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347화 (347/609)

00347  뉴 페이스  =========================================================================

“저는 달러 때문에 패배한 겁니다.”

크리스 터너에게 진 게 아니라, 달러에게 졌다?

미합중국 대통령이 다른 것도 아닌, 미국의 화폐에 패배했다?

이게 대관절 무슨 말인가?

“재임 기간 동안, 오랜 구상을 하나 세웠습니다. 제 임기 대에서는 결코 완성하지 못할 계획이지요. 다음 대, 혹은 다다음대 대통령에서는 그 완성을 기대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한서진은 소리 죽여 잠자코 듣기만 했다.

넋두리와는 거리가 먼, 담담하고 담백한 음성이다. 그렇다고 체념과 포기처럼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 안에 담긴 희미한 열망의 불씨가 또렷이 보인다.

“한 박사를 완전한 미국의 편으로 만드는 것, 그것 역시 제가 담당한 초석의 일부였습니다.”

완전한 미국인이 아닌, 완전한 미국의 편이라고 했다.

그 뉘앙스가 품고 있는 미묘한 차이를, 한서진은 분명하게 감지했다.

“존 캐롤 의원 등 민주당 인사와는 오래 전부터 함께 꿈꾸었던 주제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공화당 내 일부 유력 인사와도 이미 예전부터 공통분모를 형성하고 있었지요.”

자신의 임기 대에서는 완성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대관절 어떤 이야기일까.

“그게 뭡니까?”

“제 입으로 직접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건 한 박사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로 끌어들이는 행위니까요. 친구라면 그래선 안 되겠죠.”

“…….”

때론 어떠한 정보를 접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한 그룹으로 엮이기도 한다. 주변에 아무도 듣는 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들었다’는 것만으로 내면에 변화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 터너가 당선된 이상, 제가 물밑으로 준비했던 모든 작업은 이제 허사가 되었습니다. 저의 임기 4년, 그리고 크리스 터너가 집권하며 후퇴할 4년, 8년의 세월을 헛되이 소비하게 된 것이지요.”

“그건…….”

“그러나 저는 미국의 저력을 믿습니다. 잠시 뒤로 물러나 있을 뿐, 언젠가는 반드시 이뤄 내리라고 말입니다.”

“크리스 터너 당선자가 저를 적대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차기 미국 대통령입니다.”

짤막한 대답, 하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의미가 함축돼 있었다.

한서진은 미국 명예시민, 그리고 크리스 터너는 차기 미국 대통령. 그 구도에서, 구체적이고 혐오스러운 적의가 피어날 수는 없는 법이니.

“미합중국의 정의와 미래는 언제나 당신의 친구라는 점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대통령이 돌아간 후, 한서진은 오랜 시간 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가 남긴 말의 의미를 파악하려 애썼다.

어렴풋하게 알 것 같으면서도, 정작 뚜렷한 실체가 잡히지 않는 답답함. 한서진은 몇 번이나 정지원에게 전화를 시도했다가 보류하기를 반복했다.

‘내 힘만으로 생각해야 해.’

클레튼은 선거에서 졌다. 한서진이란 영웅의 거취에 관한 공약을 내건, 공화당의 버림패 후보에게 패배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형태일 뿐, 그를 패배시킨 진짜 주체는 달러라고 한다.

‘달러.’

그는 타르타로스 2에 달러에 관한 몇 가지 검색어를 넣었다. 곧 수많은 검색 결과가 촤르륵 떴다. 주요 첩보기관까지 탐색(해킹)해서 가져온 특급 기밀 자료들을 정리한 것. 정작 그들은 해킹당한 사실도 영원히 모를 테지만.

‘이게 아니야!’

한서진은 곧 자료 화면을 치워 버렸다. 부족했다. 이런 것으로는 터무니없었다.

‘무슨 구상이지?’

클레튼이 암시했던 긴 구상이라는 게 대체 뭘까. 공화당의 일부 유력 인사들과도 오래 전에 합의를 이루고, 함께 노력했다는 그것.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지?’

위험해질까 봐? 그것은 분명 아니었다.

클레튼은 분명 ‘부담’을 주기 싫어서라고 했다. 입에 바른 소리는 아닐 것이다. 아마 털끝만큼의 부담도 없이, 스스로가 원해서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의미이리라.

