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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349화 (349/609)

00349  뉴 페이스  =========================================================================

드넓은 해안.

본래라면 에메랄드빛 바닷물로 영롱하게 뒤덮여 있을 해변은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 가득했다. 부서진 창과 방패, 투석의 잔재가 곳곳에 떨어져 있고, 피에 젖은 모래알이 파도에 휩쓸려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중요한 것은, 전투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라는 것.

“개진!”

우렁찬 명령이 울리며, 후방에 대기 중이던 마법사들이 일제히 수인을 맺었다. 흰 빛이 그들을 감싸며, 대지가 미미하게 울렸다.

“공격!”

한 몸이 된 이십여 명의 마법사들로부터 굵은 섬광이 일직선으로 뻗어나갔다.

섬광은 해안으로 진입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거대한 문어 괴수의 상체에 정확히 명중했다.

사방을 찢어발기는 굉음이 울려 퍼졌고, 전투에 참가한 모든 이들은 일제히 몸을 낮췄다. 곧이어 거센 후폭풍이 그들을 날려버릴 듯이 들이닥쳤다.

―캬아아아!

귀청을 찢을 듯한 포효가 땅과 바다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폭음이 멎은 뒤 드러난 문어 괴수의 모습은 멀쩡해 보였다.

섬광에 적중당한 이마가 검게 그을린 채 움푹 패여 있었지만, 눈에 띌 만한 치명상처럼 보이진 않았다.

“라그나 에임은 대체 언제 도착하는 거냐!”

“수도에서는, 한 시간 안에 도착한다고……!”

“늦어, 너무 늦다! 보고가 들어간 게 언제인데 아직까지도 꾸물대는 거냐!”

“마력진 세팅에서 오류가 일어나 다시 처음부터 작업 중이라고 했습니다!”

괴수 섬멸 병기, 라그나 에임.

어떤 괴수든지 물리칠 강력한 힘을 담고 있는, 마도의 정수가 모인 병기다. 그 가공할 위력 때문에 모든 물량과 보급은 수도에서 엄밀히 관리한다.

하필이면 이런 때 보급 사고가 터질 줄이야. 지휘관은 이를 바드득 갈았다.

이렇게 된 이상 현장 마법사들을 쥐어짜낼 수밖에 없었다. 일반 보병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시 개진을 준비하라!”

“앗! 장교님! 저쪽에서 빛이!”

참모 한 명이 소스라치게 놀라서 외치며 가리켰다. 지휘관이 반사적으로 그쪽을 돌아보는 순간, 멀리 지평선 너머에서 날아온 빛이 유성처럼 해변에 강하게 내리꽂혔다.

먼지와 폭음이 비산했고, 잠시 후 충돌 지면에는 가녀린 그림자가 늠름하게 서 있었다.

‘여기사?’

지휘관은 자신의 눈을 비볐다. 타오르는 화염처럼 붉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늘씬하고 강인해 보이는 미인이었다.

그녀는 등에 본인보다 큰 대검을 차고 있었다.

저 가녀린 팔뚝으로 휘두르는 게 가당키나 할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녀가 대검을 가볍게 뽑아들며 천천히 자세를 취했다.

대검이 붉게 빛나며, 그녀의 살의가 해양 괴수를 향했다.

지휘관은 명령을 내리는 것도 잊고, 그녀의 자태 하나하나에 넋을 빼앗긴 채 멍하니 바라보았다. 붉게 타오르는 대검을 높이 들어 올리는 동작이, 어찌나 그리 아름답던지.

여기사를 지켜보는 다른 이들 또한, 자신과 별반 다를 바 없으리라.

단순한 동작이었다. 그저 위에서 아래로, 종으로 크게 한 번 대검을 휘둘렀을 뿐. 그러나 그 결과는 경이적이었다.

바다가 갈라졌다.

소리 없이 뻗어 나간 날카로운 기운은, 그녀의 앞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종으로 갈라버렸다. 수평선 끝까지 갈라진 바닷물 사이로 말라붙은 바닥이 드러났고, 괴수의 전신에 세로로 붉은 줄이 하나 그어졌다.

곧이어 괴수의 몸이 두 동강이 나며 양쪽으로 무너졌고, 갈라졌던 바닷물이 합쳐지며 커다란 파도를 빚어냈다.

푸른 파도가 어지럽게 헝클어지며 해변을 때렸지만, 거친 물방울은 여기사를 감히 침범하지 못한 채 피해갔다.

