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353화 (353/609)

00353  그의 외도  =========================================================================

코바초프 대사가 돌아가고 얼마 후, 한국은 러시아와 MOU를 체결했다. 우주 개발에 관한 협약이 담긴 내용이었다.

한국쪽 협약의 주체는 정부가 아니라 한국대학교였기에 국내 매스컴에 크게 보도되지는 않았다. 인터넷에 짤막한 기사 몇 줄이 뜬 게 전부였다.

오히려 미국 매스컴이 자기들 일처럼 호들갑을 떨며 관련 사실을 크게 보도했다.

―러시아 정부, 한국대학교와 우주 개발 사업의 공동 추진을 위한 MOU 체결!

―사실상 한서진 박사와 MOU를 체결한 것이다?

―백악관은 대체 뭐하고 있었나.

한국대학교의 MOU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한국과 달리, 미국 언론은 이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체급의 차이가 벌어졌다 하나, 러시아는 여전히 미국에 견줄 수 있는 유일한 단일 국가다.

그런 러시아가 우주 개발 사업을 한국대학교와 함께 하기로 했다는 것은, 여간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한국에 상주하고 있는, 한서진 특별 취재팀이 부랴부랴 그를 찾아가서 인터뷰를 신청했다.

그러나 한서진이 그들을 만나주지 않았기에, 그들은 비서진의 대변만 듣고 물러나야 했다.

“박사님께서 특별히 우주 개발에 관심을 두고 있는 분야는 아직 없는 것으로 압니다. 박사님은 현재 다음 세대 반도체 개발과 H시리즈의 개선에 몰두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미국 기자들은 그 말을 순순히 믿지 않았다.

“한서진 박사님이 아니라면, 러시아가 뭐 하러 한국대학교와 우주 개발 사업을 추진합니까?”

“한국대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러시아가 우주 개발 사업을 함께 하자고 먼저 손을 내밀 만한 대학은 아닙니다. 애초에 한서진 박사를 염두에 둔 게 아니라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MOU 체결입니다.”

“저희는 그 이상은 알지 못합니다.”

“한 박사를 만나게 해주십시오! 단 5분이면 됩니다! 그 분과 인터뷰를 하고 싶습니다!”

MOU 체결 때문에 미국이 난리가 난 사이, 러시아의 두뇌들이 속속들이 한국으로 들어왔다.

러시아 우주 과학의 권위자들이 수십 명씩 팀을 이뤄 한국에 들어왔고, 그제야 국내 여론은 깜짝 놀라서 뒤늦게 취재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러시아가 한국대와 우주 개발을 한다고? 아니, 왜?”

“그냥저냥 이름만 올리는 셈 치고 MOU 맺은 줄 알았는데, 러시아가 제대로 밀어붙이려나 봐. 러시아 과학자들 입국 명단 보면 장난 아니야.”

명분을 위해 벌인 공동 추진 사업이 아니었다. 러시아의 우주 과학을 선도하는 이들이 앞을 다투어 한국에 몰려들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적어도 러시아는 ‘제대로’ 공동 사업을 추진할 의욕이 있는 게 확실했다. 그렇다면 한국대는?

“근데 한국대가 러시아와 이런 사업을 같이 할 급은 아니잖아.”

“MOU 대상 기업이 카스프덴? 이거 완전히 러시아 정부를 대리해서 나서는 건데? 러시아 정부가 직접 발 담그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네.”

러시아쪽 협약 주체를 보면 러시아 정부의 사업 의지가 굳건하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미심쩍었던 퍼즐 조각 하나는 당연한 결론으로 귀결된다.

“역시 한서진 박사랑 하는 거지?”

“당연하지. 안 그러면 러시아 정부가 이렇게까지 의욕적으로 밀어붙이겠냐.”

“저 과학자들이 동시에 한국에 입국했다는 건 최소한 포티 대통령의 승인이 있었다는 소리다. 안 그러면 저렇게 한꺼번에 자국 밖으로 내보내지도 않아. 러시아의 미래들인데.”

“카스프덴이 러시아를 대리하는 것처럼, 한국대가 한서진을 대리하는 거네.”

그런 우회적인 절차에서, 사람들은 몇 가지 사실을 어렵지 않게 추론해낼 수 있었다.

“한 박사도 미국 눈치가 보이긴 하나 보네. 번거롭게 돌아서 일 처리하는 거 보면.”

