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62 Lock on =========================================================================
한서진은 오랜만에 학교에 갔다.
그는 대체 논문을 통해 과목 이수를 인정해주고 있기 때문에 출석을 채우지 않아도 된다. 물론 형평성을 위해 학점은 별로 높이 주는 편이 아니지만, 덕분에 다른 학생들의 불만을 사는 일은 없었다.
대다수 동기들은 그와 같은 시간을 공유한다는 것만으로 큰 행운이라 여기고 있기에, 성적표를 A+로 도배를 했어도 사실 그리 불만은 없었겠지만. 게다가 논문도 대충 써낸 게 아닌, 하나하나가 석박사 학위급 수준에 달하는 고퀄리티 아닌가.
‘학교 참 간만이네.’
다른 이들에게 불편한 감정을 주지 않기 위해, 그는 학내에서는 근접 경호원은 두 명만 거느리고 다닌다.
둘 모두 밝은 느낌을 주는 비서 인상의 젊은 여자들이다. 그 외는 거리를 두고 원거리에서 경호한다.
“어, 서진이 형 오셨어요?”
“형님이 학교에는 웬일이십니까.”
“나 아직 학부생이야, 인마. 근데 넌 학부 졸업 한지가 언젠데 아직도 학교에 남아 있냐? 대학원 2학년이었나? 슬슬 화석 냄새 난다.”
“대학원 논문이 쓰러지지 않습니다, 형님.”
신입생 시절, 3학년 학생회장이었던 조현석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이 녀석이 벌써 대학원생 2학년이라니,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형님 올해가 학부 4학년이셨죠. 포스는 총장님 그 이상이신데.”
“엑, 서진이 형 아직도 4학년이에요? 옛날에 졸업하시고 교수 된 거 아니셨어요?”
“이제 졸업반이다. 아직 창창하거든? 화석화 중인 너희들과는 달라.”
“수업 들으러 오신 건 아닐 테고…… 교수님들 만나러 오신 건가요?”
“하나 잠깐 보러 왔어. 오늘 수업 풀이래서.”
“공대야 늘 수업 풀이죠.”
“그런가? 난 수업 들으러 나온 기억이 별로 없어서 잘 실감이 안 난다.”
“형님도 수업만 안 들으시는 거지, 그 대신 늘 자발적으로 자체 연구 실험 하시잖아요.”
조현석과 후배들은 한서진과 짧게 사담을 나누는 이 순간이 즐거웠다. 이대로 인증샷을 찍어서 SNS에 올리기만 하면 폭풍같은 ‘좋아요’ 세례를 받을 텐데.
정치, 과학, 경제에 걸쳐 세계의 역사를 홀로 새로 쓰는 인물과 지금 서슴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다른 이들이 알면 미칠 듯이 부러워할 것이다.
그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잡담 하나하나가 바로 역사의 흐름을 끼워 맞추는 파편이자, 단서 아닌가.
“형님, 제가 궁금한 게 있는데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뭐냐.”
“김시형 검사가 지금 청와대 조준했잖아요. 이거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진짜 대통령 탄핵되는 건가요?”
검찰이 청와대를 향해 정면으로 반기를 든 것 때문에 지금 뉴스는 매일같이 난리였다. 근래 한국은 단 하루도 초대형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어, 기자들의 즐거운 비명과 괴로운 과로를 동시에 야기하고 있는 중이다.
“탄핵? 글쎄. 난 잘 모르겠네.”
“김시형 검사가 형님 측근이잖아요.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살작만 귀띔해주시면 안 돼요? 저 아버지가 그쪽 관련주에 지금 전 재산 올인하셔서.”
“…….”
다른 이라면 감히 그의 앞에서 저런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했겠지만, 조현석은 함께 한 지가 4년차에 접어든 대학 동생이었다. 학번으로는 그가 선배지만, 나이로나 사회적인 지위로나 감히 그의 앞에서 선배 노릇을 하려는 이는 없었다.
“지금 청와대 수사, 내가 간접적으로라도 영향을 끼친 건 전혀 없어. 전적으로 김시형 검사가 자기 소명을 걸고 벌인 일이야.”
놀라울 정도로 덤덤한 어조였다.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둘러대기가 아니라는 것은, 조현석도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그 사람, 원래 그런 사람이거든. 정의 구현에 목말라 하면서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기준을 놓지 않으려 해. 그게 마음에 들어서 나도 후원을 한다 한 거고.”
“언론은 형님이 검찰에 제후를 임명했느니 뭐니 하던데, 역시 다 개소리였군요.”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조현석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김 검사는 그럼 끝까지 물러서지 않겠네요. 아, 한동안 나라 꼴 엉망 되겠다. 이거 취업은 어떡하지?”