“…….”

“…….”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광경이다.

검 하나로 저 강한 괴수와 바다를 한꺼번에 가르다니.

지휘관이 알기로, 왕국에서 그런 힘을 지닌 인물은 단 한 명뿐이다.

아니, 이제 두 명이 되었다고 했던가. 얼마 전 수도에서 들린 소식을 기억해낸 그는, 뱃속에서부터 밀려나오는 감동을 참지 못해 외쳤다.

“왕비 전하 만세!”

“……이 정도쯤이야 별 거 아니죠. 병사 여러분들의 안전이 더 중요한 걸요. 우리 왕실에서는 언제나 백성들의 안위를 걱정하고 염려하고 있답…… 으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신효진은 얼굴에 내려쬐이는 햇볕을 느끼고 부스스 눈을 떴다. 주변을 천천히 돌아보던 그녀의 눈동자가 점점 또렷해졌다.

“……아, 벌써 끝이네.”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대륙의 끝까지 단숨에 날아와 괴물을 처치한 용맹한 왕비. 한창 백성들의 찬양과 감격을 한 몸에 받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다음 화로 미뤄야 할 팔자인가 보다.

신효진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머리를 긁적거리며, 침실 벽에 붙은 거울을 돌아봤다.

스칼린을 닮은 여자가 빤히 쳐다보고 있다. 머리카락 색도 다르고, 바다를 가르는 힘도 없지만, 외모만큼은 레노지안의 국모라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아, 이제 일어나야지.”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새로 이사한 집은 침실 하나가 이전에 살던 원룸보다 몇 배만큼 크다. 이런 방이 네 개나 되는데다가, 거실도 입이 벌어질 만큼 넓다.

여자 혼자 살기에는 넘칠 정도로 근사한 고급 아파트, 그녀는 예전이었다면 꿈도 꾸지 못할 인생을 누리고 있었다.

덕분에 레노지안의 꿈을 꾸는 것도 즐거워졌다.

이전에는 비루한 현실을 잊을 수 있는 도피처였다면, 지금은 또 다른 경험을 누리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나저나 난 양쪽 다 진짜 같은데.’

한서진은 레노지안이 거짓이라 말했지만, 신효진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렇게 근사하고 생동감 넘치는 세계가 어떻게 허구일 수 있겠는가.

어젯밤 남편인 아서 왕과 보낸 즐거운 시간을 떠올리자 그녀는 얼굴에 벌게졌다.

‘박사님 보고 얼굴 빨개지면 안 되는데.’

출근 준비를 마친 그녀는 현관 거울 앞에 잠시 섰다.

단아한 블랙 미니스커트에 흰 블라우스, 그리고 어두운 와인색을 띤 롱코트. 흰 목을 감싼 머플러에 포인트를 준 전체적인 모습은, 그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근사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봐줄 만하지.’

모델 일을 하면서 그녀는 자존감을 얻었다. 자신이 남들 보기에 꽤 괜찮은 여자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남자들의 대시는 여전히 수줍지만, 그리고 받아줄 생각도 없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얻은 자신감은 그녀의 마음을 더욱 풍족하게 만들어주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을 향해 내려갔다. 중간에 다른 입주민들이 몇 명 탔다.

그중 일부가 그녀를 몰래 훔쳐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H백화점 모델이었다는 것을 알아본 것인지도 모른다.

주차장에는 얼마 전에 송하나가 선물한 근사한 세단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는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지금 그녀는 행복했다.

현실에서도, 꿈에서도.

영상에서는 한서진이 노벨상 수상 소감을 밝히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영상이 끝나자, 흰 손가락이 화면을 터치하며 다시 처음으로 되돌렸다.

벌써 몇 번이나 반복해서 보는 건지. 신효진은 지겨울 때까지 반복해서 돌려보고는 마침내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박사님은 역시 대단해.”

한서진의 개인 비서는 별로 할 일이 없었다.

비서실장이 따로 있긴 하지만, 그는 신효진에게 별다른 터치를 하지 않았다. 남자의 눈을 휘둥그렇게 만드는 미모, 더불어 송하나와 친구 사이라는 것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한서진 역시 그녀를 지인처럼 중요하게 대우하고 있고.

덕분에 비서실에 낙하산으로 들어왔지만, 다른 직원들과 서로 소원하지 않고 잘 지내고 있는 사이였다. 다른 비서들은 그녀를 반쯤 오너의 측근으로 대했다.

