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68 대통령 선거 =========================================================================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떠밀리며 들어오던 이들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 뒤에서 밀어붙이던 힘이 사라진 것이다.
“…….”
“…….”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눈동자 굴러가는 소리만 들리는 듯하다. 100만이 넘는 군중은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모른 채, 석상처럼 동작 그대로 굳어 있었다.
‘어지럽다.’
한서진은 머리가 찌이잉 하고 울리는 현기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금속 막대가 쉴 새 없이 떨리며, 듣기 싫은 고주파를 고막에 속삭이는 것 같다.
그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참아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익숙한 감각이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그래, 뉴월드백화점 때도 이랬지.’
미칠 듯한 현기증, 그것은 거대한 힘을 사용한 것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아직 자신에게는 충분하지 않은 권능일까.
아서 왕이 13억이 넘는 중국 인민을 대상으로 건 왕명은 아직도 효력이 남아 있다. 그러나 자신은 고작 100만 명을 상대로 한, 멈추라는 작은 왕명에도 힘겨워 한다.
몸이 또다시 비틀거렸다.
흐릿해지는 시야에 혼란스러워 하는 군중이 보였다. 군중심리와 왕명의 사이에 갇힌 그들은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문득 참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건한 의지조차 없이 그저 선동과 날조에 휘둘리고, 무엇이 진실인지도 모른 채 군중심리에 휩쓸려 움직이는 이들이.
이 사태의 시발점은, 이곳이 재벌 회장 사택이라는 선동에 휘말린 이들이 행진을 시작한 게 아닌가. 그들에게는 그저 선동당했을 뿐이라는, 둘러대기 좋은 변명까지 있다.
한서진은 그런 어리석음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경멸스럽기도 했고, 애잔하기도 했으며, 우습기도 했다.
그는 온몸의 근육이 끊어질 것 같은 통증을 견디며, 힘들게 입을 열었다.
“미개하게 살지 마십시오.”
“여기는 YBN, 상공에서 헬기로 영상을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현재 100만이 넘어가는 군중이 한서진 박사의 사택을 점거하려 시도 중입니다! 왜 이렇게 된 걸까요?”
“네, 현장 특파원의 설명에 따르면 시위대는 한서진 박사의 사택을 모 재벌 그룹 사택으로 오인했다고 합니다. 김두박 전 대통령 사임에 분노한 일부 시위대가 그 분노를 모 재벌에게 돌리고, 방향을 바꾼 것이지요.”
“군중 내부에 오해를 해산하려는 움직임은 없었나요?”
“수차례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이미 대다수 군중이 흥분한 상태였기에 제대로 먹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서진 박사가 정문까지 나왔습니다! 얼굴을 보여주고 시위대를 직접 설득하려는 것 같습니다! 미군 장병들이 곁에서 호위하고 있습니다만, 저 숫자로 될까요?”
“위험합니다! 지금 군중은 몹시 흥분한 상태예요! 정상적인 판단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어서 피해야 해요!”
대통령 사임 및 체포, 거리로 뛰쳐나온 100만 명의 시민, 그런 사건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었다.
흥분한 시위대가 한서진의 사택을 침범했다. 나라의 혼란에 아무런 혐의가 없는, 오히려 1조 달러가 넘는 국채 등 사재를 털어 나라 살림을 도운 영웅의 집을 범한 것이다.
이 초유의 사태에 국민, 공기관, 사기업 등 구분을 가리지 않고 바짝 긴장해서 지켜보았다.
온 나라의 눈이 세연동으로 향했다. 해외에서도 비상을 걸고 사태를 주시했다.
―미쳤다. 가스통 할배들 작정하고 한서진 박사 집 털러 간 거임?
―누가 선동했다던데. 진성 회장 사택으로 쳐들어가자고. 근데 거기가 알고 보니 한서진 박사 집이었던 거지.
―진한 음모의 향기가 난다. 누군가가 패런츠연합을 이용해서 한서진 박사를 어찌 해보려고 한 거 아닌가?
―바보도 아니고 어떻게 저렇게 선동을 당하지? 진짜 이해가 안 된다.
인터넷에서는 이 사태를 격발한 패런츠연합을 향한 성토와 질타가 줄을 잇고 있었다.
비리와 부패로 얼룩진 전 대통령을 끝까지 비호하는 어리석음으로도 모자라, 선동과 날조에 휩쓸려 애꿎은 한서진의 사택을 침입한 것 때문에, 많은 이들이 극도로 화가 났다.
물론 질타에 대응한 반발도 거셌다.
―이 사태는 결국 검찰이 하극상을 일으킨 것 때문입니다. 나랏님이 노후 자금으로 쌈짓돈 조금 챙기는 게 뭐가 어떻단 말입니까?
