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51 그의 외도 =========================================================================
터너 크리스는 미국에서 태어난 중국계 3세였다.
외조부모는 순수한 중국인으로, 중국에서 꽤 큰 기업을 운영하다가 공산당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이들이었다.
외조부모의 둘째 딸, 즉 터너 크리스의 모친은 미국에서 태어난 시민권자였고, 마찬가지로 시민권자인 백인 남자와 결혼해서 그를 낳았다.
“네 몸에는 중화의 피가 흐르고 있단다. 절대 그걸 잊어서는 안 된다.”
늙은 외조부는 어린 그를 붙잡고 종종 그런 당부를 했다. 터너 크리스는 어린 나이에도 그런 게 너무 싫었다.
어려서부터 풍족한 집안 덕에 귀족 학교를 다녔다. 급우들은 혼혈이라는 이유를 들어 그를 많이 놀렸다. 그는 자신이 순수한 백인이 아니라는 게 너무 싫었다.
성인이 된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집안의 자본을 받아 사업을 시작했다. 미국에서도 알아주는 재력가였기에 그는 어렵지 않게 승승장구했고, 어느덧 지역 신문에도 오르락내리락 하는 거부로 거듭났다.
미국이 차별에 엄격하고 자유를 사랑하는 나라라지만,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은 분명히 존재했다.
특히 사업의 규모가 커질수록 그는 그런 장벽을 분명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순수한 앵글로색슨이 아닌 그로서는 최상위층으로 진입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혈통의 한계를 상기할 때마다 그는 자신의 몸에 흐르는 피를 저주했다.
중국계가 아니었다면, 순수한 앵글로색슨이었다면, 이런 유리천장에 부딪치지 않아도 될 텐데.
누구나 부러워하는 상류층의 삶을 누리고 있었기에, 그런 보이지 않는 작은 한계가 더욱 그를 목마르게 했다.
어느덧 미국 100대 거부의 반열에 접어들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갈증을 참을 수 없었다.
그 목마름이 정치를 시작하게 된 계기였다.
돈의 힘만으로 유리천장을 넘을 수 없다면, 정치력으로 돌파하겠다는 발상이었다.
수십억 불이 넘는 자산과 정치가 결합하자, 그는 어렵지 않게 의회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승승장구였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유리벽은 더욱 두꺼워졌다. 정계에서 아시아계 미국인의 신분 상승은 더 큰 제한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차라리 흑인이 훨씬 더 유리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터너 크리스, 당신은 모든 중국계 미국인들의 자랑입니다. 당신을 후원하고 싶습니다.
화교 자본이 본격적으로 손을 뻗쳐 왔다.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두기까지, 그는 의도적으로 화교 자본을 멀리해왔다.
미국 내에는 화교 자본이 이미 깊은 뿌리를 내린 채, 자신들의 영향력을 사방으로 벋치고 있었다. 다른 기업가들은 사업적 이익을 위해서라면 큰 망설임 없이 그들과 손을 잡았다.
그게 돈이 됐으니까.
그러나 터너 크리스는 달랐다. 그는 사업으로 성공을 하고 정계에 진출하기까지, 일부러 화교 자본을 멀리했다. 중국계와는 더욱 거리를 두었다.
‘미국인으로서 대성공하기 위해서는, 나는 철저한 미국인이어야 한다.’
최근 중국이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면서, 중국 자본의 미국 침투로 여러 가지 말이 많다.
그러나 유리벽 너머로 최상류층의 세계를 접해온 터너 크리스는 알 수 있었다. 미국을 진정으로 움직이는 힘은 따로 있다는 것을. 중국 자본은 상대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을.
미국은 타국의 견제나 자본에 휘둘릴 나라가 아닌, 그 자체로 오롯한 강대국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우리 중국인들이 성공하기 위해서 끈끈하게 손을 잡아야 합니다.
그런 유혹이 쉴 새 없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터너 크리스는 한사코 모든 것을 거부했다.
자본이라면 이미 부족하지 않았고, 중국계 유권자들 지지는 필요 없었다. 그들의 지지를 얻는다면 수월하게 정계에서의 입지를 쌓을 수 있겠지만, 동시에 ‘중국계’라는 명확한 한계선이 그어지게 된다.
그는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더욱 부각했다. 상류층과 부호들의 이익을 대변하며, 미국의 강대한 국력을 강조했고, 자랑스러워했다.
