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48 뉴 페이스 =========================================================================
클레튼 대통령은 다음날 전용기를 타고 귀국했다.
대통령이 자신에게 바라는 것은 무얼까. 한서진은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는 무언가 구체적인 요구를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패배한 것은, 자본가들도 통제 불가능한 돈의 흐름에 휘말린 것뿐이라고 짤막하게 밝혔을 뿐이다.
돈이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다는 의미는 아니리라.
돈도 결국 사람이 다루는 것, 그러나 극도로 커진 욕망끼리 서로 결합하면, 종래에는 사람을 넘어서는 가상의 인격이 형성될 수도 있다.
대통령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런 게 아닐까.
‘화폐 발행권자들이라…….’
연방은행을 손에 쥐고, 세계 경제의 혈액인 달러화를 마음대로 주무르는 이들. 그들의 오랜 욕망이 숙성되고 서로 엉키다 보면, 그들 본인조차 통제할 수 없는 자본의 괴물이 빚어졌을 것이다.
그들이 자신을 눈여겨보고 있다.
친구로 삼을지, 적이 될지 긴장하며.
가만히 생각하던 한서진은 슬며시 웃었다.
‘떡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참…….’
화폐 발행권? 연방은행?
현대 경제 사회에서 그게 얼마나 대단한 권력인지는 이해하고 있지만, 그런 것에는 별 관심 없다. 돈은 어차피 행복과 풍족을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이고, 그 충족점은 이미 오래 전에 넘기지 않았나.
에테르, 그리고 레노지안의 비밀을 탐구하는 것만 해도 시간과 열의가 모자란다.
‘누가 달러를 찍어내든, 지배하든. 뭐 나를 어쩔 건데?’
자신은 금융으로 어찌할 수 없는 실물 경제의 큰 핵을 쥐고 있다. 반도체와 H시리즈 등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에테르라는 커다란 핵이다.
화폐 경제가 어찌 돌아가든 간에, 그 절대성은 결코 침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모든 게 뿌옇기만 할 뿐이오.”
다소 창백한 얼굴, 왕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을 생각도 않은 채 덤덤히 말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소.”
“……폐하.”
“아무래도 한서진이 문을 닫아 버린 것 같소.”
한서진이 중국에 납치되었을 때, 왕은 한서진의 몸으로 강림해서 그를 구출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의 정신과 조우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자신이 한 말을 떠올리며, 왕은 씁쓸히 웃었다.
‘꿈속의 나약한 나에게는 너무 과한 진실이었나.’
한서진의 세상은 꿈으로 이뤄진 거짓일 뿐이다. 저주가 완성되거나 소멸하거나, 어느 쪽이 되든 간에 종래에는 완전히 사라져 버릴 허구.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서진은 허구에 안주하는 것을 택했다. 그곳에서 이룬 모든 것에 집착했다. 성공, 명예, 심지어 사랑까지도.
그 모든 게 사그라질 거짓임을 말해주었음에도, 그는 믿어주지 않는다.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레노지안을 향한 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그 때문에, 왕은 단 한 번도 한서진의 삶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이전에는 꿈에서 깨어나면 한서진으로 활동했던 모든 것이 생생히 떠올랐지만, 이제는 더 이상 꿈속에 머물렀던 시간을 기억해내지 못한다.
잠에서 깨어나면 꿈에서 보고 들은 기억을 고스란히 그곳에 놔두고, 현실로 돌아와야만 한다.
“그 또한 저주의 영향입니다.”
“……저주라.”
“꿈속의 폐하께서 그곳에 집착하고 안주할수록, 저주를 이겨낼 길은 요원해지는 거지요. 때문에 꿈속의 폐하께서 이곳 레노지안에 흥미와 관심을 보이게 만들어야 합니다.”
레노지안과 꿈속을 잇는 통로는 이미 만들어졌다. 다만 지금은 한서진이 저쪽에서 굳게 잠그고 있을 뿐이다.
레노지안이 진짜고, 그곳이 허구라는 것을 부정하기 위하여. 인정하지 않기 위하여.
“다만…… 폐하께서 그 일이 있은 후 꿈속의 일을 전혀 기억하시지 못하는 게 마음에 걸립니다.”
“무엇 때문이오?”
“단지 꿈에서 깨어날 때 기억을 그곳에 두고 오는 걸 떠나, 만약 꿈속의 폐하와 현실의 폐하의 인격이 유리된 것이라면…….”
