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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360화 (36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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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나는 차가 출발한 후에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도원패 의원이 한서진에게 떼 아닌 떼를 쓰고 있을 때, 그녀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도원패의 주장이 억지스럽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나서지 않았다.

그의 주장이 재벌 기업을 대변해서 방관한 게 아니라, 한서진이 그런 억지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중진이라 하나 여당 의원 한 명이 한서진을 어찌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만약 제가 에테르 산업을 한국에서 시작했다면 이 중 운 좋고 행동 빠른 분이 지금쯤 자기 그룹 계열사로 만들지 않았을까요?

그 말을 할 때에는 사실 그녀도 속으로 뜨끔했다. ‘운 좋고 행동 빠른 분’에 진성그룹도 당연히 포함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보채봤자 보따리는 없습니다.

냉소적인 어조를 떠올리며, 그녀는 한서진이 이 나라에 어떤 감정을 품고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그는 미국에 모든 기반을 두고 있으면서도, 한국을 떠나지 않는다. 한지혜는 오빠의 이름으로 저소득층 아동, 청소년들을 꾸준히 지원하고 있다.

북한 붕괴 때는 1조 달러 이상 넘는 돈을 투자해 특별 국채를 사들였으며, 지금도 정기적으로 꾸준히 사들이고 있다.

‘특별히 애국심이 불타서는 아닌 것 같은데.’

적당한 선에서 자선을 베풀지만, 한국이라는 사회에 능동적으로 개입할 마음은 없어 보인다. 연구에만 몰두하느라 그랬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철저한 외면이다.

그만한 재력, 명예, 그리고 힘과 배경이면, 한국이라는 사회를 얼마든지 자기 입맛대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떤 반대나 반발도 부숴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한국이라는 사회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북한 재건을 위해 1조 달러 이상의 돈을 냈으면서도 그 돈이 제대로 쓰이는지만 확인할 뿐, 그 이상의 것은 욕심내지 않는다.

만약 이서나가 한서진의 입장이었다면, 그런 거액을 낸 만큼 한국 사회를 철저히 자신의 입맛에 길들였을 것이다. 기업가라면 투자한 것 이상으로 회수해야 할 테니까.

아니, 애초에 그런 큰돈을 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회수 가능성이 희박한 상황이니까.

“이렇게 시간을 내줘서 고마워요.”

“별 말씀을요. 하나와 친하신 분인데, 당연히 시간을 내드려야죠.”

“진성그룹 회장이라서가 아니라 하나 친한 언니라서 기꺼이 시간을 내준 건가요?”

이서나는 피식거리며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쥐었다.

“도 의원 일은 미안해요. 저라도 말렸어야 했는데.”

“그러면 진성그룹이 집권 여당한테 보복을 당했겠죠. 저는 괜찮습니다.”

“정치쪽 인사는 함부로 건드리기 곤란한 점이 있어요. 특히 도의원 같은 거물이라면 아무리 재벌 그룹이라 해도 부담스러워요. 만약 그가 대통령이 된 다음, 뒤를 생각하지 않으면 진성그룹이라 해도 해체할 수 있거든요.”

“글쎄요. 이 회장님 역량이라면 순순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재계 3위 대기업도 정치권에 한 번 잘못 보였다가 한순간에 날아간 적이 있죠. 겨우 20년도 안 된 일이에요. 아무리 재벌이라 해도 정치권은 접근하기 조심스러워요.”

“괜찮습니다.”

미안함이 담긴 변명으로 서두를 뗀 이서나는 차분히 한서진의 표정을 살피다가 말을 꺼냈다.

“한 박사한테 궁금한 게 있어요.”

“뭐가 궁금하신 건지 오히려 제가 궁금해지는데요.”

“한 박사는 이 나라를 어떻게 생각해요? 아니, 어떻게 하고 싶은가요?”

“……그건 좀 어려운 질문이군요.”

“편히 대답해줘요. 거북하면 노코멘트 해도 좋아요.”

잠시 말없는 눈으로 이서나를 응시하던 한서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그런 게 궁금해지셨습니까?”

“대답하면 말해줄 건가요?”

“대답 내용 봐서 생각해보죠.”

“방금 그 대답은 조금 멋있네요.”