이용무가 꺼낸 말에 이서나는 피식거렸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그를 주시하며 조소를 머금었다.

“미국 눈치가 보여서라기보다는, 미국에 눈치를 주기 위해서라고 봐야할 걸?”

“무슨 말이야?”

“나 미국에 서운한 게 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툴툴대는 거다, 그러니 두 눈 뜨고 잘 봐라, 한 박사의 이런 마음이 느껴지지 않니?”

그 말에 이용무도 퍼뜩 생각난 게 있었다. 그는 안색이 살짝 굳은 채 물었다.

“한 박사가 크리스 대통령을 탐탁치 않게 여긴다는 소문이 사실일까?”

“그렇지 않을까? 공화당 출신에, 중국계 대통령인데. 사실 중국이 분열된 건 한서진 박사가 기폭제였잖아. 그 일 때문에 크리스가 자신을 꺼려할 거라고, 한 박사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설마 미국에서 러시아로 갈아타진 않겠지?”

“그럴 이유도, 이익도 없지. 단지 미국 신정부에 적당한 제스처와 압력을 주기에는 좋겠지.”

“적절한 압력이라…….”

이용무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갓 집권한 미국 신임 대통령, 그에게 적절한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개인이 과연 세상에 몇이나 될까? 그것도 이렇게 공개적으로 말이다.

이용무는 다시 물었다.

“그럼 우리가 오늘 모인 이유는 어떻게 하지?”

두 남매가 모인 이유, 그것은 한국대에서 온 요청에 대한 그룹의 방침을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한국대는 러시아와 우주 개발 사업을 같이 하기 위해 여러 기업과 연구소에 협력을 요청했다. 진성그룹도 바로 그 대상 중 하나였다.

이서나는 어렵지 않게 대답했다.

“당연히 수락해야지. 오히려 그룹의 전력을 기울여서 협력해야 한다고 봐.”

“하지만 아직 제스처일 뿐이잖아. 그것도 미국에 눈치를 주기 위한 쇼.”

“시작은 제스처일지라도, 끝은 아닐 수도 있는 거잖아. 러시아가 과연 마지막까지 적당한 친분 쌓기로 만족하고 물러날 것 같아?”

“그러다가 미국이 정말 딴 마음이라도 먹으면…….”

“미국은 한 박사에게 절대 위해를 가하지 못해.”

크리스 대통령과 한서진의 불화, 미국 사회는 그것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까?

미국의 영웅인 한서진을 반역자로 몰아세울 것인가, 아니면 이 일을 야기한 크리스에게 욕을 퍼부을 것인가?

이미 미국의 선택은 큰 제한을 짊어지고 있었다. 반면 한서진은 미래를 두고 저울질할 수 있는 방향이 무궁무진하다.

최악의 경우 러시아로 떠나버릴 수도 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명예시민으로 남아 있는 게 자신에게 가장 큰 이익이므로.

미국 역시 그걸 인지하는 이상, 그를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이 사실상 적다. 게다가 그는 미국에 무수한 편을 두고 있다.

“난 한 박사가 우주 사업에서 또 한 번 대박을 터트릴 거라고 보는데. 거기에 올해 내 배당금을 걸겠어.”

“……앉은 채로 지는 내기는 사양할게. 나도 러시아에 걸겠어.”

그렇게 진성그룹의 방향이 결정되었다.

H그룹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무조건 한국대에 올인이다! 그룹의 남은 여력을 기울여서 이 사업에 퍼부어! 부족하면 이미 벌여놓은 사업을 중지해서라도 자금과 인력을 확보해!”

“회장님, 하지만 공동 사업이 자칫 불발로 끝나기라도 하면 리스크가 제법 있습니다. 한 박사의 정확한 의중을 알지 못하면…….”

“의중이라니! 우리 예비 사위가 정말 그렇게 변죽만 올리다가 끝낼 성 싶으면 애초에 이런 스케일로 일을 벌였겠는가? 다 생각을 갖고 작정했으니까 일이 이렇게 된 거야!”

“그래도 한 번쯤 직접 확인해보시는 것도…….”

“어허, 안 그래도 바쁜 사람인데 이런 사소한 거 가지고 일일이 물어보고 확인하면 얼마나 귀찮겠나?”

“…….”

“됐으니까 밀어붙여! 우리 그룹 다음 사업은 우주 개발이다!”

백철중은 그저 감개가 무량했다.

