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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350화 (35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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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진 씨, 오늘 오후에 시간 있어요?

―네, 있어요. 어디서 볼까요?

―제가 차 보낼게요. 지금 보낼까요?

―바로 준비할게요.

송하나와 자연스럽게 약속을 잡은 신효진은 퇴근 준비를 했다. 다른 직원들이 그녀를 부러움 섞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특히 여직원들의 미약한 질시가 느껴진다. 예전이라면 몰랐을 질투, 그러나 이제는 귀엽기까지 하다.

아마 그들은 한서진과 그녀 사이를 불온하게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젊은 대부호와 미모의 여비서, 질척한 상상을 떠올리기에는 충분한 소재거리 아닌가.

“효진 씨, 퇴근하시나요?”

“네, 하나 씨 만나서 센터 가려고요. 수영 하고 같이 저녁 먹을 거예요.”

“아……. 예비 사모님 만나러 가시는구나.”

송하나의 이름이 나오자 그들의 꼬리가 축 늘어진다.

미모 외에는 가진 것 없는 신효진과 달리, 송하나는 그들에게 있어 범접할 수도 없는 신분. 그녀와의 친분을 가볍게 표시하는 것만으로도 저렇게 표정이 달라진다.

조금 우습기도 했다.

자신은 질시해도 되고, 송하나는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것. 그것이 저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구나, 하는 생각에.

송하나는 그녀 소유의 스포츠센터 VIP실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

신효진은 그녀의 배려로, 센터 회원권을 발급받아 지금까지 무료로 이용하고 있었다. 물론 쑥스러움 때문에 혼자서는 별로 이용하지 않는 편이다.

“효진 씨, 수영 아주 잘하는데요. 전생에 혹시 물고기였나 싶을 정도네요.”

“다 하나 씨 덕분이죠. 너무 잘 가르쳐 주셔서.”

“이제는 더 가르칠 것도 없네요. 사실 수영은 물에 뜰 줄만 알면 다 끝이죠. 금메달 딸 것도 아니잖아요?”

“맞아요.”

코스 왕복을 끝내고, 물에 몸을 담근 채 난간에 상체를 기댄 신효진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옆 라인에는 송하나가 물에 젖은 얼굴로 비스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마치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같은 여자가 봐도 이런데 남자는 오죽할까.

신효진은 예전보다는 조금 편안한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그녀처럼 근사한 여자가 그의 옆을 지켜준다는 것이, 마치 자신의 일처럼 뿌듯했다.

“모델 일을 그만 두기로 한 건 아쉬웠어요. 효진 씨는 얼마든지 톱스타가 될 재능이 있었는데.”

“에이, 제가 그런 재능이 어디 있어요.”

“없기는요, 이렇게 예쁜데.”

“하나 씨가 그런 말 하면 사람 놀리는 거 같아요.”

“아닌데요. 효진 씨가 홍보 모델 하고 나서부터, 우리 백화점 매출 갑자기 늘어난 거 알아요? 모델 교체 하고 나서는 다시 떨어지고 있어요.”

기분 좋으라고 한 말이겠지만, 그래도 마음이 들뜨는 걸 보면 자신도 여자이기는 한 모양이다. 신효진은 슬며시 웃으며, 난간에 팔베개를 하듯이 상체를 눕히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나 씨, 고마워요.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조그맣게 용기를 낸 그녀는 작지만 분명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저랑 친구가 돼준 거요.”

그녀가 잠시 흠칫한 듯 했으나, 곧 살포시 웃었다.

취임식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크리스 당선인은 차기 대통령으로서 행보를 시작했다.

그는 먼저 일정을 잡고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 외교부는 클레튼 대통령의 방한보다 훨씬 성대한 규모로 그를 맞이했다. 클레튼을 소홀히 했다기보다는, 향후 미국을 이끌어갈 리더이기에 좀 더 신경을 썼다는 게 맞으리라.

김두박 대통령도 크리스 당선인과 정상회담을 가지며, 모처럼 정치적 행보를 보여 주었다.

일각에서는 일도 안 하는 태업 대통령이 사진은 열심히 찍는다고 비아냥거림이 터져 나왔으나, 그리 큰 주목을 끌어당기진 못했다.