―재벌들이 대통령을 망쳐 놨어. 시민들은 프락치에 속아 넘어간 거고. 나라 꼴이 진짜 한숨 나온다. 우리 자식들에게 튼튼하고 강한 나라를 물려줘야 되는데, 왼쪽 빨간 놈들이 나라를 팔아먹으려 하고 있어.
―어르신들은 그저 피해자일 뿐이다!
그렇게 제2차 접전이 인터넷에서 벌어지고 있을 무렵, 일부 깬 사람들은 이 상황의 근본적인 심각성에 주목했다.
―이념이고 논리고 다 떠나서, 지금 한서진 박사는 애먼 사람 아니냐? 근데 100만 시위대가 느닷없이 자기 집에 쳐들어왔단 말이야.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지. 나 같으면 불안하고 짜증나서 더는 그 집에서 못 살 듯.
―그 집에서만 못 산다고 하면 다행이지. 만약 한서진 박사가 미국으로 훌쩍 떠나면 어떻게 돼?
―우리나라는 정말 할 말 없고, 얼굴 못 들지.
―패런츠연합이고 가스통할배고 김두박이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100만 시위대가 한서진의 사택을 침범했다는 속보에, 사람들은 늦은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한 채 걱정을 안고 기사 새로고침만 거듭했다.
그 시각, 현장에서 기적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앗?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시위대가 일제히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한서진 박사의 사택에서 물러나고 있습니다!”
발 아래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거리를 가득 채운 인파가 일제히 등을 돌린 것이었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질서정연하게 그곳을 빠져 나갔다. 한서진의 저택을 침범한 이들도 등을 돌려 서둘러 벗어났다.
무려 100만이 넘는 인파가 호흡과 속도를 맞추며 사방으로 흩어지는 모습은, 가슴이 떨릴 만큼 장관이었다.
어느덧 한서진 저택 주변에는 단 한 명의 군중도 남아 있지 않았다. 부서지거나 어질러진 시설 같은 것도 눈에 띄지 않았고, 심지어 쓰레기 하나 떨어져 있지 않았다.
헬기 특파원은 어안이 벙벙해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그 많은 시위대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현장을 물러났습니다. 상황을 보면 아무래도 각자 집으로 돌아간 듯합니다.”
“한서진 박사가 그들을 설득한 것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한서진 박사의 목소리는 시위대 전체에 닿지 않았어요. 혹시 한서진 박사가 모습을 드러낸 걸 알고, 시위대가 뭔가를 깨닫고 물러난 게 아닐까요?”
“100만 명이 넘는 군중이 동시에 똑같은 생각을 떠올리고, 똑같은 행동을 품는다고요? 사회에 대한 극단적인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아닌 이상, 그런 질서정연함은 확률적으로 기대하기 힘듭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대관절 어찌 된 영문일까요? 왜 시위대가 동시에 물러난 걸까요?”
세연동을 지켜보던 국내의 모든 눈은 기적같은 일에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일단 가슴을 쓸어내렸다. 각오했던 참담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
동시에 강한 궁금증과 의문이 남았다.
그날 100만 군중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한서진이 그 자리에 쓰러지자, 호위 중이던 미군 장병들이 놀라서 그를 부축했다.
“박사님!”
“의무병! 서둘러!”
현장에 파견돼 있던 군의관이 급히 달려와서 상태를 확인했다. 그는 서둘러 이송하라는 판단을 내렸다.
헬기에는 VIP의 응급 상황을 대비한 간이 의료 시설들이 갖춰져 있었다. 조금 과장해서 움직이는 병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한서진을 위해 주한미군에서 특별히 도입한 VIP 전용 수송 헬기였다.
“진성의료원으로!”
주한미군 기지에도 의료시설이 있긴 하나, 전문 병원에 비하면 모자랐다. 헬기는 빠르게 날아서 진성의료원에 당도했고, 미리 통보받은 병원은 병원장부터 시작해서 주요 교수들이 모두 나와서 대기 중이었다.
“빨리! 빨리!”
“심전도 늘어집니다! 서둘러요!”
심전도가 눈에 띄게 약해지고 있었고, 의료진의 표정도 더욱 다급해졌다. 환자의 표정은 곧 죽을 사람처럼 핏기가 전혀 없이 창백했다. 호흡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살려! 무조건 살려!”
병원장은 다급해서 의료진을 닦달했다. 한서진이 죽기라도 한다면 자신의 목은 날아간다.
노련한 교수들로 구성된 의료진은 가진 모든 수단을 동원해 처치했고, 마침내 바이탈 수치가 회복세로 돌아섰다. 아직 안심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지만, 요단강에 담근 한쪽 발을 빼내는 데는 일단 성공한 것이다.
소식들은 들은 백철중 부부와 송하나도 병원으로 달려왔다.