이서나는 작게 피식거렸고, 한서진도 그에 응하듯 실소했다.

잠시 목을 가다듬고, 이서나가 차분히 말문을 열었다.

“저는 그동안 한 박사가 한국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이해돼요. 모든 사업 기반과 재산이 미국에 있잖아요? 한국에 들여온 건 말 그대로 생활비 수준이고.”

한서진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이서나는 말을 계속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조금 헷갈리네요. 북한 재건 비용을 1조 달러 이상이나 썼고, 앞으로도 더 쓸 예정이잖아요? 언제 회수할 수 있을지 가능성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인데. 말 그대로, 돌려받을 거 생각 않고 빌려준 돈이었어요.”

“그게 뭐가 헷갈리셨다는 겁니까.”

“만약 제가 그런 거액을 투자했다면, 투자금 회수를 기대하진 못해도 최소한 다른 식으로 대가는 받아냈을 거예요. 적어도 개헌 정도는 이뤄냈겠죠. 그만한 가치가 있는 금액이잖아요? 1조 달러는.”

“…….”

“그런데 한 박사는 이 나라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아요. 대체 왜죠?”

“그건 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자신이 이 나라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왜 궁금해졌냐는 질문. 이서나의 말은 확실히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다.

팔짱을 낀 채 주시하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걸 알아야 우리 그룹도 대처할 수 있으니까요.”

“…….”

“한 박사가 이 나라에 애정이 있다면 어느 정도인지, 미움이나 원망스러운 감정이 남아 있다면 회복할 수 있는 수준인지, 이 나라를 바꾸고 개선하고 싶은 의지가 있다면 얼마만큼인지, 그런 것들을 알아야 이 나라에서 기업을 꾸려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를 그 정도로 높게 보시는군요.”

“다른 사람들이라고 아니겠어요? 한 박사가 마음만 먹으면 이 나라의 정치, 경제, 그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수 있을 텐데. 적어도 재벌 중에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정치권 인사 중에서는 아직도 정신 못 차린 사람들도 몇 몇 있긴 하지만.”

“이상한 사람들은 원래 어느 그룹에나 있는 법이죠.”

“또라이 보존의 법칙이 어디 가겠어요?”

이서나가 받아치자 한서진은 동공이 조금 커졌다. 재벌 회장이 그런 표현을 할 줄은 몰랐다.

“그런 식으로도 말씀하시는군요. 몰랐습니다.”

“왜요, 재벌 총수라고 항상 고상한 말만 할 줄 알았던가요?”

“조금 낭만을 품기는 했습니다만.”

“낭만은 오히려 재벌들이 한 박사에게 품고 있을 걸요?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래봤자 똑같은 사람입니다.”

“저 역시 그래요. 그나저나 어때요? 만족스러운 대답이 됐나요?”

“네, 충분히요.”

대단한 이유는 아니지만, 이서나는 충분히 진심을 보였다. 아니, 자신이 생각하기에 그러할 뿐, 이서나 입장에서는 어렵게 꺼낸 본심이었을지도 모른다.

“꽤 많은 사람들이 저를 거물급 인사로 보고, 기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저는 그저 평범한 한 명의 개인일 뿐입니다.”

“한 박사가 평범한 개인이라니, 지나가는 새가 웃다가 추락하겠군요.”

그의 재산, 재능, 미국과의 친밀성, 그 모든 것을 이용하면 한국을 입맛대로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은 일도 아니리라. 그런데 자신을 평범한 개인이라고 낮춘다.

‘의례적인 겸손? 잠깐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이서나는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에 놀란 눈으로 한서진을 바라봤다.

“한 박사, 방금 한 평범한 개인이라는 말, 그게 품은 뜻이 혹시……?”

“전 이 나라의 거목이 될 마음이 없습니다. 그저 평범한 개인일 뿐입니다.”

“그 많은 자선 사업들은 그럼…….”

“구세주 냄비에 동전을 넣는 것과 다를 바 없죠.”

“특별 국채를 1조 달러 넘게 구입한 것은…….”

“빈곤층을 위한 정기 후원의 연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매년 1조 달러씩 내놓는 게, 정기 후원일 뿐이라고요?”

이서나는 머리가 조금 아득해지는 느낌을 맛봤다.