“……그런 가정은 상상도 하기 싫군.”
노신하는 조심스럽게 우려를 나타냈다.
“물론 불가능한 일입니다만, 저주의 진정한 실체가 완벽히 밝혀지지 않았으니, 그런 가능성 또한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꿈속의 짐이 어지간히도 속을 썩이는구려.”
왕은 암담한 듯이 이마를 짚으며 힘없이 웃었다.
노신하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예를 표했다. 왕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자신을 보필한 충실한 신하. 그러나 저주의 여파 때문에, 오래 전부터 그의 이름을 인식할 수 없다.
그가 직접 말해 주거나 다른 이를 통해 들어도, 신이 그의 이름에 잡음을 덧씌운 것처럼 인식이 불가능하다. 글로 써서 봐도 마찬가지다.
‘또 무엇을 잊어가고 있는가.’
저주가 진행될수록 하나하나 기억을 잃어간다.
그것은 단지 잊어버리는 것을 떠나, 인연의 소멸을 의미한다. 노신하의 이름을 아무리 듣고 보아도 인식할 수 없는 것처럼.
또 무엇을 잊었을까. 그리고 잊어가고 있을까.
안타까운 것은, 어떤 것들이 사라졌는지조차 인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터너 크리스의 당선은 한국 사회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미국의 동맹이자 우방인 한국이지만, 미 대선 결과에 늘 큰 영향을 받아왔지만, 이번은 특히 더 심했다. 터너 크리스의 중심 공약이 한서진이었기 때문이다.
―크리스 당선자 뭐임? 설마 한서진 박사를 아예 미국인으로 만들어버리겠다는 거야? 미국인들이 그걸 원해서 당선됐고?
―뭔 개소리야. 한서진이가 언제부터 조선인이었다고? 갓양키로 클래스 체인지 한 게 언젠데.
―무슨 말씀하시는 거죠? 한서진 박사님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인이신데.
―맞습니다. 국민 모두가 나서서 한서진 박사님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 국민을 미국에 빼앗길 순 없어요!
―……그냥 사실상 이중국적자라는 거 인정하면 되지, 뭘 어디 국민이니 그런 걸 가지고 싸우냐. 한서진 박사가 이걸 보면 얼마나 기가 막히고 웃길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미 대선 결과, 그 승리자는 한서진을 미국으로 ‘모셔오겠다’는 공약을 걸고, 새로운 세계 대통령이 되었다.
한국 국민으로서는 발등에 수류탄이 떨어진 것처럼 화들짝 놀랄 일이었다. 많은 이들이 불안해했고, 비아냥거렸으며, 혼란스러워 했다.
한서진이 정말 한국을 떠날까?
그런 화두를 놓고, 한국 여론은 잠시도 조용할 일이 없었다.
한서진 측이 그에 관해 아무런 공식 입장 표명을 내놓지 않았기에, 그런 불안감은 더욱 증폭되고 있었다.
“자네 입장이 고약하게 되었군.”
오랜만에 만난 백철중은 다소 걱정스러운 안색을 내비쳤다. 그도 미 대선에 얽힌 한서진이 조금 곤욕을 치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크리스 당선인이 그런 비매너 짓을 할 줄은 몰랐군. 몸에 온통 진흙을 묻히더라도 이기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건가.”
제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는 미 대통령이라 해도 한서진을 강제할 수는 없다. 그가 한서진을 억압하려 드는 순간 미 의회가 먼저 움직일 것이다.
한서진은 조금 망설였다.
크리스의 승리 아래 감춰진 진짜 배경을 말해줘도 될까. 백철중이라면 간단한 설명만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겠지만, 그것이 그를 난처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몰랐다.
그래서 결국 그는 침묵을 선택했다.
“이기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겠지요. 미국이라고 모든 공약을 지키겠습니까.”
“허허, 그렇다면 정말 제대로 된 자충수를 둔 셈인데. 시작부터 그래서야 연임은 어림도 없겠어. 하물며 클레튼 대통령이 어디 보통 사람이었나.”
재임이 당연시되던 좋은 대통령을 4년 만에 밀어내고 그 자리를 꿰차고 들어섰다. 크리스 당선인의 부담도 장난 아닐 것이다.
“조만간 크리스 당선인이 방한한다던데, 자네 입장이 매우 난처하겠어. 클레튼 대통령과 절친 아닌가.”
