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63 Lock on =========================================================================
목이 갑갑하다.
김시형은 손을 씻다 말고 거울을 들여다보며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조절했다. 갑갑한 느낌이 사라졌지만 대신 매무새가 조금 우스꽝스럽게 되었다.
다시 거울을 보며 매무새를 정리하는데, 문득 이마에 맺힌 땀 한 방울이 보인다.
땀? 여기 실내가 더운 것은 아닐 텐데.
그렇게 생각하던 김시형은 쓰게 웃으며 인정했다. 자신이 지금 무척 긴장하고 있음을.
‘그 사람이 왜 나를?’
의외의 초대, 의외의 만남.
그를 만나고자 청한 사람은 바로 H그룹의 후계자이자 한서진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송하나, 상류층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 인사.
김시형은 피식거렸다. 그런 상류층들과 어울리는 자신은 그럼 뭘까. 다른 사람들은 자신을 어떻게 볼까, 그런 생각이 갑자기 들었던 것이다.
‘난 그저 내 할 일만 하면 된다.’
얼굴을 씻은 김시형은 거울을 노려보듯 주시했다. 앞머리카락이 물에 조금 젖은 모습은 전투를 앞둔 장수와 흡사한 긴장감에 흐르고 있었다.
화장실을 나선 김시형은 홀에 들어섰다. 지배인이 얼른 그를 안내했다.
창가 테이블에는 한 여자가 턱을 살짝 괸 채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사선으로 보이는 흰 턱선이 곱고 아름답다.
인기척을 느끼고 그녀가 얼굴을 돌렸다. 익숙해지지 않는, 숨이 막힐 듯한 미모에 김시형은 얼른 호흡을 붙잡았다.
“조금 늦었습니다.”
“아니에요. 어서 앉으세요.”
생긋 웃음을 건네자 심장이 다시금 쿵쾅거린다. 김시형은 속으로 억지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달랬다.
‘이제 스물 한 살이라고 했지.’
스물 한 살의 발랄한 느낌은 전혀 없다. 겉늙어보인다는 의미가 아니다. 전체적으로 차분하고 사색적인 기품이 우아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한순간이지만 김시형은 한서진이 정말로 부럽다고 생각했다. 그 역시 남자다.
“여기는 너무 눈에 띄는군요.”
어색한 감정을 감추기 위해 김시형은 주변을 둘러보며 그렇게 말을 떼었다. 그렇지 않아도 다른 테이블의 몇 몇 손님들이 이쪽을 보며 수군거리고 있는 게 느껴졌다.
“제가 아니라 검사님을 보는 것 같네요. 요즘 대한민국 검사 중에서 가장 유명하신 분이니까요.”
“제가 보기엔 사모님을 보는 것 같습니다만.”
“사모님이라니, 그렇게 부르시니까 제가 너무 나이 든 것 같잖아요.”
“달리 마땅한 호칭이 없군요.”
정작 그녀는 사모님이라는 호칭이 그리 싫은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소녀처럼 까르르 웃지는 않지만, 사교적이고 차분한 미소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눈에 띄면 어때요. 그러라고 일부러 여기로 자리 잡았는데.”
“일부러요?”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까요?”
김시형은 그녀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송하나는 대중에 별로 공개되지 않았으나, 상류 사회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다. 그들에게 있어 이 자리는, 송하나가 한서진을 대신하여 그의 사람을 관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될 것이다.
김시형이 청와대를 표적으로 삼은 지금, 송하나가 그를 만났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정계는 한서진이 김시형을 적극 후원하는 거라고 받아들일 것이다.
그런 의미를 깨달은 김시형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에게 힘을 실어주시려는 거군요.”
“저 개인적으로도 검사님을 응원하거든요.”
“박사님은 아니시라는 뜻입니까?”
“그건 아니고요. 사실 오빠는 좋은 사람이긴 한데, 세상 일에는 별로 관심 없어요. 연구에 빠지면 그것만 몰두해요. 그래도 오빠가 검사님을 지지하는 것은 사실이니까, 연락 자주 안 한다고 서운하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느끼고 있습니다.”