클레튼의 정적을 검색했다. 여러 의미 있는 검색 결과가 나왔지만, 의문을 충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통령이 미국으로 돌아가려면 아직 며칠 남았어.’

한서진은 닥치는 대로 타르타로스 2에 매달렸다. 철저한 보안을 갖춘 여러 시설들을 훑으며, 의미 있는 정보를 찾아냈다.

달러. 돈. 자본. 정치. 경제. 그리고 선거 패배.

뭔가 그럴 듯한 연결고리가 만들어지는 구도지만, 확실한 밑그림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알 것 같으면서도 실체가 잡히지 않으니 더욱 답답했다.

‘크리스, 중국계 3세 이민자.’

아무리 봐도 대통령감이 아닌 인물이다.

정치보다는 오히려 기업 경영을 하는 게 어울릴 듯한 사람, 이런 이가 왜 정치를 하고 있을까? 정치 활동 이력을 보면 상원의원이라는 직위에도 크게 관심이 없어 보이는데.

대통령 하나만 보고 정치를 시작했나? 그러기에는 정치에 입문한 뒤 걸어온 길이 너무 말이 안 된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당선됐지?’

언론의 말대로, 미국 시민들이 정말로 어리석어서?

한서진은 닥치는 대로 검색하던 중, 문득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이건 뭐지?”

미국 내 일부 자금의 흐름이 이상했다. 합법적인, 그리고 합리적인 영역을 벗어난 돈의 흐름이 다수 감지되었다.

모세혈관처럼 미약한 흐름이 미국 전체에 걸쳐 거시적으로 길게 형성돼 있어, 미 국세청 같은 곳이 파악하기에는 거의 불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타르타로스 2의 놀라운 정보 취득 및 분석 능력이 아니었으면, 절대 알아내지 못할 묘한 흐름이었다.

몇 번에 걸쳐 세탁된 흐름은 언론사, 광고사, 기업, 심지어는 작은 복지단체에까지 걸쳐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당장 잡히는 모세혈관의 개수만 해도 수십 만 개가 족히 넘었다.

한서진은 모세혈관이 출발한 최초의 동맥들을 거슬러 올라갔다. 어느 순간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가, 금세 동공의 빛이 차가워졌다.

대통령으로서 마지막 방한 일정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클레튼 대통령은 다시 한서진을 만났다. 이번에는 그가 직접 대통령이 머무르는 곳으로 찾아왔다.

철저한 보안을 유지했지만 과연 얼마나 많은 눈과 귀가 보고 들었을지는 장담할 수 없는 법. 자연히 대통령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처음에는 달러에 패배하셨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미합중국 대통령을 미합중국 화폐가 패배시켰다? 누가 들어도 우습지도 않은 조크지요.”

클레튼 대통령은 처음의 놀라움을 지워버리고, 대신 옅은 미소를 띤 채 그의 말을 들었다.

“대통령은 저에게 속 시원히 설명하시지 않았지요. 수수께끼 같은 암시만 던져놓고.”

“답답하셨겠지요. 사과합니다.”

“이해합니다. 제가 대통령, 아니 워싱턴의 긴 구상을 접하는 것만으로 제 의사와 상관없이 휘말릴 수 있었을 테니까요. 그 점을 배려해주신 것은 오히려 제가 감사드립니다.”

한서진은 그를 똑바로 주시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제가 스스로 깨닫고, 그리고 자발적으로 도와주기를 바라신 것 아닙니까? 그래서 모든 것을 밝히지 않으셨지요.”

“그렇습니다.”

한서진은 잠시 호흡을 고른 뒤,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크리스 터너는 도구입니까?”

중요한 주어가 빠졌지만, 대화를 이해하고 이어나가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대통령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비록 정적 관계라 하나 차기 대통령을 현직 대통령이 비하하는 것은, 상당히 큰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미합중국의 대통령이라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한서진은 다시 물었다.

“제가 그 정도로 위험한 존재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위험성을 끼칠 큰 힘을 가진 것은 사실이고, 그들은 그것을 두려워하고 경계합니다.”

“…….”

“핵보유국이 기존 핵질서의 유지를 위해 핵물질을 통제하려 하듯이, 그들 역시 궁극적으로는 박사님의 존재를 통제하려고 할 겁니다.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미 화폐 발행권자들…….”

