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52 그의 외도 =========================================================================
“러시아 대사를 만날 생각입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경계심이 절로 곤두서는 말이었다.
러시아는 중국이 붕괴한 지금, 유일하게 미국에 견줄 만한 국가다. 물론 기초 체력에서는 범접할 수 있는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미국 앞에서 제법 큰소리를 내거나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곳이다.
게다가 양국의 사이가 썩 우호적인 편도 아니다. 어찌 보면 영원히 친해질 수 없는 라이벌.
그런 국가의 대사를 만나겠다니. 그 자리에 자신에게 증인이 되어달라니.
이걸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증인이라시면, 어떤 의미입니까?”
“러시아 대사와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미국이 불필요한 오해를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때를 대비한 증인이 되어달라는 겁니다.”
“박사님,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굳이 그런 상황을 만들어야 할 필연성이 있습니까?”
페이 차일드는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한서진은 그의 입장을 이해했다. 자신이 그의 처지였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박사님, 혹시 우리 미국에 섭섭하신 게 있습니까?”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혹시 크리스 터너 당선인한테 섭섭함을 느끼신 게 있나요?”
“글쎄요.”
부정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순순한 긍정도 아니다.
페이 차일드는 얼마 전 한서진이 크리스와 가진 독대에서 꽤 개운치 못한 경험을 얻었음을 직감했다. 자연히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심각하다.’
그것도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차기 정권이 시작도 하기 전에, 그 통수권자와 한서진이 불협화음을 빚다니.
페이 차일드는 자신의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머리가 어지럽게 팽팽 돌아갔다.
한서진의 요구에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그가 부탁하는 대로 곧이곧대로? 아니면 다른 결정권자에게 도움을 청하고 조언을 구해야 하나?
전자를 택하면 차후 자신이 정치적 부담을 짊어지게 될 수 있다. 후자를 택하면 그런 부담은 없지만, 대신 한서진의 신뢰를 잃게 된다.
페이 차일드는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박사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덤덤한 그의 얼굴을 가만히 살피며, 페이 차일드는 속으로 크리스 당선인을 향한 원망을 뇌까렸다.
‘대체 박사님께 무슨 짓을 한 거야?’
퇴임식을 마치고, 클레튼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이제 전직 미 대통령이라는 원로 신분을 얻었다.
많은 지지자들은 아직도 충격에서 빠지지 못한 채, 눈물바람으로 그를 보내야 했다.
“클레튼이 재임에 실패하다니! 믿을 수가 없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분명히 선거에 비리가 있었음이 틀림없다! 선거 과정을 낱낱이 파헤쳐야 한다!”
“선거를 다시 해라! 잘못된 선거는 무효로 해라!”
과격한 지지자들이 사물을 부수며 행진하는 등 난동을 피우기도 했으나,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대통령 선서를 마친 크리스는 이제 당선인의 신분을 벗어나 정식 미 대통령이 되었다.
보호 무역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그가 가장 먼저 택한 정책은 금리 인상이었다.
“미합중국 시민들을 보다 부유하게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대통령으로서 중요시해야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크리스 정권은 여러 대외 정책의 대대적인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변경에 관한 계획 방침을 본 여러 나라들은 상당한 충격에 빠졌다.
세계의 경찰 미국, 그것은 허울 좋은 타이틀이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미국을 역사상 가장 자비로운 제국이라 불리게 만들어준 명분이었다.
헌데 미국은 그런 견장을 완전히 벗으려 했다. 자국과 자국민의 이익만을 추구하겠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명시했다.
“그나마 선량한 척 할 때에는 자국 이익을 따질 때 어느 정도명분과 눈치라도 봤는데……. 이젠 그런 눈치도 전혀 안 보겠다는 거 아니야?”
“앞으로 4년 간 세계적으로 다 함께 고달파지겠는데.”
“모르지. 4년이 아니라 8년일 수도.”
