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54 그의 외도 =========================================================================
“우리가 러시아를 너무 우습게 본 건 사실입니다.”
원탁에는 제법 심각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탁자를 둘러싸듯이 앉은 십여 명의 남녀는 신 내각의 일원으로 내정된 자들이었다.
신임 대통령인 크리스와 오랜 친분을 나눈 기업가 출신으로서, 향후 짧게는 4년에서 길게는 8년 동안 미국이라는 거대한 배를 통제하게 될 승무원들이었다.
“확실히 러시아의 대응이 재빠르긴 했습니다. 우리가 사태를 파악하고 뭔가 조치를 취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았으니까요.”
겨우 2주도 안 되는 사이에 러시아의 우주 과학자들이 한국으로 대거 들어오고, 급한 연구 기자재부터 화물기를 타고 날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미국은 신 정권 출범 때문에 여러 모로 정신이 없이 바빴고, 잠깐 한 눈을 파는 사이에 러시아는 ‘불륜’을 위한 완벽한 데이트 무대를 구축한 것이다.
“한서진 박사도 꽤 난처해 하는 모양이던데요.”
“정말 러시아와 손잡을 생각이 없었는지는, 당사자만 알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잠시 다퉜다고 혼인 서약을 종이쪼가리로 만들어버릴 순 없는 법이지요. 한 박사와 우리 미국의 사이는 그 어떤 국가와 개인의 관계보다 굳건합니다.”
“그럼 클레튼 전 대통령은 어떤가요?”
“…….”
클레튼의 이름이 언급되자 잠시 침묵이 찾아들었다.
한서진이 그와 각별한 사이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가 재임에 실패한 것과, 자신들이 내각으로 입성한 것은 동일한 원인에서 빚어진 결과였다.
“그는 재임에 실패했고, 이제 민간인입니다. 더 이상 연방은행을 건드릴 힘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한 박사가 그의 뜻에 깊이 공감하기라도 한다면, 앞으로도 제2, 제3의 클레튼이 등장할 겁니다. 당장 우리는 4년 뒤에 있을 존 캐롤 상원의원의 출마를 대비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존 캐롤 의원 역시 연방은행을 노릴 날카로운 이빨이지요.”
“그리고 한 박사와 친하기도 하고요.”
“…….”
“저는 무엇보다, 만약 한 박사가 연준위의 지분에까지 욕심을 갖게 되는 결과가 야기되는 게 두렵군요. 사람의 욕심은 본래 끝을 모르는 것 아닙니까.”
클레튼은 화폐발행권을 국가로 가져오려 했고, 그로 인한 ‘자본의 역습’을 받아 재임에 실패했다. 이들은 클레튼의 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백악관에 입성한 점령군의 첨병이었다.
정권 출범 초기, 한서진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신임 내각에 있어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그런데 이 중요한 시기에 러시아의 적극적인 구애까지 터지며, 흐름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차기 국무부 장관으로 내정된, 톰포드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미국의 화폐질서를 수호하기 위해서 백악관에 입성했습니다. 그리고 한 박사는 화폐질서를 흔들 만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고, 클레튼 쪽과 매우 친합니다.”
이미 다 아는 사실을 새삼 짚어준 것은, 단지 시간을 허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리라. 입각 예정자들은 주의깊게 톰포드의 말을 경청했다.
“어차피 한 박사는 미합중국과 한 몸, 굳이 백악관과 관계를 개선하는데 우리가 노력을 쏟아부을 필요는 없습니다.”
현 정권은 어디까지나 클레튼을 견제하기 위해 급조된 임시 카드라는 점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고서야, 나올 수 없는 발언이었다.
“우리는 그저 우리 일을 하면 됩니다. 우리들을 백악관에 들여보낸 친구들을 위한 일을 하면 되는 거지요.”
“그럼 러시아는 어떡할까요?”
“우주 개발이 단기간에 성과를 낼 수 있는 영역도 아니고, 한 박사가 아무리 천재라도 아직 잘 모르는 분야입니다. 게다가 한 박사도 크리스 대통령에게 잠시 서운해서 저러는 것이니, 선을 넘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게 안일하게 여기다가 예상치 못한 큰 결과가 터질 수도 있습니다.”
“면밀히 관찰하고 있다가 중간에 개입하면 됩니다. 어차피 한 박사도 러시아 땅을 밟지는 않을 겁니다. 그는 이미 중국에서 큰 곤혹을 치렀고, 러시아가 독재국가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흐음.”