김시형은 뚫어져라 송하나를 바라 보았다. 한서진을 대신해서 나왔지만, 한서진의 뜻이 아닌 자신의 의지다?
“저는 엄격한 정의가 자리잡은 사회를 추구합니다.”
“좋은 마음가짐이에요. 검사님이라면 그래야죠.”
“지금은 정치권을 주표적으로 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재벌들의 이익에 해가 될 겁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사모님은 그런 제가 아무렇지 않으신 건가요?”
“오빠한테도 그런 말씀하셨나요?”
“박사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깨끗하기 때문에 아무 상관없다고 하셨습니다. 실제로도 그렇고요.”
한서진은 자수성가로 지금의 부를 쌓았다. 재산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정치권이나 재벌과 유착 관계를 형성하지도 않았다. 다른 재벌들과는 입장이 전혀 다르다.
“제가 재벌가 딸이라는 게 걸리시나 보군요. 하지만 저는 검사님의 생각에 동의해요. 부정부패를 걷어내고 합리적인 사회로 바꿔나가는 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김시형은 다소 혼란스러웠다.
자비로운 재벌인가?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재벌과 자비가 공존할 수 있는 단어였던가?
“솔직히 말할게요. 저는 오빠가 우리나라에서 엄청 대단한 존재가 됐으면 해요.”
“이 나라를 박사님이 쥐게 만들고 싶으신 건가요.”
“너무 정곡을 찌르셔서 부끄럽네요.”
크게 당황하거나 부끄러워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김시형은 차분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를 건강하게 살찌워야지요. 그래야 가질 가치가 있잖아요. 병들고 형편없는 사회는 탐낼 가치도 없거든요.”
“……자비로우시군요.”
“아뇨, 자비롭지 않아요. 어차피 나라와 국민들이 건강해야 오빠가 만든 제품도 많이 사줄 수 있으니까요. 마음 같아서는 국민 전원에게 에테르 워치도 하나씩 팔고 싶은 걸요. 지금 상황으로는 어림도 없지만.”
“그게 차라리 자비로우신 겁니다.”
적극적으로 사회의 병종을 걷어내서 살찌고 튼튼한 나라로 탈바꿈시킨다. 소유할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서.
‘긍정적인 착취…….’
김시형은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송하나의 방식을 적절하게 가리킨 말이 아닐까?
가벼운 소름이 돋았지만, 오히려 그런 방법이 지금 사회에는 훌륭한 약이 되지 않을까.
“H그룹에서 손을 쓸 거예요. 대통령의 측근들을 대상으로 회유 작업에 들어갈 거예요.”
“그들도 전원 수사 대상입니다만.”
“탄핵으로 가면 너무 오래 걸리지 않나요? H그룹은 시간을 단축시켜드리는 거예요.”
“…….”
김시형은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형사불소추 때문에 현직 대통령을 직접 칠 수는 없다. 다만 대통령의 팔다리를 모두 쳐냄으로써 대통령을 끌어내릴 환경을 조성할 순 있다.
“대통령 측근들을 회유해서 대통령을 설득케 하려는 거예요. 자진 사임이 훨씬 빠르죠.”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회유를 해야죠. 그리고 H그룹의 노후를 보증해줄 생각이에요.”
H그룹의 보증은 한서진의 약속이나 다름없다. 적어도 상대는 그렇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것은 김시형이 원하는 그림이 아니지만, 그는 반박하지 않았다. 아직 그녀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들에게 약속을 지키실 생각이 없으시군요.”
“재벌은 원래 그래요. 그러니 괜찮아요.”
김시형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니 검사님도 잘 해주셔야 해요. 퇴로를 만들어놓고 그쪽으로 잘 몰아야 하니까.”
“그 퇴로의 끝에 덫이 있다는 것도 모른 채로 말이죠.”
“검사님이 그런 거짓 딜을 할 수는 없으시잖아요. 그런 수작은 H그룹이 맡을 거예요.”
검찰이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고, 지지율이 극도로 떨어지고, 회유된 측근들이 설득하고 H그룹이 은밀한 제안을 하면, 대통령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대로 가면 그 끝에는 탄핵 뿐이라는 것도 알고 있을 테니.