어떤 거창한 의미도, 거시적인 밑그림도 없이, 조 달러 단위의 거액을 아무렇지 않게 내놓은 거라고 한다. 그 말도 안 되는 거액을 출자한 의의가, 그저 가여운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전부라고 한다.

“하나나 한지혜 양도 같은 생각인가요?”

“둘은 아마 다르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저는 그렇습니다.”

“그저, 연민일 뿐이라고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도 의원의 말에 헛웃음이 나왔던 거고요.”

한서진은 옅은 미소를 띠었다. 이서나는 순간 그를 우러러 보는 국민들이 저 미소를 봤다면,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을 느끼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이 나라에서 거주하는 동안에는 남들만큼 일하고, 소비하고, 투표도 하고, 기부 활동도 할 겁니다. 국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는 행사할 겁니다. 하지만 사회의 흐름을 주도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설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평범한 개인일 뿐이라는 말,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확고하게 선을 긋는 것이었다.

난 이만큼만 하겠다. 그러니 그 이상은 바라지 마라.

그걸 가지고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난하는 사람은 나오기 마련이리라. 보물을 지녔다는 사실만으로 죄인으로 만들고 싶은 사람들은 널려 있으니.

이서나는 미소를 지우고, 똑바로 그를 주시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많이 가라앉았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고마워요. 덕분에 저도 국내에서 어떻게 운신해야 할지 가이드라인이 정해졌어요.”

한서진이 사회 주도에 관심이 없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된 이상, 이서나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더욱 또렷해졌다.

“혹시 한 박사가 그런 마음을 품게 된 게…… 진성전자에서 있었던 과거 때문은 아니죠?”

“죄송하지만, 맞습니다.”

“…….”

“제가 가장 절망하던 순간, 세상은 저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원망하는 건 아닙니다. 그저 제가 하고 싶은 만큼만 하고, 저와 제 주변인들의 인생만 열심히 챙기면 족하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우리나라를 이끌 위대한 인물이 될 수도 있었는데, 진성전자가 그 어린 싹을 잘라버린 셈이군요. 정말 미안해요.”

“아뇨, 저는 지금 제 삶의 방식에 너무 만족합니다. 세상에 헌신하는 영웅의 삶은 피곤하지만, 가정과 자기 자신에 충실한 부자의 삶은 만족도가 매우 높거든요. 그래서 오히려 감사드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이서나는 무거운 한숨을 억지로 삼키고, 살짝 어두운 표정으로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한 박사 말을 들으니, 도 의원이 정말 제대로 헛소리를 했다고 생각되네요. 진성그룹은 당연히 앞으로 그 사람과 거리를 둘 거예요. 지금까지 쌓아온 인연도 조만간 정리할게요.”

“조속히 정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뭔가 생각하고 있는 게 있군요.”

“제가 아니라 제 주변 사람들이 여러 가지를 준비하고 있다 하더군요. 서두르시는 게 좋을 겁니다.”

한서진의 미소는 의미심장했고, 이서나는 도원패의 앞날에 애도를 보냈다.

“이 정도 증거면 확실합니다.”

백철중은 두둑한 보고서를 빠르게 훑어보고는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으로는 안 됐다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거 제대로 털면 몇 몇 재벌들도 함께 딸려나가겠군. 엮인 게 너무 많아.”

“김시형 검사는 절대로 봐주지 않겠죠.”

“안 된 일이지만, 할 수 없는 일이지.”

백철중이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하자 비서실장이 다시 물었다.

“시기는 언제로 하면 되겠습니까, 회장님?”

“도 의원, 그 자의 인생이 가장 빛날 때.”

비서실장이 이해하지 못한 눈치자 백철중은 다시 말을 이었다.

“여당 대권주자로 확정되서 왕좌를 눈앞에 두고 있다는 기쁨에 취해 있을 때, 그때 끌어내려야 더 재밌지 않겠나?”

“회장님, 다음 대선은 아직도 멀었습니다만.”

백철중은 피식거렸다.

“김시형이가 지금 청와대를 겨누고 있네. 조만간 방아쇠를 당길게야.”

========== 작품 후기 ==========

“감히 내 와이프의 (태어날) 손주의 어머니의 배우자한테 무례하게 군 죄, 장인어른의 이름으로 처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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