―당신의 빈곤을 사회 시스템 탓으로 돌리기 전에, 시스템을 이용할 궁리를 하는 게 효율적이다.
―부자인 게 죄는 아니다. 가난한데 노력하지 않는 게 진정한 죄 아닌가?
―인간은 누구나 탐욕스럽고, 사회는 공정함보다는 불공정함에 무게가 쏠리기 쉽다. 한 번 그것을 인정해봐라. 그럼 세상이 달라 보일 것이다.
폭넓은 지지는 못했지만 정치 소신을 지키며 나름대로 인기를 쌓아갔다.
약육강식, 강자생존.
그는 자연의 그런 법칙이 인간 사회에서도 본질적으로는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도덕심과 사회성이 잔혹한 도태를 어느 정도 커버해줄 뿐, 그것이 인간 전체의 풍요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그는 기업과 최상류층의 이익을 강조하고 대변했다. 그것이 미국이 진정한 강대국으로 거듭나는 길이라고 믿었다.
의외로 빈곤층에서도 꽤 폭넓게 그를 지지하는 층이 있었다.
힘과 우세의 법칙을 숨기지 않고 인정하는 태도가, 차라리 속 시원하고 솔직해 보인다는 이유였다.
그는 중국계의 접근을 철저히 멀리했고, 순수한 미국인으로서 자신의 고유 정체성을 지켜 나갔다.
그 이후 이상하게 일이 잘 풀렸다. 사업은 더욱 번창해서 수십억에서 수백억 불 자산가가 되었고, 연방의회 상원의원까지 진출했다.
철저한 자본가의 대변인, 재수 없기는 해도 최소한 위선이나 가식은 떨지 않는 부자, 중국계임에도 그 누구보다 순수 미국인 같은 정치인, 그런 이미지를 차곡차곡 쌓으며 입지를 구축했다.
그쯤해서 그는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보이지 않던 유리천장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얇아지고 있는 중이라고. 조금만 힘을 주어 밀면 얼마든지 부술 수 있다고.
그러나 그는 차분히 기다렸다. 그리고 머지않아 기다렸던 기회가 찾아왔다.
“미스터 크리스, 혹시 공화당 대선 후보로 선거에 나갈 생각이 있습니까?”
혈통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우악스러우리만치 유지해온 미국인으로서의 고유성. 그 지난날에 대한 달콤한 보상이 돌아왔다.
“미국의 영웅을 만난 소감은 어떠셨습니까.”
방한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전용기 안에서, 옆에 앉은 보좌관이 공손히 물었다. 175cm가 넘는 늘씬한 키에 곱슬기가 섞인 금발이 매력적인 백인 미녀였다.
크리스 당선인은 흘끔 보좌관을 살폈다. 그녀를 알게 된 것도 벌써 꽤 되었다. 그러나 한 번도 그녀를 자신의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가진 것에 비해 마음이 검소한 사람이더군. 그리고 철저한 연구자 타입이야.”
보좌관은 보일 듯한 미소를 지었다.
“미국으로 거주지를 바꾸는 것은 쉽지 않겠어.”
“반드시 지킬 의무는 없는 공약이지요. 설득했지만 본인이 끝내 거부했다 하면 유권자들도 납득할 겁니다.”
“그렇지. 이미 큰 미션은 끝냈으니.”
크리스는 푹신한 가죽 시트에 몸을 묻으며 편안한 웃음을 지었다.
그저 성공 하나만을 보고 달려온 평생, 그리고 도저히 뚫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유리천장을 마침내 돌파했다.
그러나 보좌관은 보지 못했다.
그의 웃음 아래에 숨어 있는 씁쓸한 어둠, 바로 질시라는 감정을.
‘고작 한국인이 미국의 영웅이라…….’
중국에 관해 큰 미련은 없다고 생각했다. 조국이라는 개념도 희박하다.
그는 평생 자기 자신을 세뇌했듯이, 미국인으로 태어났고 미국인으로 살다가 미국인으로 죽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보다 작고 힘없는 한국, 그런 나라에서 태어난 이가 미국 전체의 영웅이라니. 심지어 그는 백인의 피가 섞이지도 않았는데.
혈통의 한계를 극복해가며 이 자리에 오른 그로서는, 한서진을 바라보는 시선이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정치를 한 것도 큰 뜻을 품은 게 아닌, 성공 하나만을 보고 달리다가 통과한 반환점이 아닌가.