지금까지 H그룹은 우주 영역에 있어, 통신 위성의 주변 부품이나 개발하는 등 사소한 영역에서만 발을 살짝 걸쳤다.

헌데 러시아와 공동 우주 개발 사업이라는 거창한 프로젝트에 주도적으로 발을 담글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 이런 큰 기회가 언제 또다시 찾아올까.

더군다나 그는 한서진을 향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우리 예비 사위가 손 댄 이상, 이거 무조건 대박 난다! 돈이란 돈은 다 쓸어담을 대사업이다! 무조건 올인이야!”

러시아의 행동은 영악하다 싶을 만큼 민첩했으며, 철저했고, 또한 재빨랐다. 숨 한 번 제대로 쉴 틈을 주지 않은 채 사방에서 동시에 밀어붙였다.

그 놀라운 추진력에는 한국대측도 혀를 내둘렀다. 거의 수동적으로 질질 끌려가다시피 했다.

물론 가만히 앉은 자리에서 상대가 모든 걸 재빨리 다 처리해주니, 질질 끌려다니는 것도 이 정도면 달콤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러시아의 두뇌라 할 수 있는 최고 과학자들과 연구팀을 일제히 한국에 밀어넣고, 곧바로 우주 개발 프로젝트를 위한 연구 추진 시설을 차렸다.

MOU를 체결하고 열흘도 채 지나지 않아, 러시아는 완전하지는 않지만 당장 개발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했다.

“…….”

“한 박사, 러시아가 자기들은 준비가 다 끝났다면서, 당장 오늘이라도 연구 개발을 시작하자는데…….”

한국대 총장은 조심스럽게 한서진의 눈치를 살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침묵하던 한서진이 마침내 덤덤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거 뭔가 당한 느낌인데요.”

“하하……. 그래도 빨리 일을 처리하는 건 가상하지 않나요? 지금 이 순간에도 연구 기자재가 직속 화물기를 타고 한국으로 들어오고 있다고 하네요. 그리고…….”

“그리고 또 뭐가 있습니까?”

“러시아에서 강릉과 속초, 어느 쪽에 우주 발사 시설을 지으면 좋을지 문의해왔어요. 물론 나로 센터가 있지만 그곳은 서울과 너무 멀다고, 발사 시설을 좀 북쪽에 지어도 어차피 별 상관은 없다고 했어요. 그보다는 서울과 교통이 편리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

“지역만 골라주면 발사 시설을 짓는 비용이나 건설 절차는 자기들이 모두 알아서 하겠다네요.”

그저 혀가 내둘러질 따름이다.

이 정도면 번갯불에 콩을 볶는 수준이 아니라, 사골을 고아내는 경지가 아닌가?

‘크리스 정권을 살짝 푸시하려고 했을 뿐인데, 일이 이 지경이 되다니…….’

우주 개발을 같이 해봤자 단시간 내에 얼마나 큰 성과를 이뤄낼 수 있겠는가.

러시아와 한국대가 공동 개발을 ‘시작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는 데만 해도 1, 2년은 걸릴 것이고, 제대로 된 성과를 생각할 수준에 이르기까지는 그 이후에도 적어도 5년 이상은 시간을 쏟아부어야 할 것이다.

그 시간이면 우주 개발 사업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더라도 미국 또한 지분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미국과 러시아, 그리고 자신의 삼자 공동 개발로 해피 엔딩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 러시아와 손을 잡은 진짜 목적, 크리스 정권 압박 역시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되고.

그런데 크리스 정권이 사태를 파악하고 대처 방안을 세우기도 전에, 러시아는 모든 밑작업을 끝내 버렸다.

“그리고 베데프 총리가 모레 입국한다고 하네요. 우주 개발 공동 사업을 추진하게 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서라고…….”

“……어쩔 수 없네요.”

한서진은 체념처럼 말을 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매달려 봐야겠습니다. 그 전에 잠시 전화를 좀…….”

“어디에 전화하게요?”

“미국에 몇 군데 전화 좀 돌리려고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양해 좀 바란다고 말이라도 해놔야겠습니다.”

‘다른 여자’와 커피 한 잔 마시려던 게 한나절 데이트가 돼버린 셈이니, 정중한 양해는 구해야했다.

그래도 나쁜 남자가 되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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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는 정말 나쁜 여자야!”

며칠 별거하겠다는 전화를 받고 카우보이는 그렇게 목을 놓아 통곡했대요.

그래도 끝내 반지는 안 뺐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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