“그건 너무 끔찍하니 상상하지도 말자.”
첫 출항에 나선 크리스 정권은 거침없는 행보를 시작했다.
내각 구성원을 보면 혀가 내둘러질 만큼 화려했다. 내각 관료들의 힘을 모두 합치면, 한 개 주를 살 수도 있을 거란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내각의 면모를 보고 미국의 큰 사회 문제 중 하나인 빈부격차가 더 심해질 거라는 비난이 나왔으나, 성공한 기업가들이 모였으니 미국의 경제가 더욱 성장할 거라는 반박에 부딪쳤다.
“저런 부자가 가난한 시민들의 고충을 과연 이해하고 감싸줄지 회의적인데.”
“그래도 공약대로 한서진 박사를 미국으로 모셔오기만 해도 합격점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한서진 박사만 미국으로 오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것만 같거든.”
“대체 클레튼 대통령은 왜 한서진 박사를 그 위험한 불반도에 팽개쳐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중국이 납치나 시도하고 그러지.”
그렇게 우려와 기대가 한데 섞인 채, 크리스 정권은 임기를 시작했다.
크리스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사흘 후, 러시아 전권대사가 한국에 들어왔다.
―전권을 주겠소. 대사 자신이 바로 나라고 생각하고 그와의 만남에 임하시오.
무뚝뚝하지만 힘 있는 음성에 담긴 명령, 그 위압감이 아직도 뇌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알겠소? 이제부터 대사는 바로 포티 대통령이오.
무릇 전권대사란 대외 협상에서 그 나라의 원수나 다름없는 직권을 수여받고, 행사한다. 외교석상에서 직무에 한해 행한 행위는 대통령이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포티 대통령의 말은 단순히 그런 행정적인 차원을 상기한 게 아니었다. 진심으로 스스로를 포티 대통령이라 여기고, 대화에 임하라는 뜻이었다.
지금부터 코바초프 대사는 러시아에서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독재자, 포티 대통령에 몰입을 해야 했다. 과열된 긴장감 때문인지 등에서 저절로 식은땀이 난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그는 H그룹 본사 직원의 안내를 받아, 호텔 로비를 들어섰다. 복도에는 일반 투숙객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일체 보이지 않았다.
곳곳에는 건장한 경호원들이 경계를 서고 있다. 쥐 한 마리도 침투하기 어려울 정도로 삼엄한 보안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곳입니다.”
직원은 어느 객실로 코바초프 대사를 안내했다. 출입문 테두리에는 금속 재질로 된 띠가 쳐져 있었다. 대사는 특수한 스캐너임을 한눈에 알아봤다.
아마 자연스러운 몸수색을 위함이리라. 물론 무기나 도청장비 등은 일절 휴대하지 않았기에, 대사는 아무렇지 않게 안에 들어설 수 있었다.
넓은 객실에는 대사도 익히 알고 있는 인물, 한서진이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한서진입니다.”
“전권대사 코바초프입니다.”
악수를 나누는 순간 코바초프는 찌이잉 울리는 긴장감에 더욱 얼굴을 굳혔다. 국제 외교 석상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자신이 지금 눈에 띄게 긴장하고 있었다.
한서진은 혼자가 아니었다. 세 명의 남자를 대동하고 있었다. 각각 백인, 흑인, 황인이었다.
“이 분들은 제 개인 경호원이자 친구입니다. 편안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코바초프는 그들의 존재가 조금 걸렸으나, 곧 머릿속에서 꺼림칙함을 지웠다.
그는 목청을 가다듬고, 정중히 말을 꺼냈다.
“이 자리에서 저에게 하시는 말씀은 러시아 대통령에게 하는 말과 같다고 여겨 주십시오. 또한, 제가 드리는 말씀 역시 러시아 대통령의 발언과 동등한 효력을 가질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제가 외교적인 협상이나 대화를 해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의미 전달이 서투르거나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만, 부디 불필요한 오해가 없었으면 합니다.”