고심하던 이들은 톰포드의 주장에 하나둘씩 동의했다.
그들은 한서진이 미국을 저버리고 러시아와 손을 잡는다는 미래를 상상하기 어려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국과 러시아는 국력, 그리고 정치적 투명함에서 격차가 컸다.
한서진이 러시아와 갑자기 친하게 지내기 시작한 것은 쇼일 뿐이다. 크리스에게 무언가 서운한 게 있다는.
그리고 자신들은 크리스를 보조할 내각 구성원이지만, 그와 한서진의 사이를 중재할 의무는 없다.
톰포드가 쐐기를 박았다.
“제가 따로 크렘 회장을 만나서 넌지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그는 SJ인더스트리 주주이기도 하니, 한 박사가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힘을 써줄 겁니다.”
러시아의 움직임은 전광석화 같았다.
러시아 연구팀은 한국대 교수진과 재빨리 연구팀을 편성한 후, 곧바로 개발 과제 연구에 들어갔다. 연합을 맺은 한국대 교수진은 러시아가 제시한 몇 가지 연구 난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걸 정말 우리가 다 봐도 되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공동 연구를 위해서는 당연히 속속들이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러시아는 우주의 미래를 위해 몰두 중이던 주요 연구 테마 중 몇 가지를 프로젝트에 투입했고, 그에 관한 모든 데이터를 한국대 교수진과 공유했다.
한국대는 러시아가 지닌 깊은 저력을 낱낱이 확인하고 전율했으며, 새삼 여기에 건 그들의 의지가 대단하다는 것을 느끼고 몸을 떨었다.
‘한서진 박사 한 명 때문에, 저 러시아가 이렇게까지…….’
러시아가 한국대에 애착에 있어서 이런 중요한 연구 자료를 마음껏 공유하게 해주겠는가? 아니다. 한서진과 어떻게든 밀착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나름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양국의 연구 교류를 지지하기 위해 베데프 총리가 전용기를 타고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는 한국 정부의 국빈 환영 행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대충 넘기고는, 곧바로 한러 공동 연구팀을 찾았다.
“오늘의 이 날이 앞으로 한국과 러시아의 깊은 교류를 되새길 수 있는 역사적인 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비공개로 진행한 조촐한 축사였으나, 수백 명이 넘는 기자들이 앞을 다투어 모여들었다. 특히 미국 측 기자들은 단 하나의 기사거리도 놓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이었다.
이날 행사에는 한서진도 참가했다.
“한국은 우주 개발 인프라가 많이 부족하지만, 러시아와의 공동 연구를 통해 유의미한 성과를 낼 수 있으면 합니다. 꼭 단기적인 성과에 집착하지 않고 거시적인 기초 체력을 키울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습니다.”
무난한 답사였지만, 미국 기자들은 단어 하나하나까지 파훼하며 그 안에 담긴 깊은 의미를 찾으려 애썼다.
미국에서는 한서진의 답사를 놓고, 러시아에 어떤 의지를 보여주는지를 분석한답시고 전문가와 일반인까지 가세해서 난리도 아니었다.
‘그런 거 하나도 없는데.’
물론 말을 해봐야 누구 하나 믿어주지도 않을 테지만.
한서진은 베데프 총리와 함께 연구팀을 돌아보며, 앞으로의 연구 계획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공동연구팀은 수십 개의 하위 부서로 구성돼 있었다. 예를 들면 인공위성 연구팀, 추진 로켓 연구팀, 우주정거장 전문팀, 우주 생존 기술 개발 연구팀 등등이다.
각 부서장은 러시아 과학자들이 맡고 있었는데, 그들은 어떻게든 한서진의 간택을 받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한서진은 여러 부서를 돌아보며, 러시아 우주 과학의 기밀을 마음껏 관찰했다.
이미 강화된 통찰안에 힘입어 현대 의학의 지식을 단시간 내에 흡수했던 몸이다. 러시아가 몇 십 년 간 쌓아올린 우주 과학의 정수 또한 통찰안에 의해 낱낱이 분해돼서, 그의 뇌리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X-35P 엔진이 추진 과정에서 얻는 문제는 아무래도 잘못된 연료 혼합으로 인한 반응 문제 같습니다. 3번 부속 탱크의 주입 속도를 3.2 포인트 정도 더 늦추면 어떨까 합니다만.”
