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46 뉴 페이스 =========================================================================
크리스 터너 상원의원은 공화당 내에서 비교적 별다른 중심축이 없던 인물이었다.
중국계 3세인 그는 매우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연 수익 100억 달러의 투자 회사를 운영했다. 그러다가 경영 실세에서 물러나 정계에 투신, 무난히 당선되어 정치를 해왔다.
다이아몬드 수저를 물고 태어나, 특별한 풍파 없이 무난하게 상류 정치를 해온 인생, 그 한 마디로 그가 걸어온 길을 지칭할 수 있으리라.
그래도 명색이 상원의원인지라 꾸준히 매스컴에 오르내리곤 해서, 인지도가 아주 낮지는 않은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직설적인 화법으로 유명한데, 그래서 유권자의 호불호가 명확하게 갈렸다. 대외적인 지지도를 보면, 그를 좋아하는 사람보다 싫어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
“당신의 빈곤을 사회 시스템 탓으로 돌리기 전에, 시스템을 이용할 궁리를 하는 게 효율적이다.”
“부자인 게 죄는 아니다. 가난한데 노력하지 않는 게 진정한 죄 아닌가?”
“인간은 누구나 탐욕스럽고, 사회는 공정함보다는 불공정함에 무게가 쏠리기 쉽다. 한 번 그것을 인정해봐라. 그럼 세상이 달라 보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부를 과시했으며, 인생철학에 관한 언급을 아끼지 않았다.
그를 좋아하는 유권자들은 ‘조금 재수 없지만, 틀린 말은 안 한다.’라는 포지션을 취하고 있다.
이처럼 호불호가 명확한 인물이었기에, 널리 시민들을 포용해야 하는 대통령이라는 직위에는 걸맞지 않다는 게 대중과 전문가들의 평론이었다.
―크리스 터너는 상원의원이 한계다. 그 이상은 불가능.
―클레튼을 상대로 패배를 인정한 공화당의 버림패일 뿐.
클레튼 대통령은 무난히 재임에 성공할 것이다.
민주당은 물론이고 공화당, 그리고 크리스의 지지자들조차 머리로는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선거 중반 이후에 접어들며 크리스의 지지도가 미묘하게 상승세를 그리기 시작했고, 클레튼 대통령의 지지도 하락세가 살짝 보이긴 했으나, 그 기묘한 변화를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반전이 일어났다.
―크리스 터너 상원의원이 45대 미합중국 대통령으로 당선이 확실시됩니다!
―클레튼 대통령이 재임에 실패할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새로운 대통령의 탄생입니다!
클레튼 대통령의 재임 실패는 미국 사회는 물론, 전 세계를 큰 충격에 빠뜨렸다. 그가 무난하게 재선에 성공할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의 재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결과는 충격적인 반전으로 돌아왔다.
대통령감은 아니라고 평가받던 인물이, 공화당의 버림패였던 크리스 터너가 덜컥 당선되고 만 것이다.
혼란에 빠졌던 정치 전문가들은 곧 앞을 다투어 당선 성공의 분석을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내놓았다.
―한서진 박사에 관해서 클레튼 정권의 유일한 아쉬움은 철저한 보호가 미흡했다는 것이지요. 물론 남한을 절대 사수한다는 전략방침으로 7함대를 이동하고 주한미군 전력을 극대화하는 등 치밀한 조치를 취했지만, 결국 중국에 납치당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습니까.
―만약 한서진 박사가 미국에 거주했다면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라는 게 유권자들의 시각입니다. 크리스 터너 대통령 당선인은 그 점을 철저하게 노린 거고요.
―한서진 박사는 미국인들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랑스러운 영웅입니다. 선거 판도마저 뒤집어버릴 수 있을 정도죠. 민주당은 그 점에서 너무 물렀습니다.
―한서진 박사를 미국으로 모셔오겠다는 공약은 크리스 터너 당선인의 독창적인 발상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공화당의 당론은 아니었죠. 공화당도 예상치 못한 결과에 오히려 깜짝 놀라고 있을 겁니다.
―한서진 박사가 당선인의 설득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는 사실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이미 선거는 끝났고, 그는 당선되었어요. 당선인 역시 한서진 박사의 심기를 거스르면서까지 미국으로 모셔오려 하지는 않을 거라 봅니다. 유권자들을 달래기 위한 노력은 하겠죠.