러시아의 HAMC는 희토류 금속 판매를 시작했다.
전 세계 기업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러시아에 몰려들었다. 최근 중국의 희토류 물량은 그 공급이 안정적이지 않았고, 품질 관리도 엉망이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달랐다. 고품질의 희토류 금속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시장이었다. 이제 중국산 희토류 시장은 떨어진 해나 마찬가지였다.
러시아 항구에는 대량의 컨테이너를 선적한 배들이 바글바글거렸다. 철로도 부지런히 희토류를 실어날랐다.
HAMC는 희토류 가격을 굳이 떨어뜨리거나 올리지 않았다. 다만 미국 기업들에게는 30% 가까이 할인을 해주었다.
“한서진 박사님과 우리 러시아의 뜻입니다.”
미국 기업들은 뜻하지 않은 혜택을 입었다고 좋아했고, 다른 나라 기업들은 불공평하다고 투덜거렸다.
러시아는 미국 특별 할인을 은근히 널리 알렸다. 한서진이 러시아와 인공 운석 사업을 했다고 서운해하던 미국 시민들은 특별 할인 정책에 마음을 풀었다.
우주에서 획득한 희토류 판매를 시작하며, 러시아와 HAMC는 말 그대로 돈을 긁어 모으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HAMC는 대금을 받는 계좌를 미국에 두었다.
미국 기업에만 특별히 싸게 해주고, 판매 대금도 미국에 쌓이고 있다.
미국에서 뭐라고 항의하려 해도, 애초에 구실 자체가 없는 상황이었다.
―들었어? 러시아가 파는 희토류가 하루에 400톤 이상이라고 하더라.
―와, 그럼 대체 얼마나 돈을 쓸어담는 거지?
―그 돈 전부 한서진 박사가 먹는대. 그래서 판매 대금을 미국 계좌로 받는 거래.
―러시아는 그럼 뭐 먹고 사냐? 공짜로 남의 사업 대신해주는 거야?
―판매 대금만 한서진이 먹는 거지, 항만이나 시설 이용료 같은 건 러시아가 다 먹잖아.
―그래도 그게 얼마나 되겠어? 그런 큰 사업인데 러시아가 한 푼도 안 먹는다는 게 말이 돼?
―듣자니 물량의 20%까지는 러시아 몫이라고 하던데.
―진짜 한서진 박사 재산이 얼만지 궁금하다. 누가 좀 정리해줄 사람 없냐? 한서진 박사는 워낙 재산 내역이 투명하고 간결해서 쉽게 집계 될 텐데.
―에테르 반도체로 버는 돈에, H-1과 H-2로 긁어 모으는 돈, 그리고 희토류 운석 팔아서 버는 돈을 다 합치면…….
―계산이 안 되네. 아무튼 천문학적인 건 알겠다.
러시아와 손을 잡고 우주 개발 사업을 했지만, 생각 외로 미국의 반응은 좋았다.
그리고 그런 반응을 반기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한국 정부, 청와대였다.
“한 박사가 러시아 일로 미국과 거리가 멀어졌으면 했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모처럼 한 자리에 모인 청와대 대통령 참모진은 저마다 얼굴이 어두웠다. 비어 있는 세 자리가 유독 가슴을 쓰리게 했다.
개인 사정 때문에 불참한 게 아니라, 지금 검찰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있기 때문에 오지 못한 것이다.
한서진이 미국과 사이가 벌어지면 어떻게 운신을 해볼 틈이 있겠는데, 여전히 돈독한 관계를 자랑하니 그들로서는 미칠 노릇이었다.
“검찰이 작정하고 물어뜯고 있습니다. 다음 회의는 여기가 아니라 구치소에서 이뤄질지도 모릅니다.”
“각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그저 노발대발하시는 것 밖에는…….”
“…….”
그들의 주인은 그들을 지켜줄 능력이 없었다. 그들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이제는 결정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 합의를 위해 검찰의 눈을 피해 이렇게 모인 것이었다.
“H그룹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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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모두에게 에테르 워치 팔면 대체 얼마야 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