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65 대통령 선거 =========================================================================
잘못 들은 게 아니다.
그녀는 분명히 말했다. 진리를 투시하는 눈이라고.
‘통찰안을 알고 있어.’
한서진은 바짝 끓는 긴장감을 삭혔다. 놀랍긴 했지만, 어차피 언젠가는 맞이할 일이었다.
신효진의 꿈이 자신의 꿈보다는 한참 과거이긴 하지만, 그녀는 결국 왕비가 될 몸이 아닌가.
망설임 끝에 그는 조심스럽게 끄덕이며 인정했다.
“……맞습니다.”
“아, 역시!”
신효진은 감탄한 듯이 작게 탄성을 질렀다. 주먹을 작게 꽉 쥔 모습이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그랬구나. 맞아. 그래서 박사님이 천재셨던 거군요. 꿈에서 박사님께서 그랬어요. 통찰안은 세상의 모든 진리를 보여주는 힘이라고.”
역시 통찰안이라는 이름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한서진은 보이지 않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동안 신효진은 꿈에서 자신과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인지 세세한 언급을 피했고, 자신도 굳이 추궁하듯 확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둘 다 느끼고 있을 것이다. 어떤 사이인지 서로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라고.
“이제는 그런 비밀까지 공유할 만큼 출세하셨나 봐요? 꿈에서 저는 대륙의 왕일 텐데요.”
“……아.”
얼굴 가득 신이 나 있던 신효진이 멈칫했다. 그것은 당황스러움보다는 부끄러움에 가까웠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신효진은 손가락을 틱틱거리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핀잔은 아니지만, 그 말이 암시하는 내용이 서로에게 묘한 어색함을 주었다.
“박사님은 정말 모르세요?”
“……뭘요?”
“꿈에서 우리가 어떤 관계인지요.”
“…….”
“저는 편하게 말씀해주셔도 좋은데.”
신효진은 어색하게 웃었다.
“꿈은 그저 꿈일 뿐이잖아요. 물론 꿈이 아니라 어딘가에 실제하는 세상일 수도 있지만, 저에게는 그저 생생한 꿈일 뿐이에요. 심지어 전 꿈에서 어떤 것도 받은 적이 없죠.”
“…….”
“꿈에서 우리가 어떤 사이든 간에, 그거 때문에 현실의 관계가 변해야 한다고는 생각 안 해요. 박사님이 제 은인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가 먼저 정리를 해주었다. 결심이 선 한서진은 마음을 가다듬고 대답을 꺼냈다.
“저는 왕이고, 효진 씨는 왕비였습니다. 효진 씨가 겪은 관계는 어떻죠?”
“……얼마 전에 박사님, 아니 리온과 스칼린은 결혼했어요. 덕분에 지금은 모든 백성들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왕비가 됐죠.”
“출세하신 거 맞네요. 그것도 엄청나게.”
“히힛, 그러게요.”
“여기 현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어마어마한데요.”
“그래서 박사님이 부럽기도 해요. 박사님은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최고의 인생을 누리시잖아요. 심지어 여자친구분도 엄청 예쁘고 착하고 대단해요. 혹시 전생에 나라를 구하셨어요?”
분위기가 제법 부드러워졌다.
그동안 서로 알면서도 모른 체 했던 것, 꿈에서는 두 사람이 부부라는 사실.
그걸 직접적으로 인정해버렸지만, 약간의 쑥스러움이 남는 거 외에는 의외로 괜찮았다.
“박사님은 진짜 좋으시겠어요. 저도 스칼린의 능력 아무거나 하나 얻으면 좋을 텐데. 그럼 현실판 수퍼우먼이잖아요. 아, 상상만 해도 신나요.”
“그랬다가는 전 세계가 효진 씨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할 텐데요. 미국도 못 당해낼 겁니다.”
신효진이 말한 스칼린의 무력은 미사일을 퍼부어도 막아내지 못할 수준이다. 그런 인물이 작정하고 제대로 날뛰면 그 어떤 나라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녀 하나 잡자고 핵을 쓸 수도 없고, 괴물같은 능력을 보면 핵이 통할지도 장담하기 어렵다.
“에이, 이미 박사님은 전 세계를 무릎 꿇리셨잖아요.”
“무릎 꿇리다니요. 그런 거 아닙니다.”