―유권자들의 선택이 옳은지 아닌지는 결국 시간과 역사가 말해줄 겁니다.
전문가들은 크리스의 성공 요인이 한서진을 공약의 중심으로 세웠다는 것으로 꼽았다. 한 개인의 존재가 미 대선까지 좌지우지할 정도로 막대한 영향력을 품고 있음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정작 본인은 선거에 전혀 관심을 주지 않았음에도, 이런 결과가 발생했다.
선거 막판, 크리스 캠프는 막대한 광고비를 동원해서 ‘영웅의 귀환’을 홍보했고, 그 미디어의 물결이 유권자들의 막판 표심을 뒤흔들었다는 게 총평이었다.
미 대통령 전용기, 에어포스 원이 활주로에 미끄러지듯이 내렸다. 한서진은 귀빈석에서 복잡한 심경을 담고, 에어포스 원을 바라보았다.
‘대통령으로서 방한하는 건 이게 마지막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클레튼이 다음에 한국을 찾을 때는 전직 미 대통령의 신분으로 찾을 테니.
‘다신 한국을 안 올 수도 있지.’
미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 세계 강연을 다니면서 막대한 수입을 올리는 전직 대통령도 있다지만, 4년짜리 실패한 정권으로 낙인찍힌 클레튼은 그러기 어려울 것이다.
그는 실패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집권한 4년 동안, 미국은 의미 있는 성장과 업적을 거두었다.
한서진과 SJ인더스트리의 존재가 미국 경기 부양에 큰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클레튼 대통령이 실정과 외교를 성공적으로 해낸 덕도 크다.
정책적으로 성공한 대통령이 4년 만에 물러나다니, 한국 사회도 미국 시민들 못지않게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클레튼 대통령은 한국 정부의 환대를 받으며 에어포스 원에서 내렸다. 국무총리가 몸소 그를 환대했다.
정부 환영 절차를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클레튼 대통령은 한서진과 대면할 수 있었다.
“직접 얼굴을 보는 건 오랜만이군요, 한 박사.”
“어서 오십시오, 대통령.”
“그렇게 불릴 날도 이제 얼마 안 남았습니다.”
대통령은 겉보기에는 쾌활했다. 환하게 웃는 표정만 보면 마치 재임에 성공한 사람 같아 보인다.
“미 시민들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군요. 어째서 그런 잘못된 결정을…….”
“유권자들의 선택은 언제나 옳습니다. 설령 잘못된 결과를 야기한다 해도, 선택은 그 자체로 옳습니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입니다.”
“…….”
“유권자들은 크리스 터너 당선인에게서 새로운 미국을 엿본 것이지요. 저는 유권자들이 원하는 미국의 미래를 보여주지 못했고, 그래서 선거에서 패배했을 뿐입니다.”
아무렇지 않은 듯이 환한 표정, 한서진은 왠지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잠시 침묵하던 그는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도 우리는 친구입니까?”
“그건 오히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입니다. 제가 야인으로 돌아가도, 우리는 변함없이 친구로 남을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저는 미스터 커린한테서 배운 낚시를 잊지 않을 겁니다.”
“종종 놀러 오십시오. 물 좋은 터를 많이 알고 있습니다.”
깨끗이 패배를 승복하고, 유권자들의 결정을 존중하며, 미국의 미래를 위해 기도한다. 한서진은 그에게서 진정한 거인의 그림자를 보았다.
‘우리나라에는 왜 저런 사람이 없을까. 하다못해 조금이라도 비슷한 사람도.’
그나마 김시형 검사 정도가 조금 닮았다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는 정도를 추구하는 바른 인품의 소유자일 뿐, 거인이라고 하기에는 많이 모자라다.
“퇴임까지는 시간이 좀 있지만, 이제 실질적인 국정을 맡을 일은 없을 겁니다. 대통령직을 인수해주기 위한 준비와 과정으로 남은 임기를 보내겠지요. 그전에 꼭 한 번 한서진 박사를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미 대통령으로서요.”
클레튼은 선거 패배를 마치 남의 일을 이야기하듯 가벼운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한서진은 말을 꺼냈다.
“괜찮으시면 오늘 저희 집에서 머무르시겠습니까? 혹시 결례가 될까요?”
“친구의 나라에 놀러왔는데 친구 집에서 하룻밤 자는 게 이상한 건 아니죠. 초대에 감사합니다.”