“효진 씨, 박사님께서 찾으세요.”

“네, 알겠어요.”

신효진은 벌떡 일어나서 한서진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커다란 주모니터 앞에서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던 한서진은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봤다.

“아, 효진 씨. 어서 앉으세요.”

“네, 박사님.”

마실 것을 권한 뒤에 한서진이 말을 꺼냈다.

“요즘에는 별 일 없어요?”

“해안을 어지럽히는 괴수를 잡았어요. 거대한 문어 괴수인데, 높이가 63빌딩보다 높아요. 지역 군대로는 감당이 안 돼서 제가 왕성에서 그곳까지 직접 출동했어요. 수천km는 뛴 것 같아요.”

“효진 씨 서열이 레노지안에서 꽤 높다고 들었는데, 주변 사라들이 함부로 굴리는가 보군요.”

“그렇지 않아요. 저의 자발적인 결정이었어요.”

신효진은 생긋 웃으며 덧붙였다.

“이래봬도 레노지안 서열 2, 3위쯤 될 거예요. 아서 왕도 저한테 함부로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아요.”

“서열 2, 3위라니…….”

“공식적으로는 2위가 맞는데, 저 말고 다른 분이 한 분 계셔서…….”

신효진은 말을 흐렸다.

왕국의 서열 2위, 그것은 왕의 반려를 의미한다. 그녀는 내심 그의 눈치를 살폈으나, 그는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아마 재상이나 혹은 군부의 1인자, 뭐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적어도 왕비로서 서열 2위라는 것은 아직 모르는 모양이었다.

‘혹시 짐작하시면서도 모른 체 하시는 건 아니겠지?’

은근히 그의 속마음을 떠보고 싶지만, 송하나를 생각하면 머뭇거려진다.

그녀의 미모, 몸매, 심지어 재산과 신분까지. 자신은 어느 것 하나 그녀를 당해낼 수 없다.

아니, 모든 것을 떠나 송하나는 자신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준 사람이자, 한서진이 사랑하는 약혼녀다. 그를 사모하고 흠모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둘 사이에 끼어드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동경하는 연예인이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기를 바라는 팬의 마음이랄까. 가슴이 조금 쓰라리긴 해도, 그 정도는 팬심으로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레노지안에서는 내가 박사님을 차지하고 있으니까.’

이 또한 그녀가 견딜 수 있는 중요한 이유다.

레노지안의 생생함은 실제 현실과 구분이 불가능하다. 어찌 보면 그녀는 남들보다 2배의 인생을 살고 있는 셈. 그래서 현실에서 한서진과 거리가 있어도, 불행하지 않았다.

“에테르 쪽은 뭐 전진이 없습니까?”

“죄송해요. 열심히 공부하고 있긴 한데, 제가 공부 머리가 조금 부족해서……. 그쪽으로는 영 재능이 없나 봐요.”

“…….”

“마도사들도, 그리고 아서 왕도 제가 마법이나 에테르학 쪽으로는 재능이 별로 없대요. 전 천생 기사 체질인가 봐요.”

“굳이 다 배울 필요는 없어요. 중요한 핵심 몇 가지만 암기해서 저에게 알려주시면…….”

“너무 어려워서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암기는 엄두조차 나지 않았어요.”

그러면서 신효진은 쭈뼛쭈뼛 종이를 내밀었다. 레노지안에서 암기한 것을 꿈에서 깨어난 뒤에 생각나는 대로 적은 종이였다.

“여기…….”

얼마 되지 않는 문자와 수식, 한서진은 그 적은 양에 한숨이 나왔으나 티내지 않았다. 신효진의 기가 죽으면 안 되니까. 오히려 이 정도만이라도 꾸준히 해주는 그녀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고마워요. 수고하셨습니다.”

“아니에요. 박사님 덕분에 제가 현실에서 이렇게 잘 살고 있는데, 당연히 이런 거라도 도와야죠.”

“오늘은 이만 퇴근하셔도 좋아요.”

“괜찮은데…… 알겠어요.”

좀 더 그의 곁에 있고 싶지만, 오늘도 그는 무척 바쁠 것처럼 보인다.

사무실을 나온 그녀는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때 스마트폰이 가볍게 진동했다.

송하나로부터 온 톡 메시지였다.

―효진 씨, 오늘 오후에 시간 있어요?

========== 작품 후기 ==========

현실도 꿈도 모두 행복하다니......

부럽네요, 신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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