“미국과 한국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영원한 혈맹일 것입니다.”

크리스 당선인은 한미 동맹을 깊이 강조하며, 미국이 영원한 우방임을 어필했다. 국내 메이저 매스컴들은 신이 나서 크리스 당선인의 발언을 조명하고, 뉴스와 기사로 내보냈다.

“한서진 박사는 미국과 한국, 양국의 주요 인물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주한미군 전력으로는 과거 중국 사건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억제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주한미군 전력을 더욱 두껍게 만들겠다는 발언이었다.

물론 그 발언을 다른 시각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었다.

―지금의 주한미군 전력은 사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두꺼운 편이다. 그런데도 억제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크리스 당선인에게 다른 뜻이 있다고 봐야 한다.

―다른 뜻? 어떤 뜻?

―한서진 박사를 한국에 두는 것보다는 미국으로 데려가는 게 지키기 더 쉽다는 거지. 그런 교묘한 진의가 담긴 발언 아닌가?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

―말이 안 되긴 뭐가. 이미 크리스는 한서진 박사를 미국으로 데려오겠다는 공약으로 지지율 엄청 높여서 당선됐는데.

당선 확정 이후, 크리스는 한서진의 미국 체류에 관해 더 이상의 언급을 회피했다.

지지자들 중에 크리스가 공약을 바꾸려 한다는 의심스러운 지적이 나오기도 했으나, 그보다는 공약 완수를 위해 발언을 신중히 여긴다는 의견이 대세였다.

그런 상황에서, ‘현재의 주한미군 전력은 과거의 일이 되풀이되는 것을 억제하기에 부족하다.’라는 발언은, 얼마든지 다양하고 의미심장한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었던 것이다.

크리스 당선인의 방한은 시작부터 한미 양국을 펄펄 끓게 만들었다.

차분하게 방한 일정을 소화한 그는 마침내 한서진과 비공개 대면을 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한서진은 거부할 수도 있었지만 미국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받아들였다. 크리스는 클레튼의 정적이긴 하지만, 그 전에 미국의 차기 대통령이었으니까.

“반갑습니다. 터너 크리스입니다.”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당선자님.”

그는 상원의원 시절, 소신이 넘치다 못해 오만하다 싶을 정도의 발언으로 인기와 지지자를 끌어 모았었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서 오만불손한 이미지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온몸에서 자신감이 넘치면서도 세련된 매너를 빠뜨리지 않는, 사람을 잡아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과연 미국 대통령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 앞에서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상원의원은 몰라도, 대통령감으로서는 부족하다는 평이 끊이지 않던 그의 색다른 모습을 엿본 듯한 기분이었다.

“저는 중국이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주한미군의 전력이 약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해서, 제가 취임하면 주한미군의 전력을 이전보다 더욱 강화할 생각입니다. 어느 나라든 감히 도발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도록 말이지요.”

크리스 당선인은 주한미군에 관해, 자신감 있게 자신의 정책 방향을 이야기했다.

“또한 중국은 이전 정권의 선택에 관해 뼈아픈 교훈을 얻어야 할 겁니다.”

이미 몇 개 지역으로 분열된 중국은 예전의 위상을 잃었다.

지금도 군데군데 소규모 내전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다시 이전처럼 하나 된 중국으로 돌아가기는 불가능하다는 평이 주류를 잇고 있었다.

중국 인민들은 부패한 정부에 대항하여 쉬지 않고 투쟁하고 있으며, 미국 등 여러 나라들은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그들을 지원하고 있었다.

중국이라는 대국을 여러 개로 해체하는 데에는, 세계적인 강대국들이 모두 암묵적으로 합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나라가 쪼개지는 것에 그쳐서야 제대로 된 교훈이 되겠습니까.”

크리스 당선인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아무래도 클레튼 정권 때 행한 보복보다 더욱 혹독한 조치를 취할 모양이었다.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강대한 미국, 그것을 전 세계에 보여줄 겁니다.”

크리스는 자신 있게 포부를 밝혔다.

