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359화 (359/609)

00359  추락하는 것은 환경오염이 없다?  =========================================================================

“…….”

“…….”

찬 서리가 내려앉은 듯이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심장 뛰는 소리마저 잡힐 듯한 긴장감 속에서,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눈동자 굴리는 소리까지 들리는 듯했다.

한서진은 상대를 확인했다.

반백의 머리카락을 빗어 내린, 준수한 인상의 풍채 좋은 50대 남자였다. 어쩌면 동안이고, 실제 나이는 더 들었을지도 모른다.

모르는 얼굴이었다.

“실례지만, 누구신지?”

그 순간 상대의 눈꼬리가 희미하게 일그러졌다가 다시 본래대로 돌아왔다.

누구냐고 물어본 그 말이 기분 나빴단 것일까.

“한 박사님, 기억 못하시는군요. 저희가 지금이 초면은 아닐 겁니다만.”

“제가 사람을 잘 기억 못해서요.”

“도원패라고 합니다.”

도원패?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어디서 봤더라?

그 순간 머릿속에 번쩍 하고 불이 들어왔다.

‘블랙리스트!’

그제야 기억이 난 한서진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이서나의 생일 파티에서 잠깐 이야기를 나눴던, 여당의 차기 대권 주자라는 국회의원 아닌가.

‘그래서 기분 나빠했군.’

한서진은 보이지 않게 실소했다.

면식이 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전혀 모르는 것처럼 굴었으니, 그의 입장에서 기분이 나쁠 법도 했다. 하물며 중진 의원에 여당의 대주주 아닌가.

“도원패 의원님이셨군요. 실례했습니다. 제가 원체 사람을 잘 기억 못합니다.”

한서진은 태연히 말을 이었다.

“이런 곳에서 정치 하시는 분을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임시 고문 자격으로 초청을 받았습니다. 정치인이라고 경제인 모임에 못 오라는 법은 없지요.”

한서진은 작게 피식거렸다. 순수히 재벌 총수만의 사교 모임이라고 들었는데, 별로 그런 것 같지도 않은 모양이다.

“실례지만 아까 어떤 말씀을 하셨죠?”

“현재 한 박사님은 국내에는 거의 투자를 않으시고 미국, 러시아 등 해외에만 투자를 하고 계십니다. 그것 때문에 국내 정재계에서 말이 많습니다. 여론의 불만도 상당하고요.”

“그런가요.”

“그런데 박사님 주변에는 직언을 해줄 만한 사람들이 별로 없는가 봅니다. 처음 듣는다는 표정이십니다.”

“처음 듣습니다.”

“연구 외적인 이야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으신다 들었습니다. 그래서 일체의 경영도 맡지 않으시고, 전문 경영인에게 위임하신다고요.”

“…….”

“연구에만 전념하시는 태도가 바람직하고 존경받을 모습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가끔은 발 아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직접 살피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까부터 주변의 소음은 완전히 멈춰 있었다. 홀에 있는 모든 시선이 이쪽으로 쏠려 있는 게 느껴진다.

쏟아지는 시선의 중심 속에서도 도원패는 느긋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서진은 눈을 살짝 가늘게 뜨고 그를 주시했다.

굳이 통찰안을 발동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저 눈빛만으로, 그가 자신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알 것 같았으니까.

우습게도, 지금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들고 있었다.

여당의 유력 대권주자가 비수를 숨긴 눈빛으로 자신을 주시하고, 대한민국 경제를 쥐락펴락 하는 재벌들이 입을 꾹 다문 채 긴장해서 지켜보는 상황인데.

“네, 제가 연구에만 전념하는 터라 그 외 다른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저에 대한 평은 어떤지 잘 모릅니다. 저는 TV나 인터넷 같은 것도 안 봅니다. SNS는 말할 것도 없고요.”

“물론 많은 국민들이 박사님을 존경하고, 좋아합니다. 하지만 소소한 불만도 없지는 않다는 거지요.”

“국내 투자가 거의 없다고 말씀하신 게 그런 의미에서였나요?”

“그렇습니다. 그래도 대한민국이 낳은 자랑스러운 한국인이신데, 너무 해외 투자에만 집중하시면 아무래도 국민 정서상 서운할 만한 일이지 않을까요.”

“영원그룹의 규모도 상당할 텐데요.”

“제약은 박사님의 주력이 아니지 않습니까. 게다가 주력 생산지가 될 제2차 공단은 정작 캘리포니아에 건설 중이고요. 물론 제 입으로 말씀드렸다시피, 영원그룹은 그리 중요하지 않지요.”

“…….”