“교수 생각하고 있던 거 아니었어?”
“생각은 하고 있었죠. 근데 제 주제에 무슨…….”
셋은 야외 테이블에서 테이크아웃 커피를 놓고 둘러앉아 이런저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나가는 학생들마다 한서진을 알아보고 신기한 듯이 흘끔거리지만, 정말로 다가오는 이들은 없었다.
학내에서만큼은 한서진도 평범한 대학생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발적으로 배려를 해주는 것이다.
“오빠.”
그때 살짝 상기된 음성이 뒤에서 불렀다. 급히 뛰어온 듯 살짝 숨이 찬 목소리지만, 그래서 더 묘한 매력이 느껴진다.
한서진도 반갑게 일어서며 돌아보았다.
“이제 수업 끝났어?”
“네, 연구 실습이었는데 다 끝났어요.”
“또 수업 있어?”
“있긴 한데 그냥 빼죠, 뭐.”
송하나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착 달라붙는 청색 스키니진에 노란색 스웨터, 아이보리색 가디건을 걸치고 검은색 야구 모자를 눌러 쓴 모습은 영락없이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얘들아, 우리 먼저 갈게. 자, 갈까?”
“네, 가요. 선배님들, 다음에 또 봐요.”
한서진이 팔을 내밀자 송하나는 얼른 팔짱을 꼈다. 둘은 서로 몸을 기댄 채 다정히 걸었다.
남겨진 조현석 일행은 부러운 듯이 한서진 커플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송하나 후배님은 저렇게 캐주얼하게 입으셔도 온몸에서 빛이 나네, 빛이 나.”
“야구 모자를 눌러써도 미모가 아주 그냥 새어나오네. 송하나 후배님이 아침에 오빠 하면서 깨워주는 건 어떤 기분일까? 진짜 서진이 형 너무 부럽다.”
그들에게 송하나는 21살의 학과 2학년 후배지만, 호칭은 어디까지나 ‘송하나 후배님’이다. 학과 선배 중에서 감히 그녀로부터 오빠 소리를 듣겠다는 간 큰 놈은 없다.
간혹 예비역 복학생 중에서 뭣도 모르고 들이대거나, 혹은 오빠 소리 듣기를 바라다가 나중에 정체를 알고 얼른 꼬리를 감추기도 했지만, 그 정도는 소소하게 웃어 넘길 이벤트였다.
“근데 언제까지 송하나 후배님이라고 불러야 되지?”
“곧 형수님으로 업그레이드 되겠지.”
저택 수영장.
세 바퀴 완주를 마치고 출발점으로 돌아온 송하나는 수영장 난간에 상체를 올리며 물안경을 벗었다. 썬베드에서 일어난 한서진은 물에 몸을 담그며 그녀 옆에 섰다.
수영 잘한다고 칭찬을 하려는데 그녀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정치 쪽이 시끄럽던데, 오빠는 러시아 사업 때문에 바빠서 신경 쓸 겨를이 없으시겠네요.”
“애초에 내가 벌인 일도 아닌데, 뭐. 김시형 검사랑 마지막으로 밥 먹은 것도 벌써 몇 달 됐어. 조만간 또 저녁 식사에 초대해야 되는데.”
물질적이나 정치적인 지원보다는 세연동 대저택에 정기적으로 초대해서 식사하는 것이 김시형 검사에게는 가장 큰 후원이 된다. 세상에 그의 배후를 한서진이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다.
“내가 요즘 바빠서 그럴 정신이 없네.”
“오빠야 언제나 바쁘시잖아요. 그럼 제가 같이 김시형 검사님이랑 식사해도 돼요?”
“네가? 그러도 되긴 한데, 굳이 나한테 물어볼 필요 있겠어?”
“그래도 젊고 잘 생긴 남자 검사인데 약혼자 허락은 받아야죠.”
장난스러운 대답에 한서진은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녀의 뺨을 쓸어내렸다.
“그래, 네가 나 대신 만나서 밥도 먹고 용기도 좀 넣어줘라. 지금 큰 결심하고 칼 뽑아들었을 텐데 속으로는 나름 고민도 많을 거야.”
“오빠, 김 검사님이 칼 빼들고 나서 그 뒤로는 아직 연락 안 하셨죠?”
“응, 얼마나 됐다고.”
“그럼 그 분도 지금 나름 꽤 걱정될 수 있겠네요. 오빠가 아무 말도 없는 것 때문에.”
“그렇게도 해석이 되려나?”
“모를 일이니까 응원을 보내야죠. 제가 시간 내서 한 번 만나볼게요.”