한서진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소 묘한 느낌을 받았다. 크리스의 발언이 마치, 대기업의 전문 경영인이 오너 앞에서 경영 계획을 발표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제가 비록 한국에서 태어났고 한국에 살고 있지만, 미국을 제2의 고향이자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디 당선인이 큰 뜻을 이루시고, 나아가 미국과 인류 전체의 번영을 이뤘으면 합니다.”

“고맙습니다.”

특별히 신경 쓰일 만한 주제는 의외로 화두에 오르지 않았다.

한서진은 미국행에 관해서 어떤 식으로든 언급이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크리스는 철저하리만치 그에 관한 화제를 피했다.

‘그저 당선되기 위해서 빈 약속을 떠벌린 건가?’

오죽하면 순간 그런 생각까지 들었을까.

하지만 크리스의 당선은 우연이 낳은 기적이 아니다. 오히려 철저한 계획과 계산을 딛고 이뤄진 결과다.

한서진은 그의 당선을 위해 어마어마한 선거 자금이 모세혈관처럼 미국 전역을 뒤덮었던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미 국세청은 절대로 찾아내지 못할, 교묘하면서도 방대한 흐름.

클레튼은 화폐발행권의 회수를 위한 거시적인 계획을 세웠고, 그 안에 한서진을 포함시켰다. 그 대가로 재임에 실패하여 정권을 놓치게 되었다.

어찌 보면 크리스는 한서진이 연준위 제도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나선 견제 카드라 볼 수 있다.

우스웠다. 정작 이쪽은 전혀 생각조차 안 하고 있었는데, 저들은 경기 반응에 가까우리만치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니.

“당선자님.”

“말씀하시지요, 박사님.”

“제가 원하는 것은 몇 가지 안 됩니다. 적당한 부와 명예, 그리고 개인적인 행복. 물론 이것들은 이미 이뤘지요. 그리고 에테르의 연구와 관찰을 통한 세상의 발전, 이 정도가 답니다.”

크리스는 묘한 미소를 지은 채 듣기만 했다. 한서진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제가 큰 회사를 몇 개 거느리고 있지만, 경영에는 일절 참여하지 않는 건 아실 겁니다.”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연구에 전념하기 위해서 세속의 복잡한 것들을 멀리 하시는 거지요.”

“그 점을 부디 이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클레튼 대통령은 저의 그런 점을 이해하고, 의심하지 않았거든요.”

“걱정하지 마시지요. 박사님의 고결한 연구 정신은 제가 깊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누구도 박사님의 연구 활동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크리스는 미소에 힘을 실은 채, 덧붙였다.

“박사님은 우리 미합중국의 영웅이시니까요.”

영웅…….

그 단어가 품은 뉘앙스는 마치 다른 형태의 속박처럼 느껴졌다. 다른 생각은 일절 하지 말고, 지금처럼 지내줬으면 한다는 의미일까.

‘될까? 어디 한 번…….’

한서진은 정신을 집중하며, 통찰안을 발동시켰다. 보이지 않는 힘이 실린 시선으로, 그를 뚫어져라 관찰했다.

통찰안으로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사람이 가슴에 품은 불꽃의 크기만큼은 가늠할 수 있으리라.

‘이 사람은…….’

한서진은 지금까지 크리스의 뒤에 누가 있는지 궁금했다.

그는 중국계 3세 출신의 대부호로, 유대 자본 등 수많은 미국의 부호들과 연결돼 있었다. 즉 이너 서클의 일원이라는 뜻이다.

물론 다른 이들에 비해서 그의 자산 규모는 많이 부족한 편이지만, 대신 정치판에서 나름대로 힘을 발휘한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는 미국의 ‘진정한 최상류층’을 대변하고, 그들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백악관에 들어섰다. 그것이 이번 선거에 감춰진 진실이었다.

‘이 사람은, 지금…….’

미소 지은 채 자신을 보는 그의 마음속에는, 검은 불꽃이 크게 일렁이고 있었다. 한서진은 저도 모르게 안색이 딱딱해졌다.

‘나를 미워하고 있다.’

========== 작품 후기 ==========

연애 때는 안 그랬었는데 결혼하니 변하더라고요. 카우보이도 똑같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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