“국민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한국에서도 에테르 산업이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도원패는 확고한 음성으로 말을 떼었다.

“그래야 장기적으로는 조국의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고, 단기적으로는 침체기에 접어든 한국 경제가 발전할 수 있을 테니까요. 또 북한 붕괴로 인한 피해도 수습을…….”

“제가 북한 재건을 위해 구입한 특별 채권만 1조 달러는 족히 넘을 텐데요. 그건 국내 투자가 아닙니까?”

이 정도 일침이면 낯빛이 변할 줄 알았다. 그러나 도원패는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외화를 들여오는 게 전부가 아니지요. 박사님의 재능을 한국의 토양에 심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투자라고 생각합니다.”

“…….”

“정치인이 아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간청드립니다. 너무 해외에만 눈을 돌리지 마시고, 국내의 사정에도 귀기울여 주십시오. 그리고 한국에도 에테르 산업을 일궈 주십시오. 그럼 많은 국민들이 좋아할 겁니다.”

한서진은 다른 재벌 총수들의 표정을 슬쩍 살폈다.

그들의 표정은 반반이었다. 괜히 분위기를 망친다고 썩어 들어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 해야 할 말을 했다며 속시원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이도 있었다.

에테르 산업을 한국에 일구는 것.

이 자리에 있는 이들로서는 손해볼 게 없는, 아니 두 팔을 벌려 환영할 일일 것이다. 그러니 살벌해지는 분위기에 초조해하면서도, 굳이 도원패를 말리지 않은 것이리라.

어떻게 보면 도원패는 저들의 심층에 있는 소망을 대변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이거 재미있네.’

한서진은 이런 상황에 어이가 없기보다는, 오히려 즐거워지는 자신이 우스웠다.

“저는 어떤 일을 하거나 하지 않을 때,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는 고려하지 않습니다.”

“한 박사님.”

“제가 범죄나 보편적인 도덕성에 반하는 행위를 하는 것도 아닌데, 왜 타인의 평가와 시선에 얽매여야 하죠?”

차분한 목소리가 고요한 홀에 울렸다.

총회 참가자들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지기 시작했다. 낌새가 좋지 않은 것을 느낀 백철중이 슬그머니 나섰다.

“이보게, 한 박사. 그러지 말고…….”

“잠시만요, 장인어른. 대답은 마저 해야겠습니다.”

“아? 그러게나, 사위.”

장인어른이란 말에 백철중은 헤벌쭉 웃으며 물러났다.

그를 보는 몇 몇 친구들의 눈이 살벌해졌다. 지금 터지기 직전인 거 안 보여? 저걸 안 말리면 어쩌려고!

“왜 국내에는 에테르 산업 투자를 안 했냐고요?”

한서진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주변을 한번 둘러보라는 듯한 제스쳐 후, 그는 도원패를 똑바로 직시한 채 말을 이었다.

“듣고 싶습니까? 여기 이 분들이 전부 보고 있는데요? 괜찮겠습니까?”

“한 박사님.”

“국내 환경은 에테르 산업을 경작할 만한 토양이 아닙니다. 무슨 뜻인지는 의원님이 더 잘 아실 겁니다. 모르시겠다면 저랑 더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는 거고요.”

몇 년 전, 처음으로 통찰안의 힘으로 반도체 설계를 했을 때, 백세완에게 300억 원을 받고 넘겨야 했다.

그때 어렴풋이 느꼈던 위화감은, 정지원이 SJ인더스트리를 미국에 설립하고 난 후에야 하나둘씩 깨달았다.

만약 처음부터 한국에 자리를 잡았으면 자신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대기업에 빼앗기고, 정부에 착취당하며, 그저 그런 월급에 만족하는 삶을 살았겠지.

미국에 사업 기반을 두었기에 지금의 부와 위명을 쌓을 수 있었다. 정지원은 그걸 잘 알고 있었기에, 조금 무리해서라도 미국에서 시작했던 것이고.

“한 박사님, 말씀이 너무 심하시군요. 우리나라는 세계 경제 순위 11위의 국가입니다. 그런데도 에테르 산업을 키울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까?”

“예, 그럴 환경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미국에서 시작한 것이고요.”

“한 박사님!”

“에테르 산업을 수용할 능력을 갖춘 국가라면 이렇게 여당 의원이 찾아와서 따지듯이 묻지 않았을 겁니다. 대신 산업을 육성할 만한 정책 구상에 몰두했겠지요.”

사정없는 일침에 도원패는 말문이 막혔다.

한서진은 차분히 주변을 둘러 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총수들이 흠칫 놀라며 시선을 피했다.