“그래.”
한국이 요즘처럼 혼란스러운 적이 있을까?
북한은 에테르 스톰 때문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지역이 되었고, 이천만이 넘는 북한 난민의 정착 문제로 한국은 사회 전체적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한서진이 낸 1조 달러가 넘는 북한 재건 자금은 제대로 활용되지 못한 채 국고에서 썩고 있었고, 청와대는 검찰의 반기를 맞아 정책 관련 업무가 사실상 마비 상태였다.
물론 그 모든 게 한서진에게는 물 건너 불구경이었지만.
“젊고 잘 생긴 검사님이라고 흔들리면 안 돼. 알지?”
“오빠가 더 젊고 잘생겼어요.”
송하나는 피식거리며 그의 목을 두 팔로 감았다. 둘은 자연스럽게 입을 맞추고, 한참 동안 서로의 온기를 나눴다.
“…….”
“…….”
말이 사라지고, 깊어진 눈빛으로 대화를 대신했다.
한서진은 먼저 물을 빠져 나가 난간 위로 올라섰다. 그가 내민 손을 잡고, 그녀가 수영장을 빠져 나왔다.
늘씬하고 육감적인 몸을 가볍게 안아 든 한서진은 저택 엘리베이터로 들어섰다.
HAMC 최고경영자 세르제이는 러시아인이다.
포티 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있는 그는 탁월한 경영 감각 덕분에 러시아 정부의 추천을 받고, 한서진으로부터 HAMC 최고경영자로 임명받았다.
세르제이는 공언한 반년은커녕 두 달도 안 되는 시간 안에 희토류 운석을 채취하기 위한 400개의 셀을 구축하는데 성공하며, 자신의 유능함을 유감없이 입증했다.
HAMC를 방문한 포티 대통령은 400개의 셀이 위치한 지도 상황판과 실황 사진들을 둘러보며 껄껄 웃었다.
“이것으로 중국은 이제 마지막 남은 구명줄마저 완전히 잃게 생겼군.”
“대규모 물량 유통을 통해 전 세계 희토류 시장을 단숨에 석권할 생각입니다, 각하.”
“암, 단번에 때려잡아야지. 찔끔찔끔 잡는 건 우리 러시아 스타일이 아니야.”
차곡차곡 시장을 차지해야 할 만큼 여유가 없는 것도 아니다.
물량은 충분하다 못해 넘치고, 러시아 정부가 온 힘을 다해 이 사업을 지원할 것이다. 내외부적으로 걸릴 만한 장애는 아무것도 없다.
“한서진 박사가 좋은 선물을 보내 주었습니다. 각하의 윤허가 필요합니다.”
“선물? 어떤 건가?”
“총 생산량의 20% 범위 안에서, 러시아가 필요로 하는 희토류 물량을 판매가의 40% 내에서 판매하는 게 어떠냐고 하시더군요.”
한 마디로 말해서 러시아는 특별 할인을 해주겠다는 것이다. HAMC가 전 세계 소비 물량을 감당할 수 있음을 생각하면, 총 생산량의 20%의 상한선은 무의미한 것이다.
러시아 소비량은 전량 혜택을 준다는 소리나 마찬가지니까.
“우리 러시아에 선물을? 한서진 박사가 먼저 제안한 게 확실한가?”
“네, 그렇습니다. 각하.”
포티 대통령은 선물 그 자체의 가치보다는, 한서진이 선물을 먼저 주려 했다는 것에 더욱 관심을 보였다.
“우리의 정성이 어느 정도 통하기 시작한 모양이야. 안 그런가?”
“맞습니다.”
“이 정도로 정성을 보였는데 어느 누구라도 마음이 동하지 않겠습니까.”
측근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맞장구를 쳤다.
포티 대통령은 즐거운 듯이 껄껄 웃다가 이내 미소를 지우고 정색했다. 공기가 달라지자 측근들도 얼른 표정 관리를 했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신중해야지. 미국 놈들도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기만 하진 않을 테고.”
포티 대통령은 세르제이한테 지시했다.
“미국 기업들이 사가는 물량은 특별히 다른 나라보다 할인을 해주게.”
“예? 어째…… 아! 알겠습니다.”
의아해서 반문하던 세르제이는 곧 그 뜻을 깨닫고 얼른 수긍했다.
포티 대통령은 싸늘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한서진 박사와 우리 러시아의 공동연구 덕분에 미국인들이 혜택을 입게 되었다, 참 좋은 그림 아닌가?”
========== 작품 후기 ==========
요즘 따라 내 거인 듯 내 거 아닌 내 거 같은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