“일단 지난 실패 데이터만 보자면, 제 생각에는 L-56호가 대기권 이탈에서 동체 뒤틀림이 발생하는 원인은…….”
한서진은 러시아가 축적한 프로젝트의 성공 및 실패 사례를 몇 개 슬쩍 훑어보고는, 그 연구에 담긴 본질을 단숨에 꿰뚫어내서 짚어냈다.
과학자들은 그의 설명을 듣고 입이 벌어질 듯이 놀랐다. 그가 그 자리에서 너무 정확하게 연구의 핵심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나 지금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
한편 한서진은 속으로 자책했다.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통찰안이 보여주는 대로 몇 마디 했을 뿐인데, 자신을 쳐다보는 과학자들의 눈빛이 더욱 뜨거워진다.
뻔히 보이는 걸 모르는 척 하기도 뭐해서, 답답해서 몇 마디 했을 뿐인데 이러다가 코가 꿰이게 생겼다.
애초부터 러시아와 너무 친하게 지낼 마음은 없었다. 그저 크리스가 자신을 싫어하는 것에 발끈해서, 가볍게 신 정부를 도발한 것일 뿐인데.
‘이러다가 설마 러시아에서도 명예시민이나 명예국적 비슷한 걸 받지는 않겠지?’
약간 의아한 것은, 미 정부 쪽에서 아직 이렇다할 반응은 없다는 것이었다.
한서진은 오늘 행사에 앞서, 정지원, 클레튼 대통령, 캐롤 의원, 크렘 회장 등 자신이 알고 있는 미국 내 굵직한 인맥에 전화를 돌렸다.
의외로 클레튼과 캐롤 의원의 반응이 덤덤했다. 러시아에 관한 언급은 아끼면서, 미국이 자신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잊지 말아달라 당부했을 뿐이었다.
한서진 역시 자신의 모든 기반은 미국에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들의 근심을 덜어주었다.
―크리스가 비록 정적이기는 하나 미국 대통령입니다. 닥터의 귀중함을 잊지는 않을 겁니다.
크리스 대통령을 향한 캐롤 의원의 간접적인 편들기는, 한서진에게도 의외의 인상을 남겼다. 정적임에도 객관적인 면에서 편을 들어줄 수 있다는 것, 그를 통해 미국 선진 정치의 일면을 엿볼 수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러시아와 프로젝트 큰 건 하나 해? 어차피 한두 개 가지고 미국이 날 암살할 것도 아니고.’
지금까지 미국에 해준 게 얼마인데, 두어 개 정도 함께 작업을 한 걸 가지고 다른 생각은 못할 것이다.
‘어차피 내가 미국과 떨어지지 못하는 건 하늘이 알고 내가 알고 미국이 다 아는 사실인데.’
물론 서운해할 수는 있으리라. 하지만 약간의 서운함은 오히려 자신의 소중함을 더욱 깊이 깨닫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서진은 자꾸만 그런 유혹이 들었다.
진짜 제대로 한 번 튕겨 봐?
‘근데 튕기려고 해도 튕길 만한 게 있어야지. 이건 뭐 죄다 비전이 떨어지는 것들 뿐이라서……. 러시아 우주 과학 수준이 대단하긴 한데 별로 돈 될 만한 연구는 눈에 안 보이네.’
이러니 미국에 밀려서 만년 2인자 신세로 접어든 것인가?
오만 생각을 정리하며 임시 연구시설을 둘러보던 한서진은 문득 어느 곳에서 발이 멈췄다.
“이 팀은…….”
“이 분은 히레프스키 박사님이십니다. 우주 쓰레기 처리에 관한 기술을 연구하시는 분이시죠.”
“여기 No.352 프로젝트, 자세히 볼 수 있을까요?”
미소 띤 얼굴로 맞이했던 히레프스크 박사의 얼굴이 자연히 굳어졌다.
“한 박사님, 그 프로젝트는 아이디어 수준에 지나지 않은 실패작입니다. 청소 위성으로 우주 쓰레기를 수거해서 운석처럼 지상으로 떨어뜨린다는 계획으로, 낙하 과정에서 자칫 더 많은 우주 쓰레기로 산산조각 날 가능성이 높아 폐기된 것입니다만…….”
“그래도 한 번 보고 싶습니다.”
한서진은 주저하지 않고 강하게 요청했다.
========== 작품 후기 ==========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그런 방식으로 응용하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의 추측을 마음껏 말씀해주셔도 괜찮아요.
결코 베끼, 아니 참고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니까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