한서진이 낮은 목소리로 내뱉자 대통령은 옅은 미소를 띠면서도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가 ‘자신들’의 구상을 짐작했다는 것에 기쁘면서도, 그에게 원치 않은 부담을 전가했다는 친구로서의 자책감. 그것이 가슴 속을 헝클어뜨렸다.

“대통령은 화폐 발행권을 국가로 되돌리려 하셨군요. 그게 선거 패배의 진짜 이유고요.”

“……그렇습니다.”

미국의 진정한 미래를 위해 반드시 이뤄내야 할 일, 그래서 오래 전부터 경쟁관계인 공화당의 일부 인사와도 비밀리에 공통분모를 쌓아왔던 것이다.

이미 과거에 몇 번이나 실패했던 일. 클레튼도 자신의 임기 안에 의미 있는 성과를 내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저 다음 대를 위해 초석을 다지고자 했을 뿐.

그 초석 중 하나에 한서진도 물색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달러는 전 세계 기축통화입니다. 세계 경제의 절대적인 질서가 달러에 귀속돼 있죠. 그리고 그 발행권은 미합중국이 아닌, 일부 민간인들이 소유하고 독점하고 있습니다.”

최강대국의 화폐이자 기축통화. 그것을 찍어내는 것은 정작 민간인이라는 아이러니.

“SJ인더스트리가 최고의 기업인 것은 사실이지만, 금융경제에 관한 영향력은 연방준비위원회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SJ인더스트리는 많은 수익을 거둬들이고 있지만 그 수익의 실제 형태는 달러 화폐. SJ인더스트리가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그들을 살찌우는 결과를 야기한다.

“그러나 지금의 성장세를 보면, 머지않아 연준위를 곤란하게 만들 수 있는 필살 카드가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지요. 그때가 되면 그들은 결국 선택을 해야 할 겁니다.”

아무리 대단한 기업이라 해도, 경제의 혈액인 기축화폐의 권위 앞에 조아려야만 한다.

그러나 에테르학의 출발은 그런 절대적인 질서를 깨뜨릴 변수를 암시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훗날에는 혈액 그 자체를 몽땅 교체당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들이 저를 적대할까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오히려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하겠지요.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구상에 큰 장애가 됩니다. 지금도 버거운데, 한 박사라는 거물까지 적진에 가세하는 것이니까요.”

“…….”

“일찍이 미 대통령 여럿이 화폐 발행권을 국가로 가져오려다가 실패했습니다. 암살을 당한 이마저 있었습니다. 그만큼 위험하고, 중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대통령은 시도하셨군요.”

“해야만 했으니까요. 언젠가는 반드시.”

“…….”

조금은 숙연해진다. 해야만 했다, 그 별 것 아닌 말이 이렇게 흉골을 울릴 줄이야.

“그들의 중축이 구체적으로 어디입니까? 로스차일드? JP모건? 록펠러?”

“전부 해당하기도 하고, 전부 아니기도 합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로스차일드를 위시해서 연방은행을 소유한 유대 자본가들이 중심이긴 합니다만, 그건 표면적인 형태에 불과합니다. 진짜 보스는 따로 있습니다.”

발행권을 가진 은행의 대주주들이 진짜 적이 아니라고? 한서진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럼 대체 누구인데?

“우리의 진짜 적은 전 세계에 퍼진 채 경제의 흐름을 움켜쥐고 지배하고 있는…….”

통화지배권을 손에 움켜쥔 이들은 화폐를 이용해 세계 경제의 흐름을 발아래 두려 했다.

그러나 지배욕과 탐욕의 수단이자 도구에 불과했던 돈은, 이제 스스로 생명을 얻어 주인이었던 그들을 도구로 부릴 권능마저 지녔다.

“미 화폐, 그 자체입니다.”

========== 작품 후기 ==========

“미개한 휴먼들아, 내 앞에 무릎을 꿇어라. 그리하면 나, 가난한 이에게는 고금리를, 부유한 이에게는 저금리를, 그리고 월급을 맞이한 이에게는 지름천사를 내려 주겠노라.”

리미트리스 드림의 미국에서는 달러가 조폐라인을 운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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