시작부터 그런 말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 자체가 보통 대단한 행위가 아니다. 어수룩하거나, 그만큼 자신감이 있거나. 물론 당연히 후자일 테지만.
‘무슨 일일까.’
코바초프는 보이지 않게 마른침을 삼켰다. 불을 삼킨 듯이 목구멍이 뜨거웠다.
향후 세계 과학 질서를 주름잡을 인물이자, 인류의 가장 귀중한 보물을 두개골 속에 보관하고 있는 청년. 그는 과연 무엇 때문에 러시아 전권대사를 만나보고자 했을까.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실은 구체적인 용건이나 용무가 있어서 대사를 뵙고자 한 건 아니었습니다.”
“…….”
코바초프는 흔들리지 않았다. 예상을 조금 웃도는 말이었지만, 한서진이 러시아를 바보로 만들려고 이 자리를 만든 것은 아닐 것이다.
“그간 저는 러시아와 전혀 교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동북아시아에서 한국의 미래 입지를 고려할 때, 러시아는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국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요. 맞습니다.”
칭찬이 담긴 말에 코바초프의 입가에 비로소 웃음이 서렸다.
러시아의 중요성을 한서진이 먼저 강조해주니, 전권대사로서 이보다 흡족할 수가 없었다. 만약 포티 대통령이 직접 들었어도 큰 웃음을 터트렸을 것이다.
“그래서 당장 제가 러시아에 어떤 용건이나 용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부터라도 차근차근 친분을 쌓는 게 어떤가 싶어서 어렵게 이런 자리를 청했습니다.”
“잘 연락 주셨습니다. 원래 친분이란 가벼운 만남과 대화에서부터 시작하는 것 아닙니까? 정말 잘 불러 주셨습니다.”
용건은 없지만, 한 번 보고 싶어서 불렀다.
결국 그런 말을 정중히 돌려 말한 것이지만, 코바초프 대사는 속으로 깊이 만족했다. 어쨌든 간에 상대가 먼저 청해서 이뤄진 자리 아닌가.
“구체적인 친분을 쌓는 거야 향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 아닙니까. 뭐든지 시작이 중요하지요.”
“저는 연구 활동 외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어서…… 혹시 친분을 쌓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생각해두신 게 있나요? 있으면 한 번 들어보고 싶습니다.”
“물론입니다.”
한서진은 가볍게 만나보려고 자리를 청했고, 러시아는 모든 변수에 대응하기 위해 철저한 계획을 세운 채 이 자리에 나왔다. 그리고 정작 주최자가 ‘어디 한 번 네 생각을 말해봐.’라고 말하고 있는 상황, 그러나 그것이 불쾌하기는커녕 오히려 고맙기 그지없는 게 러시아의 현재 입장이었다.
“러시아의 우주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물론 미국과 비견해서 이런저런 말이 많지만, 저희는 세계 제일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해서…… 우주 관련 기술을 박사님과 공동으로 연구하고 싶습니다. 물론 기반시설이나 인재 등 기본 인프라는 저희 쪽에서 투자를 할 겁니다. 연구 장소 역시 한국으로 할 겁니다. 박사님은 그저 한국 땅에서 간단한 자문만 해주시면 됩니다.”
“에테르를 우주 기술에 적용하고 싶어하시는군요.”
“그렇게까지 연구 범위를 확대해주신다면, 러시아로서는 그저 기쁠 뿐이지요.”
“우주 기술…… 그에 관해서 작은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얼마든지 말씀하시지요.”
“제가 관여한 프로젝트는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인류 보편적인 평화를 위한 수단으로만 활용되었으면 합니다. 영구적으로 말입니다.”
코바초프는 조금 멈칫했으나, 곧 어렵지 않게 끄덕였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러시아는 박사님의 고결한 뜻을 높이 사고, 존중하겠습니다.”
========== 작품 후기 ==========
저 부드러운 남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