클레튼 대통령은 비밀리에 세연동 저택을 방문했다.
퇴임을 앞둔 미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한서진의 저택을 찾기에는 여론의 눈치가 보였던 것이다. 별로 좋은 소리가 나오기 어렵다.
다행히 저택이 넓고, 외곽 담이 높아 보안을 유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대통령은 전용 방탄차를 쓰지 않고, 한서진의 리무진을 함께 타고 이동했다. 미 정부가 대통령 전용차와 똑같은 모델로 그에게 선물한 차량이다.
아직 한겨울이기에, 야외 정원이 아닌 실내 접객실에 앉아 술을 마셨다.
“앞으로 무엇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실패한 대통령이 딱히 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낚시나 승마, 등산으로 여가 생활을 즐기며 시간을 보내겠지요. 간간이 못 다한 공부도 할 생각입니다.”
“그 연세에 공부라니…… 대단한 학구열이시군요.”
“하하, 죽을 때까지 하는 게 공부입니다.”
또 한 병의 와인을 따면서 클레튼은 호탕하게 웃었다.
어느덧 둘 다 적당히 취기가 올랐다. 일부러 송하나와 한지혜는 동석시키지 않고 인사만 시켰다. 남자 둘이서 술잔을 부딪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미스터 커린한테서 참 많은 양보와 배려를 받은 것 같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절대 잊지 않을 겁니다.”
“저도 지금 와서 하는 말인데, 강경책을 주장하는 이들도 없지 않았습니다. 아니, 초기에는 오히려 그들의 수가 더 많았지요.”
“으, 그건 조금 무섭군요.”
“강경책이라고 해서 험악한 것은 아닙니다. 한 박사를 적극적으로 설득하여 미국 이민을 결심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굳이 억압책을 쓸 이유도 없었습니다.”
“아아, 그렇군요.”
“하지만 저는 강풍보다는 태양열이 미녀의 드레스를 벗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몸에 집착하기보다는 마음을 얻는 것이 진정한 성공이라 생각했지요. 그래서 한 박사의 기호와 선택을 거스르지 않는 한에서 친해지려 노력했습니다.”
클레튼은 과거를 상기하며 껄껄 웃었다.
“다행히 크게 성공했지요. 한 박사는 지금 한국 땅에 살고 있지만, 마음속에서는 우리 미국의 존재가 그 어떤 국가보다 더 클 겁니다. 맞습니까?”
“맞습니다.”
한서진의 시원스러운 긍정에 클레튼은 만족스러운 듯이 더욱 크게 웃었다.
술이 더욱 들어갔다.
퇴임을 앞두고 있어서일까. 클레튼은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속마음을 드러내 보였다. 물밑에서 오갔던 음모론도 일부 설명하며 낄낄거리기도 했다.
“모든 미국인이 한 박사를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물론 알고 계시겠지만요.”
“그렇겠지요.”
“그리고 그들은 한 박사와 제가 친밀한 관계라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강하게 꺼려하지요.”
“……?”
무언가 의미심장한 어조였다. 한서진은 술기운이 오른 와중에도 그것을 느끼고, 조용히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물론 SJ인더스트리 때문에 아무리 큰 손해를 봤다 해도, 명예시민인 한 박사에게 위해를 끼칠 사람은 없습니다. 미국은 그런 나라입니다.”
“대통령……?”
“지금부터 드리는 말씀은 저와 극소수의 측근만이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짐작하고 있는 심증이라고 해야겠지요. 구체적은 물증은 없습니다만, 우리는 거의 확실시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목소리는 더욱 작아졌지만, 오히려 그만큼 또렷해졌다. 한서진은 숨을 죽인 채 그의 말을 기다렸다.
“저는 크리스 터너 당선인에게 패배한 게 아닙니다.”
“그럼…….”
“돈에 패배한 거죠.”
돈에 패배?
한서진은 어리둥절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이지?
설마 선거 자금이 부족해서 패배했다는 뜻? 아니면 당선인의 주변 자본가들에게 패배했다는 의미? 한서진이 종잡지 못하고 있을 때, 대통령이 또박또박 말을 덧붙였다.
“정확히는, 달러 때문에 패배한 겁니다.”
========== 작품 후기 ==========
왕자님의 잦은 출연 섭외 때문에 실탄프로덕션이 파산 위기라서 짤린 겁니다. 조연 출연료를 알뜰하게 아끼기 위해서입니다.