그는 옅은 미소로 그런 어두운 감정을 감췄다.
‘어떻게 올라온 자리인데. 그런 어리석은 감정에 휘둘릴 수는 없지.’
개인적인 감정은 개인적인 것이다. 지금의 자신은 어엿한 미국의 차기 대통령, 운명의 신이 허락한 이 기회를 허투루 날릴 마음은 없었다.
“영웅은 영웅의 일, 그리고 대중의 환호에 충실하게 해야겠지. 그게 미합중국 대통령으로서 해야 할 일이 아닌가.”
그를 바라보는 보좌관도 만족한 듯, 미소도 짙어졌다.
한밤중, 페이 차일드는 갑작스러운 한서진의 호출을 받고 급히 세연동 대저택으로 향했다. 한서진은 1층 라운지에서 편안한 옷차림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페이 차일드는 다소 긴장해서 들어섰다. 한서진이 이틀 전 크리스 당선인을 독대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었다.
무슨 대화가 오고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그 만남 때문에 이 자리를 만든 것은 틀림없으리라.
비록 화이트요원이지만 첩보계에 오래 몸을 담아온 몸이다. 그의 감은 아직도 제법 날카로웠다.
“크리스 당선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
어색한 침묵 끝에 던져진 느닷없는 질문. 페이 차일드는 신중히 한서진의 안색을 살폈다.
그가 어떤 의중으로 던진 질문인지 먼저 알아야 했다. 단지 가벼운 신상을 알고 싶어서 자신을 부른 것은 아닐 텐데.
“중국계 3세 시민권자로, 자산이 수백억 불에 달하는 부호입니다. 물론 박사님께는 비교가 되지 않겠지만, 워싱턴 정치인 중에서는 알아주는 큰손으로 통합니다. 영향력도 상당하고요. 그리고…….”
“제가 그런 걸 알고 싶어서 요원님을 모신 게 아니라는 것은 잘 아실 텐데요.”
“……죄송합니다. 의중을 알 수가 없으니 제가 대답을 고르기에 너무 신중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럼 질문을 바꿔보지요. 요원님은 그 사람을 지지합니까?”
“정치적인 입장 표명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어차피 듣는 사람도 없습니다. 편히 말해주세요.”
“…….”
“좋습니다. 그럼 저와 그 사람이 다툰다면, 누구 편을 드시겠습니까?”
“그것은 CIA 요원으로서 궁금하신 겁니까? 아니면 페이 차일드라는 개인으로서입니까?”
“둘 다 말해주세요.”
페이 차일드는 잠시 고민하다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미합중국 대통령은 그 자체로 위대한 인물입니다. 3억 미국 시민들의 선택을 받은 리더니까요. 그러나 대통령은 대체가 가능하지만, 박사님은 대체가 불가능한 분입니다.”
“…….”
“박사님께서 미합중국, 혹은 대통령직이라는 그 자체에 관한 반국가적 적대 행위를 하지 않는 한, 박사님의 중요성이 더 크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박사님은 미국에 그런 인물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이 나라보다 미국이라는 나라를 더욱 신뢰합니다. 영원한 제2의 고향이라 생각하고 있지요.”
페이 차일드는 조금 편안해진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미국 역시 그렇습니다.”
“실은 제가 요원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어떤……?”
“그 전에, 먼저 저는 미국 명예시민권자으로서의 영예를 조금도 포기할 마음이 없다는 점을 알아주십시오.”
얼마나 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기에 이런 다짐까지 각인시키는 것일까. 페이 차일드는 마른침이 저절로 넘어갔다. 온몸에서 긴장감이 곤두섰다.
“제가 비밀리에 어떤 자리를 만들 생각인데, 그로 인해 미국이 불필요한 오해를 하지 않을 증인이 돼주시면 좋겠습니다. 증인은 많을수록 좋으니, 더 늘려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비밀은 확실히 보장해야겠지요. 물론 이 일은 절대 증인 외에 다른 이가 알아서는 안 됩니다.”
“……어떤 자리입니까?”
한서진은 잠시 숨을 고르고, 건조하게 대답했다.
“러시아 대사를 만날 생각입니다. 물론 장소는 한국이 될 겁니다만.”
========== 작품 후기 ==========
연애 참 어렵다.
결혼 생활은 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