“이게 어떻게 된 건가! 우리 예비 사위가 왜 쓰러져!”
“일시적인 심장발작입니다. 다행히 마비까지는 가지 않아 아무 문제는 없을 겁니다. 지금은 회복세에 접어들었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한시름놓은 백철중은 이번에는 최수한 집사를 붙들고 닦달했다.
“나도 봤어요. 시위대가 집에 쳐들어갔다던데, 혹시 무슨 해코지를 당한 건 아닙니까?”
“그건 아니었습니다. 시위대와 박사님은 직접 접촉하지는 않았습니다. 시위대가 물러가자마자 박사님께서 그 자리에 쓰러지셨는데, 아무래도 심리적으로 큰 부담이 되어서 그런 게 아닐까 하고…….”
“100만 명의 군중이 자기를 잡아먹으려고 쳐들어왔는데, 심장이 놀라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니겠어요?”
백철중의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송하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의식을 잃은 한서진의 손을 꼭 잡았다.
“오빠, 다행이에요.”
가늘게 떨리는 딸의 뒷모습을 애처롭게 바라보던 송지현이 백철중을 잡아끌었다.
“여보, 우리는 나가 있어요.”
새카만 어둠이 눈앞을 뒤덮고 있다.
한서진의 의식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나 아무리 집중해도 칠흑같은 암흑만이 보일 뿐이다.
‘여긴?’
꿈인가?
한서진은 불현듯 시위대를 향해 왕명을 사용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 직후 자신의 온몸을 갉아먹던 통증과 탈력감도.
‘나에게는 아직 벅찬 것이었나.’
저절로 쓴웃음이 나온다. 자신이 아서에 비하면 얼마나 모자란지 뼈저리게 와닿았다.
그러나 마냥 실망스러운 것만은 아니었다.
100만이 넘는 군중이 멈추라는 명령에 일제히 모든 동작을 정지했을 때, 그때 느낀 짜릿함이 아직 손에 남아 있었다. 인세의 권력이란 그 짜릿함의 하위 호환일 테지.
‘그나저나 여기는…… 레노지안?’
어둠 밖에 잡히지 않지만, 온몸에 와닿는 익숙한 느낌이 강하게 속삭인다. 오랜만에 꿈을 통해 레노지안의 세상에 들어온 것이 틀림없었다.
천천히 손을 움직이려는 순간, 갑자기 암흑이 순식간에 걷히며 광활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빛이 쏟아지며 일순 아찔한 어지러움마저 스며들었다.
바로 그때, 저 아래에서 강렬한 기운이 느껴졌다. 한서진은 퍼뜩 놀라 그곳을 살폈다.
수십만 명이 넘는, 아니 그보다는 더 되어 보이는 군세가 진을 치고 있었다. 군세가 뿜어내는 힘이 중앙으로 집결한 채 응축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가 느낀 강렬한 기운은 바로 그 중앙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중앙에서 군세를 호령하는 이를 확인한 한서진은 눈을 비비며 놀랐다.
‘아서?’
그러나 곧 깨달았다. 저건 아서 왕이 아니었다. 몹시 닮긴 했으나,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군세의 주변을 응시했다. 수백 마리가 넘는 거대한 초룡과, 셀 수도 없이 많은 용의 군단이 호위하듯 주변을 천천히 비행하고 있었다.
그 모든 풍경은 까마득한 발 아래에 펼쳐져 있었다. 그의 시야는 드높은 하늘에서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아서를 닮은 남자가 한 손에 창을 들었다. 군세가 모은 힘에 남자의 힘이 더해지며, 창끝에 집결했다.
맹렬한 빛을 뿜으며, 창은 곧 빛 그 자체로 변했다.
소리가 없는 가운데, 남자가 무어라 크게 외치며 빛으로 변한 창을 힘껏 던졌다. 빛의 창은 한서진을 향해 쏜살처럼 날아왔고, 그는 화들짝 놀라 피하려 했다.
창은 미처 회피하지 못한 그를 그대로 통과했다. 재빨리 뒤를 돌아봤을 때, 빛의 창은 아무것도 아닌 듯이 그를 통과하여 하늘 끝까지 솟구치고 있었다.
청명한 푸른 하늘 끝에 빛의 창이 도달한 순간, 아름다운 창공의 풍경이 일제히 흩어지며, 동시에 암흑의 하늘이 세상 전부를 뒤덮었다.
빛의 창이 사그라지고, 수백의 초룡과 수만의 용의 군단이 하늘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선두의 초룡에 앉은 남자, 그가 아서를 정말 닮았다고 다시 한 번 느끼고 있을 때, 모든 의식이 끊겼다.
========== 작품 후기 ==========
현실판 CC(군중제어 스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