“만약 제가 에테르 산업을 한국에서 시작했다면 이 중 운 좋고 행동 빠른 분이 지금쯤 자기 그룹 계열사로 만들지 않았을까요?”

총구가 그들을 향해 방향을 돌렸다.

충분히 무례해 보일 수 있는 언사. 그러나 총수들은 못 박힌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그래도 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거짓으로라도 그 말을 부정할 수 있는 이는, 이 중에 한 명도 없었다.

엄밀히 말해서 그들은 도원패 편이었다. 그가 자신들을 대신하여 한서진을 설득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무의식에 깔려 있었다. 그게 재벌 일가의 방식이었다.

“에테르 산업이란 종자를 파종하고, 경작하고, 일구고, 가꿀 능력 등등…… 하나도 제대로 된 게 없습니다. 토양부터 햇빛, 대기, 바람과 기온, 물과 거름의 품질까지 말입니다.”

말없이 노려보듯 직시하던 도원패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환경을 바꾸면 되지 않습니까.”

“누가요?”

“박사님이 도와주시면,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서 이 나라를 부강하게…….”

한서진은 피식거리며 등을 돌렸다. 더 이상 이야기하기 싫다는 명백한 제스쳐, 재벌 총수라 해도 여당 중진 의원 앞에서 대놓고 이렇게 무시하진 못할 것이다.

이를 악문 듯한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렸다.

“박사님은 이 나라 국민이 아닙니까! 어떻게 그리 무관심하실 수 있습니까!”

“보채봤자 보따리는 없습니다.”

한서진은 그렇게 냉정하게 돌아섰다.

총회 분위기는 엉망이 되었다. 총수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하나둘씩 흩어졌다.

한서진은 송하나와 함께 제일 먼저 홀을 빠져 나왔다. 출구를 나서나자마 그는 피식거리며 그녀를 돌아봤다.

“왜 블랙리스트에 올랐는지 알 것 같은데. 저 사람.”

“겉보기와 달리 실제 성정은 대단히 권위적인 분이라고 알고 있어요. 어쩌면 오빠를 자기보다 아래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맞아.”

“오빠도 그렇게 느꼈죠?”

“아니, 그렇게 보이더라.”

굳이 통찰안을 쓰지 않아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세계적인 위명을 떨치고 있는 미국의 주요 인물임에도 도원패는 낮잡아 보고 있었다. 자신이 이 나라 사람이고, 그는 여의도를 주름잡는 권력자라는 것 때문에.

‘권력에 취하면 저리 되나?’

그렇게 생각하며 피식거리는데, 송하나가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별로 화나진 않으셨나 봐요.”

“화가 나기는. 오히려 재밌었어.”

“그 상황이 재밌으셨다구요?”

“그럼 이상한가? 난 되게 재밌고 웃겼는데.”

어처구니 없는 것과는 다르다. 한서진은 진심으로 그 상황이 재미있었다. 분노의 감정은 조금도 생기지 않았다.

이런 심리 상태가 스스로도 웃겼지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그때 다소 늦게 나온 백철중이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저기, 한 박사.”

“네, 회장님. 분위기를 망쳐서 죄송했습니다.”

“아니, 아니야. 도 의원 그 양반이 자네를 낮잡아 보고 작정하고 달려든 건데. 다른 친구들도 도 의원이 자기들 입장 대변해주니까 묵인했던 거고. 내가 미안해서 면목이 없네. 도 의원이 참석하는 건 들었는데 설마 이렇게까지 작정하고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어.”

“누구라도 그랬을 겁니다. 전 괜찮습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자네 우리 H그룹에는 이제 정말 유감 없는 거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백철중은 더욱 난처해했다.

“아니, 사실 따지고 보면 자네의 결실을 먼저 후려쳐서 뺏은 게 우리 그룹 아닌가. 물론 세완이 놈이 주도했다지만 결국에는 그룹의 책임이지. 아까 자네가 그 말 할 때 목소리에 한이 맺힌 듯해서, 내가 너무 걸려서…….”

“절대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정말이지? 나중에 그 일 가지고 우리 하나 구박하거나 소박 맞히면 안 되네. 그럴 거면 지금 미리 말하게. 내가 무릎 꿇고 백날이고 사과할 테니.”

“제가 과거라면 과거인 겁니다. 절대 신경 쓰지 마세요.”

재계 최고 그룹의 총수가 아이처럼 쩔쩔매는 게 우습다.

옛날, 태산처럼 높게만 느껴졌던 백철중 회장의 모습은 이제 어디서 찾아봐야 하나.

========== 작품 후기 ==========

본의 아니게 예비 장인의 멘탈을 사정없이 후벼 파고 말았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