 처음일 것이다. 한서진은 조용히 물었다.

“지금 여기 오신 건 CIA의 지시입니까?”

“아닙니다. 저의 의지입니다.”

“귀하는 일개 요원일 뿐일 텐데, 그런 독단을 감수해도 되는 건가요?”

“저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는 권한은 저의 상부에 있습니다. CIA는 아니죠.”

의미심장한 말, CIA가 자신의 상부가 아니라는 말인가.

한서진은 말을 아꼈다. 크게 놀란 표정도 아니었다.

페이 차일드는 그의 태연한 반응에 만족했는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디 이번 일에 아무 걱정 마십사…… 그걸 전해드리려고 왔습니다. 미국은 침묵을 선택할 겁니다.”

미국이 모른 체 묵인하기로 결정한다면 다른 나라도 어쩔 도리가 없다. 타국은 이 사건에 미국도 깊이 얽혀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손을 뗄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한서진을 공격한다는 건, 미국 본토에 핵미사일 세례를 퍼붓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한서진은 서늘한 눈으로 페이 차일드를 위아래로 훑었다.

“페이 요원…… 당신, CIA 소속이 아니군요. 아니, 이중 소속자인가요?”

“언젠가는 말씀 드릴 날이 올 겁니다.”

“그럼 당신의 진짜 상부에 가서 전해요. 나도 그 정도 생각 없이 행동한 건 아니라고.”

감정이 담기지 않은 음색은 그래서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일이 커지면 곤란한 건 내가 아니라는 거, 알고 있습니다.”

“세뇌는 아닙니다.”

정밀하게 이뤄진 추적 조사 끝에, CIA는 몇 가지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사건의 군중 구성원들은 해산한 뒤에도 자아나 인격 면에서 아무런 이상, 변화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겉만 놓고 보면 그저 우연히 동시 해산이 이뤄진 거라 할 수 있습니다.”

강제로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는 세뇌는 절대 아니다. CIA는 무려 10만 건 이상의 표적 검사 후에 그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

국장은 황당했다.

“그럼 정말 우연이라고? 하지만 정황이 그렇지 않다는 걸 말해주고 있잖은가?”

“정황은 그렇지만, 저희가 조사한 표본들은 그 뒤로도 아무 이상이나 변화가 없었습니다. 사건 당일, 세연동 저택에서 이상 전자기파 등 특별한 현상도 없었고요.”

정황을 보면 한서진이 무언가를 한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아무런 증거가 없다.

“뉴월드백화점 사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그 사건 당시 한서진 박사는 백화점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기 사무실에 있었습니다.”

“적어도 사람을 직접 조종하는 세뇌술은 아닙니다.”

세뇌가 아니라면, 어느 정도 한시름 놓을 수 있다. 그가 사람의 이지를 뜻대로 다루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므로.

그렇다면 그 기현상을 대체 어떻게 봐야 좋단 말인가.

“어떤 호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호소?”

“예를 들어 에테르를 이용해 사람의 심리 상태에 강렬한 호소를 동시에 전달한다는…… 이건 너무 말이 안 될까요?”

“아니야, 그럴 듯해.”

국장은 안경을 고쳐 쓰며 재촉했다.

“계속 말해.”

“그러니까 사람의 의지를 직접 비틀어버린다면 그 부작용으로 자아가 붕괴하거나, 다른 엉뚱한 짓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일찍이 우리 미국이 해왔던 실험에서도 그와 비슷한 결과가 여럿 나왔고요.”

미국은 세뇌에 관련해 공개할 수 없는 많은 실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자백제 등의 의약품은 바로 그 부산물이다. 그래서 국장은 말뜻을 바로 이해했다.

“즉, 텔레파시 같은 거라 말인가?”

“꼭 텔레파시가 아니더라도, 무언가 무형의 에너지를 통해 사람의 마음에 강렬한 호소를 심어준다면……. 의지력이 약한 사람은 그 호소가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는 한에서 들어주지 않을까요?”

“아니면 들어줘도 무방할 정도로 ‘가벼운 부탁’이라든지.”

텔레파시? 국장은 에테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부하 직원은 좀 더 힘을 얻고 말했다.

“표본으로 조사한 이들은 한결같이 동일한 반응이었습니다. 뭔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딱히 머릿속이 이상하거나 무언가에 취한 듯한 기분은 느끼지 못했다, 라고 말입니다.”

“호소, 호소라…….”

단서가 없어도 너무 없다.

에테르라는 미지의 힘을 독점하는 이를 상대로 조사해야 하는 일이 이렇게 버거운 줄이야.

아니, 정말 에테르가 관여한 현상이 맞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한서진은 어느 정도까지 에테르 영역을 개척한 것일까?

국장은 머릿속으로 복잡한 저울질을 거듭했다.

의문의 군중 해산에 얽힌 비밀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을 때 얻을 수 있는 이익과 손해, 모른 채 이 사건을 묻어두었을 때 얻을 수 있는 장점과 단점을.

복잡한 저울질을 마친 국장은 명쾌히 지시했다.

“조사는 계속 하도록. 단, 한서진 박사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해. 조사 작업은 어디까지나 여기 있는 사람들만 알고 있어야 하는 극비다. 알겠나?”

“예.”

“대통령께는 내가 보고하지.”

회의실을 나서는 국장의 발걸음은 제법 무거웠다.

‘미국은 한서진을 잃을 수 없다. 아니, 그래서도 안 된다.’

한서진을 잃는다는 것은 치명적인 손해였다.

그가 비밀스러운 칼을 쥐고 있는 게 의심되지만, 그걸 양지로 끄집어내고 공론화시킴으로써 미국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너무 적었다. 반면 그 손해는 무지막지했다.

‘그의 가치를 생각하면…… 그 정도 예기는 충분히 포용해줄 수 있다. 미합중국이라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국가이기에 국장은 그렇게 자신할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한서진을 불필요할 정도로 두려워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반면 적극적으로 지지할 이들도 있다.

그런 입장 차이로 인한 혼란을 방지하고, 한서진과의 끈끈한 관계로 얻을 이익을 생각하면, 한쪽 눈을 감고 모른 체 넘어가는 게 낫다.

국가 주요 인사의 작은 허물은 모른 체 덮어두는 게 나을 때도 있는 법이다. 해당 인사의 중요성이 높을수록 감내할 수 있는 허물의 크기도 비례한다.

조금 과장해서, 한서진이 몰래 핵미사일을 보유하고 있어도 모른 체 덮어두고 조용히 달래서 받아내는 게 이익이지 않을까. 그걸 터트려버려서 미국이 무얼 얻는단 말인가.

크리스 대통령을 찾은 국장은 한참 동안 독대를 가졌다.

그리고 얼마 후, 미국과 한국에서 의문의 군중 해산 사건이 논란이 되는 빈도가 눈에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이번 CIA는 실탄프로덕션 역사상 가장 온건파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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