“클레튼 대통령도 충분히 이해해줄 겁니다. 어쨌거나 미국의 차기 리더니까요. 오히려 당선인을 섭섭하게 대하는 건 원치 않을 거라 봅니다.”
“하긴, 클레튼이 큰 사람이기는 했지. 어느 반도의 대통령과는 달리.”
“김 대통령은 요즘도 태업 중인가요?”
“청와대에 파묻혀 신선놀음 중이라더군. 퇴임 후에도 걸릴 만한 건 대부분 정리한 모양이야.”
한서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대통령이 일을 전혀 하지 않는데도, 신기하게도 나라는 그럭저럭 잘 굴러가고 있었다. 심지어 정경유착 등의 비리가 줄어드는 등 긍정적인 효과마저 발생하고 있었다.
“퇴임하자마자 북유럽으로 도주한다는 말이 있던데. 한국 생활 모두 정리하고.”
“그런가요? 몰랐습니다.”
“자네야 워낙 이 나라 정치에 관심이 없지만, 우리 같은 기업인들은 회사를 운영하려면 항상 종로와 여의도를 주시하고 있어야 한다네.”
“그런 거 말고도 신경 쓸 일이 워낙 많아서요.”
“근데……자네는 정말 미국으로 갈 마음은 없나?”
백철중이 은근히 말을 꺼냈다. 전에도 한두 번 비슷한 말을 했었지만, 한동안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 현재 한미 상황에 또다시 호기심이 솟은 모양이다.
“미국에서 생활하는 게 여러모로 더 나을 텐데. 물론 지금도 거리낄 게 전혀 없지만, 그래도 거점을 미국으로 옮기는 게 훨씬 낫지 않을까.”
“혹시 회장님께서는 하나가 미국에 뿌리내리는 걸 바라시는 건가요?”
“험험……. 혹시 아나? 하나가 자네 후광에 힘입어 미 정계를 주름잡을지? 먼 훗날 일이지만, 어쩌면 최초의 미국 여성 대통령이 될 수도 있지.”
“회장님도 참, 하나가 어떻게 미국 대통령이 됩니까.”
“응? 자네 설마 몰랐나? 우리 안사람, 미국에 있을 때 하나 출산했어.”
“…….”
“아무래도 여론의 이목도 있고 해서 임신 안정기 접어들었을 때 미국으로 피해 있었지. 당시 성진그룹과 얽힌 문제도 많고 해서, 국내 출산은 조금 부담스러웠거든.”
“잠깐만요. 그럼 하나는 정말로 나중에…….”
“못 될 것도 없지 않나?”
송하나가 먼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된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이라고 웃어넘기기에는, 그녀를 둘러싼 상황이 너무 절묘했다. 그녀는 이제 겨우 21살, 지금부터라도 차근차근 준비하면 먼 훗날 대권을 쥐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리라.
‘설마 국제 정치를 해보고 싶다는 말이…….’
그런 것까지 염두에 둔 것은 아니겠지? 한서진은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백철중이 헛기침을 했다.
“내 딸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고 제법 영특해. 자네가 조금만 외조 해주면 누구보다 신뢰하고 함께할 수 있는 배우자가 될 걸세.”
“솔직히 저도 방금 말씀 듣고 솔깃했습니다.”
“그렇지? 허허, 자네라면 이해할 줄 알았어.”
한서진은 피식거리며 솔직한 소감을 밝혔다.
“그래도 당분간은 미국과 조금 거리를 두려고요.”
“역시 크리스 당선인 때문인가?”
“그것보다는 지금도 충분히, 아니 너무 가깝다고 생각돼서요. 여기서 더 친밀해지면 질투할 사람이 너무 많아질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신중하려고 합니다.”
“국내 인터넷 여론 같은 건 신경 쓰지 말게. 막말로 자네는 혼자 힘으로 미국에서 자수성가한 사람 아닌가? 언제든 미국으로 훌쩍 떠나도 누구도 할 말이 없지.”
“국내 여론 때문이 아닙니다.”
희미한 조소가 그의 입가에 떠올랐다.
“미국 내 어떤 친구들 때문이죠.”
========== 작품 후기 ==========
실탄프로덕션의 촬영예산이 부족하기 때문이죠...
미국에서 촬영하려면 어휴 그거 예산 감당 못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