“인터넷에서 말 들어보면 박사님이 이미 전 세계 왕이나 다름없다던데요. 한국은 그저 박사님이 거주하시는 왕궁일 뿐이고요.”
그녀와 이렇게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누는 게 얼마만일까. 한서진도 마음 편히 웃으며 그녀의 부러움 섞인 장난을 받아 주었다.
“레노지안은 그저 꿈일 뿐이겠죠?”
“네, 그렇습니다.”
한서진은 확신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그저 꿈일 뿐이죠.”
“우주 어딘가에 실제로 존재하는 세상이고…… 우리가 어떤 기적으로 그곳 사람들과 연결된 건 아닐까요?”
“그렇다면 서로 시간축이 다르지 않겠죠. 효진 씨와 저는 몇 년 이상의 차이가 있잖아요.”
“그저 꿈…….”
그 단어를 중얼거리듯이 곱씹던 그녀가 문득 돌아봤다. 약간의 처연함이 섞인 눈빛이었다.
“박사님이 겪는 일이 저에게는 미래잖아요, 그쵸?”
“……그렇지요.”
“박사님의 시간에서 스칼린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그녀는 담담하게, 스칼린을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물었다.
그녀의 마음이 잡힐 듯이 느껴졌다. 꿈속의 자신이 계속해서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기를 바랄 테지.
한서진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반역을 일으켜 왕에게 저주를 걸었고, 저주의 매개체가 된 대가로 혼수상태입니다.’
그녀 앞에서 차마 저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오래 전부터 품었던, 풀리지 않는 의문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왜 스칼린은 왕을 적대했을까?
신효진은 꿈을 꾸면 스칼린이 된다. 꿈속에서 그녀는 온전한 자아를 유지한 채 활동한다. 그저 꿈속의 아서 왕을 들여다보기만 하는 자신과는 전혀 다르다.
즉 신효진과 스칼린의 관계는, 자아가 별개로 나뉘어진 자신과 아서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스칼린이 왕을 적대했다는 것은, 신효진이 적대했다는 것과 동일한 것 아닌가. 저렇게 순한 성격의 그녀가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반역 자체를 모르는 그녀를 추궁할 수도 없다. 어쩌면 반역 사실을 알려주는 것 자체가, 그녀를 예정된 미래로 이끄는 키가 될 지도 모른다.
“끝내주게 사이가 좋았는데…… 요즘은 조금 싸워서 살짝 냉전 중입니다.”
“아, 정말요? 스칼린 바보네. 정성으로 떠받들며 살아도 부족할 판에 싸움이나 하다니. 많이 싸웠어요?”
“제가 요즘에는 꿈을 꾸지 않아서 잘 모릅니다만, 지금쯤은 화해했을 겁니다. 별로 대단한 다툼은 아니었거든요.”
한서진은 거짓말을 택했다.
“……감사합니다.”
사흘 동안 쉬지 않고 팽팽하게 달리던 협상이 마침내 끝났다.
컨퍼런스룸을 나서는 이들의 얼굴에는 짙은 피로와 안도감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그들은 대통령의 최측근들이었다.
“쉽지 않겠지만, 반드시 대통령을 설득해야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약속은…….”
“우리나라에서 H그룹의 이름으로 못할 것은 없습니다. 안심하시지요.”
H그룹의 대표로 나온 임원은 시원스럽게 말했다. 그는 현 회장인 백철중의 오른팔로, 그가 보증한 것은 백철중 회장이 보증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H그룹의 이름으로 못할 것은 없다, 상당히 거만한 말이다. 청와대 주춧돌 앞에서 일개 기업이 할 말은 아니다.
하지만 대통령 비서실장은 이해했다. 오히려 청와대에 몸을 담고 있기에, 그는 H그룹이 지닌 위상을 누구보다 절절하게 느끼고 있었다.
‘한서진공화국의 첨병. 그리고 본거지.’
비서실장이 보는 H그룹과 이 나라는 그러했다.
그 어떤 공직도 갖고 있지 않으나, 이 나라는 이미 한서진공화국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한서진의 약혼녀가 장차 물려받을 H그룹은 한서진공화국의 근위대나 마찬가지다.
H그룹의 제안은 백철중의 뜻을 넘어서 한서진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 봐도 좋지 않을까. 아니, 제안의 껍데기를 덮어쓰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지시이자, 명령이었다.
‘이 나라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암담한 미래를 생각하자 잠시 한탄이 나왔다.
그러나 일단 자신이 살고 보는 게 먼저 아닌가. 이대로 김두박호에 탑승하고 있다가는 다같이 침몰하고 만다.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가 물에 빠져 죽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그는 주인을 팔아넘기기로 결정했고 다른 부하들도 그에 합세했다. 그러나 부끄럽지는 않았다.
이 결정은 궁극적으로 자신들, 심지어 주인에게까지도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다줄 테니까.
얼마 후, 청와대에서 가진 대통령의 기자회견이 한국 전체를 시끄럽게 뒤흔들었다. 청와대 표적 수사로 나라 전체가 시끄러운 와중, 대통령이 놀랄 만한 발표를 한 것이다.
‘사임하겠다.’
각자의 목적을 품고 탄핵을 준비하고 있던 국회도, 하루빨리 대통령을 끌어내리자던 국민들도, 탄핵을 저지해야 한다며 가스통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온 패런츠연합도, 모두 하나같이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사임이라니. 이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흐름이었다.
자진 사임을 요구하던 이들도 정말로 사임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검찰의 수사로 대통령의 손발이 잘려나가는 상황이지만, 측근 관리를 제대로 못했다는 것 자체가 탄핵 사유인지는 애매한 상황이었으니까.
대통령을 반대하는 자들, 지지하는 자들 모두가 한 마음으로 전면전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예상치 못할 만큼 일찍 백기가 걸린 것이다.
“대통령이 미쳤나? 지금 사임하면 어떻게 자기 자신을 지키려고? 검찰이 잔뜩 벼르고 있을 텐데.”
“망명이라도 가려고? 설마, 그게 가능할 리가 없어.”
“아무튼 일찍 사임해서 다행이다.”
의외의 뒤통수였지만 놀란 것은 잠시, 국민들은 조기 사임을 무척 반겼다.
그리고 이 시각 청와대에서는…….
“이제 된 건가?”
“예, 각하. H그룹에서도 만족할 겁니다.”
“일개 과학자 한 명이 대통령직까지 좌지우지하다니…… 이 나라 꼴이 어떻게 되려고.”
김두박은 수척한 얼굴로 한탄했다.
측근들의 간절한 설득에 따라 사임을 하긴 했지만, 그도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전재산이나 다름없는 정일재단을 날려먹고 얻은 교훈이었다.
한서진의 후원을 받은 일개 평검사가 감히 대통령 가문의 자산을 날려버렸다. 그런 짓을 당하고도 보복은커녕, 오히려 해당 검사는 승승장구하며 검찰을 좌지우지했다.
이미 청와대는 오래 전에 검찰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고, 그 칼끝은 이제 자신의 팔다리를 향했다. 팔다리를 잘라내고 나면 목을 칠 것이다.
사면이 막혀 있는 와중, H그룹의 제안은 숨통을 트여줄 유일한 구명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H그룹이 체면과 노후를 지킬 대책을 적절하게 제시해준 것이다.
‘40억의 노후 자금.’
‘해외 망명.’
‘김시형과의 중재.’
최소한의 중재책이었고, 그 점이 더욱 대통령이 신뢰를 갖게 만들었다. ‘이거나 먹고 눈앞에서 꺼져라.’라는 의도가 명백히 담긴 제안이었기 때문에, 대통령은 오히려 안심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측근들도 적절한 대가를 제시받았으리라. 그러나 그것까지 일일이 관여할 마음은 없었다.
“앞으로 나라 꼴이 어떻게 될지 걱정이지만, 더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군.”
대통령은 애석한 얼굴로 중얼거렸고, 측근들도 공감한다는 듯이 어두운 표정을 떨어뜨렸다.
그때 집무실 밖이 소란스러웠다.
청와대에서의 마지막 회의를 가지던 대통령 일행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수십 명의 남자들이 밀려들어왔다. 대통령은 선두에 선 김시형 검사를 보고 당황했다.
“김두박 씨! 당신을 뇌물수수, 횡령, 배임, 직권남용, 선거법위반 등의 혐의로 체포합니다!”
========== 작품 후기 ==========
“백 회장 오른팔한테 연락해! 이게 무슨 일이냐고!”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이오니, 다시 확인하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